(마 5:38-42)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출애굽기 21장 24잘에 나오는 법으로 모세가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고, 그 세부적인 법을 시내산에서 백성들에게 선포하면서 함께 명한 법입니다. 그리고 이건 비단 성경과 기독교, 유대교 등의 신앙의 범주를 넘어 인류 법체계의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 지구상의 모든 나라의 법은 사실 모든 죄에는 상응하는 형벌이 따르고 있습니다. 상응하는 형별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이건 세상의 법입니다.
그리고 이건 비단 사법체계에 관한 고급 문제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일상에서 마치 작용과 반작용처럼 사람들의 관계를 이끌고 있는 사회적 DNA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축의금이나 부조금이 그렇습니다. 축하나 부조할 일이 생기면 예전에 내가 받았던 금액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탈리오의 법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범죄에 대한 벌만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상대하는 기본 원칙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원칙이 통하지 않는 관계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처럼 아주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남을 상해하거나 헤친 경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관한 말씀으로 한정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일상적인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이 말씀의 배경을 약간 알면 좋습니다. 사람은 대게 오른손잡이이고, 오른쪽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바르고 옳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더 그랬고, 지금도 중동이나 인도 같은 곳에서 왼손으로 아이 머리를 쓰다듬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오른쪽은 의(義)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른쪽 빰을 맞았다는 건 옳은 의가 핍박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대게 오른손인 점을 감안했을 때, 오른 빰이 맞았다는 건 정황적으로 뒤에서 때린 상황입니다.
다음으로 옷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겉옷은 신분이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겉옷이 사람의 많은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유니폼은 말할 것도 없고, 옷 매무새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입니다. 사람은 주로 이것을 탐냅니다. 그런데 ‘속옷을 달라고 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은 과시하는 자아의 상징이라면, 속옷은 감추고 내재된 것,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것을 말합니다.
오리와 십리는 우리나라 단위지만 정확히는 예수님 당시 로마 마일이 단위입니다. ‘5마일을 가자고 하면…’이 됩니다. 여기에는 당시의 특이한 법적 배경이 있는데, 로마 군인이 자기 짐이 무거우면 유대인들에게 자기 짐을 대신 지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데, 그 한계가 바로 5마일이었습니다. 이 법을 ‘앙가리아(Angaria)’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3가지지만 각각의 속뜻은 다 나의 의를 달라고 하면 삶의 형식도 내어 주라는 하나의 뜻입니다. 오른 빰을 때리는 것이나, 속옷을 달라고 하는 건 나의 의를 핍박하는 행위입니다. 억지로 나를 끌고 가는 것 역시 나의 의와 뜻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내가 옳다는 것이 부정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옳고 바른 상황이고, 뒤에서 내 빰을 때리듯 올바르지 않은 상황에 놓였을 때 대항하지 말고 오히려 나의 의뿐 아니라 육신의 수고와 가진 것을 내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더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어리석은 주장을 따라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라는 뜻입니다.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용하기 힘든 것입니다. 사람은 더 옳은 의와 명분을 가지고 있는 쪽이 이기고, 그 뜻대로 하는 걸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선 더 공부한 선생과 교수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맞고, 교회에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게 사람의 생각입니다. 착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사람보다 잘 살고 대우 받아야 한다는 게 사람의 생각입니다. 특히 자기가 옳은 당사자가 되면 이건 더 강력한 명분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당연히 높임과 찬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아는 대로 세상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신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십자가형을 선고하자 순순히 순종하셨습니다. 정말로 오른빰을 맞자 왼빰인 육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의 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을 위해 죄인이 되는 도
많은 경우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고서 따라오라고 하신 십자가를 종교적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교회에서 수고하고, 세상 이익보다 신앙을 선택한 손해 같은 걸 십자가의 삷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결과지 십자가 삶의 본질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의 본질은 바로 내가 더 온전하고 옳지만 어둡고 죄 중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 가치관으로 옳다고 외치고 주장하는 말에 육신의 내 귀를 내어(들어) 주고, 내 육신을 그들의 가치관 앞에 내어 주어 수고하는 작은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이끄는 본성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복수의 맥락에서, 또 법적 처벌과 정의의 개념에서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범죄와 형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생각하는 더 옳은 자에 대한 정의의 관점을 새롭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그걸 정의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오히려 어리석은 자에게 나의 육신과 삶을 내어주는 수고로 섬기는 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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