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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2:1-11)

사무엘상 2장에는 어렵게 아들을 얻은 한나의 기도가 있다. 그런데 내용이 , 오랫동안 자녀가 없다가 어렵게 아들을 얻은 어머니의 기도라고 보기에 너무 결연하고, 무겁다. 마치 인생의 위기와 압제에서 벗어난 사람의 기도 같고, 전쟁이나 다툼을 이겨낸 의인의 기도 같다. 비록 남편의 다른 아내 브닌나의 멸시가 있었다곤 해도, 전체적으로 내용이 자식 없던 여자가 아들을 얻은 감사의 기도라고 하기엔 너무 무겁다.

 

그럼 한나는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 그건 아들을 구하는 한나의 기도가 단지 여자가 아들을 구하는 기도를 넘어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하나님 아들로 거듭난 삶을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고, 하나님 앞에 거듭난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모든 권세를 이겨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소 무거워 보이는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아들이 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을 얻은 한나의 기도는 단순히 자녀가 없어 멸시받던 여자가 아들을 얻어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의를 좇아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감사와 그렇게 하나님 아들이 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감사하며 드리는 기도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 살면서 세상의 종으로 멸시받다가 구원받은 기쁨으로 드리는 모든 인생의 기도다.

 

한나는 거룩하고 반석이신 지식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었다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자기를 멸시하던 남편의 다른 아내 브닌나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야 하는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도록 하는 세상과 사람과 가치와 지식과 철학 모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는 이것들이다.

 

그렇다고 한나가 세상에 있는 하나님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을 이긴 사람인 아니다. 그의 감사는 자기가 그걸 이겨냈다는 것에 관한 감사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목적으로 창조된 사람이 목적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많으나 한나는 아들을 얻은 일로 자기는 그런 세상의 대적들을 이겨냈음을 감사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어둡게 하는 세상의 모든 대적을 이기는 것이고, 이건 기쁨이고 감사할 은혜임을 말하고 있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삼상 2:1)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 아들이 되는 떠나게 한다. 그렇게 아들이 되지 못하도록 하나 하나님께 순종하면 나의 뿔로 표현된 존재의 의로움이 높아진다. 존재로서 존재 목적을 회복한 온전한 사람이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아들이 되는 , 이것이 우리의 감사요, 승리며,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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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존재적 관점으로 보자)

주님의 재림에서 시작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의 마지막 권면은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멀리하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물론 그 뒤에 형제들 그러니까 사도들을 위한 기도와 그리스도의 평강을 기원하는 문안이 있다.

 

이 블로그는 성경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다. 행위가 본질이 아님을 설득하고 있다. 행위는 본성, 정체성에서 비롯된 표현이지 주체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걸 늘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게 행동의 무의함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구원받았다면 도둑질해도 괜찮냐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건 존재론적 관점의 의도가 아니다.

 

오늘 본문이라 할 수 있는 데살로니가 전서 마지막 권면 중에 있는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멀리하는 말씀을 존재론적 관점으로 조명한다면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을 멀리하는 존재가 되면 이 말씀은 그저 이루어진다는 게 성경을 존재론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되느냐는 문제가 있는데, 그 답이 바로 <거듭남>이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이 바뀐다는 말이다. 생명이 바뀐다는 게 바로 존재가 바뀌는 것이다. 성경이 굳이 거듭난다는 표현과 새 생명이 되라 말씀하시는 의도가 여기 있다. 성경의 말씀들을 읽고, 듣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그런 존재가 되는 건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실패와 실패를 대하는 태도다.

 

거듭남이란 구원의 은혜는 존재를 바꾸는 은혜다. 성경은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악한 것인 줄 알지만 나름의 유익이 탐이 나서 망설이다 성경에서 악을 멀리하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내적으로 갈등하다가 어렵게 악을 멀리하는 건 존재가 바뀐 게 아니다. 거듭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들 대부분이 이렇게 성경을 지키려 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 그렇게 해야 복을 받는다고 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람을 강제하고 바꾸려 한다. 노력해서 바뀌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인 거듭남이 버젓이 있다. 우리가 거듭남의 은혜를 누리도록 하시려고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었다. 그렇게 존재가 바뀌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 삶의 모양과 행동을 바꾸는 건 거듭남의 은혜가 아닌 노력을 말한다. 노력해서 은혜를 받거나 외면해서 벌을 받는 중에 선택하라고 말한다. 이건 심하게 말하면 가스라이팅이다.

 

가장 큰 문제와 피해는 그렇게 해서는 성경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패만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실패한다는 게 기특한 노력이 아니다. 계속 실패만 한다면 결국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신앙의 궁극적 목적,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손해 보면서까지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인생 전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 이런 심각한 위험 앞에서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 괜찮다며 안심할 문제가 아니다.

