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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성경이 회색이던 시절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2. 27. 12:19 Writer : 김홍덕

<개와 늑대의 시간>, <방 안의 코끼리>, <낭패를 당하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말은 언뜻 성경과는 무관한 말들처럼 보인다. 분명 성경을 이야기할 때 자주 사용하는 비유나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세 가지가 오늘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상태?, 마음? 더 나아가서 믿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고 있다. 이야기하고 싶은 건 자기가 믿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믿는지다. 물론 어떤 세계든 모든 사람이 확신을 가지고 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삶을 넘어 사후 세계에 대한 기대까지 포함된 것인데, 그냥 대충 믿어서 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밝고 분명한지, 자기 신앙이 선명하고 의문스러운 거 없이 만족스러운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모태신앙인 나의 경험상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 경험은 그랬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신앙에 깊이 몰입했다. 10대 소년 시절의 열심을 깊이 몰입했다고 하기 어려울지는 몰라도, 그 이후 대학생이 되고 청년이 될 때까지 결론적으로 가장 열심이었던 건 교회 생활이었다. 하지만 많은 의문들이 있었고, 그 의문들은 청년이 되어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우선 신앙에 대해 언제까지, 어디까지 해야 "됐다!"’ 싶은 생각이 들까?’라는 의문이었다. 3 때부터 주일, 수요일 저녁 예배가 끝난 다음 한참 형인 대학부 형님들이 모여 기도하는 모임에 들어가 길게는 거의 2시간씩 기도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버스가 사고가 나서 지금 죽는다면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답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우선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게 언제까지’, ‘어디까지라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런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부는 정말로 성경 공부를 많이 했다. 2학년이 되면서부터 조의 리더가 되었다. 토요일에 있었던 대학부 모임의 성경 공부 모임 30분을 위해 내가 준비한 시간은 최소 2시간이었다. 그때까지 간간이 하는 성경 퀴즈 대회에서 1등을 놓쳐본 기억이 거의 없다. 어느 대회에선 사회자가 나에게 지금 남은 문제를 2등이 다 맞춰도 역전이 되지 않는다라며 더는 답을 맞추지 말라고까지 했었다. 그런데 나는 성경에 의문이 있었다. 이건 참 웃기는 일이었다.

 

나의 의문은 대학 졸업 후 군 생활에서 결국 임계점을 넘어섰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새벽 점호 전 잠깐 일어나 기도하면 그날은 평안한 듯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꼭 고참들의 집합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그럼 기도 열심히 하자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나의 상태가 자유롭지 않고 기도해야만 뭔가가 담보되는 구속으로 느껴졌다.

 

내가 아는 성경 지식은 나를 괴롭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는데, 예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자유롭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와서 나는 그때 피곤한 일 당하지 않으려면 기도 열심히 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나는 지금도 회색 성경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예수를 잘못 믿고 있거나, 예수가 사기꾼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로 생각했다. 물론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시간이 흘러 한 사람을 만났다. 목사였다. 그의 말씀은 그때까지 내가 듣던 것과 사뭇 달랐다. 그래서 나는 마음 깊이 잠겨 있던 질문을 던졌다.

 

“기독교 신앙은 Do에 관한 것입니까? Be에 관한 것입니까?”

 

나는 목사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려울 거로 생각했지만,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Be에 관한 것이지라고 답했다. 어느 지경까지 해야(Do) ‘됐다라는 생각이 들지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그건 나에게 아주 신선한 접근이었다. 그날 이후 19년 이상 나는 그와 함께 있었다. 그 시간은 나에게 성경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주었다. 그를 만날 때 29살이었는데 그때까지 의문은 거의 해결되었었다. 그건 분명 성경의 본질적 복음이었다.