 

바울 사도의 많은 권면의 본질도 열거한 행위에 관한 권면을 빠트리지 말고 행하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런 본성을 가진 생명은 우리가 다 아는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생명의 본성이다. 그런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게 거듭남이다. 바울 사도를 비롯한 모든 사도의 권면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존재에 관한 말씀으로 읽고, 듣고, 전해야 한다. 그게 성경의 의도다. 성경은 그 거듭난 존재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하나님 아들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존재론적으로 성경을 보지 않고, 행위와 소유의 말씀으로 본다. 어떤 행위가 소유의 변화를 불러온다는 인류 공통의 집단 지성으로 성경을 본다.

 

바울 사도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은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전했다. 어느 시대나 그건 참 힘든 일이다. 그래서 서신의 마지막에는 늘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자기 일행과 동역자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한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린다면 오늘 우리도 성경을 존재론적으로 보면서, 어떤 행위를 권면하고 있는 지를 주목할 게 아니가, 그렇게 권면하는 행위는 어떤 존재의 본성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 존재가 바로 거듭난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도 거듭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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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만도 못한 나를 위해 …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5. 7. 23. 09:42 Writer : 김홍덕

우리는 교회에서 때로 벌레만도 못한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많은 경우는 예배를 대표하는 기도에서 들을 있다. 그리고 회개할

 

표현은 겸손한 표현이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면 다른 부분이 있다. ‘벌레만도 못한 나를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박았다?’라는 과연 등가가 맞는 지다. ‘하나님이 그렇게 계산이 맞는 신인가?’라는 생각을 있다. 결론적으로 벌레만도 못한 나를 위해라는 비유나 표현은 반만 맞다. 전체 인류나 사례 중에 반이 아니라, 가지 상황 하나라는 뜻이다.

 

먼저 사람은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는 생각해 보면, 하나는 아들을 보내시면서까지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는 자신을 탓하기 때문이고, 하나는 하나님, 정확히는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는 자기의 능력과 마음과 행동 때문이다. 중에 중요한 사실 후자다.

 

사람은 자기를 연약하게 본다. 그뿐 아니라 부정하게 본다. 이유로 불순종한다 생각하고, 불순종하기에 이렇게 본다. 그러나 사람이 연약하든 온전하든 어쨌든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셨다는 간과하면 된다. 사람이 자기 역량을 어떻게 평가하든 하나님은 계획이 있어 이렇게 창조하셨고, 이렇게 인생을 살도록 하셨다. 그러니까 사람의 관점에서 연약하고 부족하게.

 

그러나 모든 존재는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 집이나 회사나 공장 같은 곳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의 예외 없이 기준에 따라 강해지고 약해진다. 존재는 그대로인데 기준에 따라 그렇게 된다. 비닐 봉투와 칼을 비교해 보자. 일반적으로 칼이 훨씬 강하고, 비닐 봉지는 칼의 물리적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칼은 어떤 것도 담을 없다. 음식물 쓰레기를 칼에 담아 버릴 수는 없다. 강하고 유익함의 기준(목적) 무엇을 담는 능력이 되면 칼은 완전 무쓸모의 물건이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표현하고 있다. 우주와 자연과 세상은 하나님의 강하고 위대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만약 사람을 이런 기준으로, 그러니까 바벨탑을 쌓듯 위대해지고 강해지고 높아지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자 기대 그리고 목적이라고 생각하면 그대로 벌레만도 못하다. 그러나 사람은 그걸 목적으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 중에 낮아지고, 겸손하며, 섬기고, 사랑하는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지어진 존재다. 사람이 얼마나 귀하고 온전한 존재인가 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중에 자기가 존재한다는 인식하는 유일한 존재가 사람이고, 연장선에서 존재의 목적을 탐구할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결론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까지 하나님께 위임을 받은 청지기 같은 유일한 존재가 사람이다. 이런데 사람이 벌레만도 못하다고?

 

그렇지만 만약 하나님의 이런 뜻에 반하여 사람이 낮은 자리에서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자리를 떠난다면 정말로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 무엇이든 목적을 상실하면 그건 쓰레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벌레만도 못한 나를이라는 말은 사람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에 따라 맞기도, 틀리기도 말이 된다.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사람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연약한 사람은 벌레와 비할 없는 하나님 아들과 같은 존귀한 존재인 반면, 강하고 위대해지는 사람의 성공과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관점으로 보면 정말로 벌레만도 못한 사람이 된다.

 

사람은 벌레와 비할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를 너머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이 담기고, 하나님의 말씀(의와 ) 육신과 자체가 되는 유일한 존재다. 게다가 그렇게 할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있는 세상 유일의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존귀한 존재가 어떻게든 창조의 목적 안에서, 창조의 목적대로 살기를 바라신다. 이걸 다른 말로 바꾸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 바라신다가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런 귀한 존재를 벌레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더욱이 하나님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를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박는 바보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결론을 정리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존귀한 존재이고, 강하고 위대해지는 성공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으로 보면 벌레만도 못한 존재다. 여기서 중요한 있다면 당연히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것인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신 존재가 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뜻과 목적이 존귀함의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정말로 존귀하고 위대한 존재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

 

이제 어떤가? 우리가 벌레만도 못한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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