 

하지만 또 깊은 고민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 고민은 이전과 달랐다. ‘복음과 율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복음이 율법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나는 그 목사님과 이별했다. 귀한 복음이기에 귀하게 여겨야 하지만 문제는 그 복음이 아주 낮아지는 거라는 것이다. 귀하고 귀한 것을 얻고 보니 낮아지는 것이었는데, 그때까지 그 목사님과 함께 우리집에서 시작해서 일군 교회가 그렇지 않은 길로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이후 나는 블로그에 복음을 설명하는 일을 시작했다. 때로는 사람들이 찾아 와 만나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어진 분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만남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좀 적극적 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변곡점일 수 있는 지점에서 내가 고민했던 것, 그리고 순례의 여정을 거쳐 벗어난 회색 성경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 글은 자기 신앙이 만족스러운 사람이나 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 외 다른 접근으로 인한 재앙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글이다. 그러나 적어도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었는데 왜 회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쩌면 진정한 구원의 세계를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려면 아브라함처럼 지금껏 믿어 온 아비 집을 떠나는 믿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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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좌경화는 이단의 길

Category : 잡동사니 Date : 2025. 2. 23. 09:12 Writer : 김홍덕

2025년 초 한국 사회는 심각한 상황이다. 이 와중에 큰 소리는 아니지만 교회가 좌편향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있다. 관망하고 있다는 걸 비판하는 소리도 있다. 물론 이는 보수 쪽 이야기라고 봐야 한다. 이런 중에 교회의 좌경화라는 이슈, 좌경화가 부담스럽다면 진보화라고 해도 되는 신앙적 관점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이야기가 보수적 관점의 논조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은 이상하게 바꾸어 놔서 오히려 어색한 사도신경의 옛 버전에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이 있다. 그런데, 정작 기도는 다르다. 주일 예배 시간에 주로 장로들이 하는 대표기도, 물론 주일 예배가 아닌 다른 집회에서도 '세상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 바로 잡아 주시길' 기도한다. 원색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당신이 경영하는 세상이 엉망이 됐어!"라는 항의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실수도 하지 않는다"라고. 황당한 모순이다. 더 황당한 건 이걸 모순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온전하게 경영하신다는 믿음은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가장 근간에 속한다. 그렇다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은 이 근간에 속한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가난이나 불평등의 문제를 신앙으로 가져와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기독교의 본질인 양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가치관을 선언하는 건 소위 말하는 깨어 있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문제를 해결하러 온 메시아라고 믿는 것이다. 개념 없이 보면 여기까지도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향유 옥합 사건 때 하신 말씀이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는 로마로부터의 독립, 가난 해결, 병든 자의 회복과 같은 세상 문제 해결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크게 환호했지만,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버렸고, 유대인들은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필요 없다고 강도 바라바를 선택했다.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은 뭔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가난이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물론이고 기독교 색채가 아주 강한 초강대국 미국에서도 사회 문제 해결이 기독교 신앙 최고의 과제인 것처럼 나서고 있다. 가난한 자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 복 받는 일이라고 외치고 있다. 사회적 문제의식과 교묘히 간음한 신앙은 당연히 사회주의나 다양성 같은 진보적 가치관과 결합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끼리끼리 노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다. 또한 사람이 보기에 너무나 엉망이 된 세상은 하나님께서 경영을 잘못하셔서 이런 꼴이 된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게 경영하시는데 이걸 사람이 생각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면서 문제로 만들어 웃기지도 않게 신앙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불에 기름을 붓듯 자기 삶이 사회적 문제 속에 있다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기도 한다. 대형 교회가 굳이 필요 없는 수억 원짜리 파이프 오르간을 배경으로 가난을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는 촌극을 찬양하고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세상은 "내가 옳다"는 사람 때문에 시끄러워진다.

 

이런 여러 신앙의 상식적 사고만으로도 교회는 진보나 좌경화가 될 수 없는 공동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난은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그걸 신앙으로 해결하려고 하는가? 그건 사회의 문제이고, 가이사의 것이며, 그들에게 맡기고 순종하면 되는 일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이 맡긴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겠다는 무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신 분이 아닌가? 그런데 그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세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그건 예수님을 모욕하고 배반하고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이다.

 

 

그렇다면 세상 문제에 신앙은 외면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사회적 일에는 봉기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2025년 한국 사회의 탄핵 반대 운동이 여기 속한다고 본다. 문제는 가치관과 동기다. 사회에 문제가 있으니 이를 신앙으로 해결하자며 봉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지만, 그런 잘못된 가치관을 향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임을 외치는 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온전하게 경영하시는 분이라는 신앙을 안에서 보면, 신앙으로 가난을 해결하려 하는 외침은 거룩해 보이지만, 사실은 거만한 골리앗의 모욕으로 들린다.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 위에 있는 가치관은 세상의 문제를 대중적 신앙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교회와 공동체를 이루면서 늘어나면 그것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 가치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온전하게 다스리신다는 믿음도 없이 어떻게 목사가 되어 강대상에서 세상 문제를 해결하자고 외칠 수 있는지 그 무식한 양심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교회가 진보적 관점과 사회주의 이념 혹은 아류에 매몰되어 신앙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는 건 자기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고, 정통이라는 양의 탈을 쓴 이단 늑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온전하게 다스리신다는 이 믿음 하나만 있어도 교회는 사회주의를 멀리하게 되어 있다. 이 믿음 하나가 없는 교회를 하나님을 믿는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건 그냥 이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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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는 유대민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스더 Date : 2025. 2. 16. 14:06 Writer : 김홍덕

모르드개와 유대인을 모두 죽이려는 하만의 계획은 수포가 된다. 하지만 하만의 계획은 오히려 자기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계기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에스더가 왕후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르드개가 왕을 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만이 유대인을 말살하려고 한 이유는 자기에게 절하지 않은 모르드개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 세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에 대한 세상의 핍박을 대변한다. 세상은 왕의 권세를 자기 것으로 생각한 하만처럼 하나님이 주신 삶을 자기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인 높은 자리와 영광을 구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며 핍박한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바로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의 모습이고, 그들이 보여준 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과정이자 하나님의 섭리다.

 

높은 자리와 영광을 진정한 가치로 생각하는 세상은 낮아지는 본성을 하나님의 영광과 가치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다. 굳이 잡아서 때리고 고난을 가하지 않아도 세상 가치의 낙오자라며 비웃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핍박이다. 이런 핍박의 극치는 뭐니 뭐니해도 십자가다. 십자가가 이 모든 핍박을 이겨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모습은 십자가의 한 단면인 셈이다.

 

모르드개는 민족의 위기를 에스더에게 전하면서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4:14)"라고 말했다. 이런 날을 예상하고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왕후로 만든 건 아니지만, 왕후라는 자리가 백성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분명하다.

 

앞에서 우리는 왕후라는 자리, 아내라는 자리는 왕과 남편의 의라는 내용에 대응하는 형식이라는 걸 비유한다고 설명했다. 왕후가 왕의 후사를 잇는다는 건 왕이 가진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을 낳는다는 것으로 결국 왕의 의라는 내용과 여자라는 왕후의 형식이 하나가 되어 아들을 얻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육신이 되어 얻게 되는 하나님 아들로 사는 삶을 설명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 상황과 전개는 에스더가 가진 왕후라는 지위가 유대인을 세상의 핍박과 멸망에서 구했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을 때 세상의 핍박을 이길 수 있다는 걸 설명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에스더는 그 유명한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말로 대변되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는 왕의 허락 없이 왕에게 나아갔다가 왕이 허락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당시의 법을 인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자기 백성을 위해, 세상의 핍박을 이기기 위해 왕에게 나아간다. 왕이 허락하므로 에스더가 죽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입긴 하지만 에스더로서는 죽을 수 있는 자리로 스스로 간 건 분명하다.

 

에스더의 이런 모습은 십자가로 스스로 가신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하다. 물론 에스더는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죽을 자리로 스스로 갔다는 건 같다. 이 에스더의 모습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스스로 낮은 자리로 가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상고할 것은 이런 에스더의 모습이 자신과 유대민족을 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세상의 핍박을 이길 수 있다. 세상과 복음이라는 이런 가치의 선택에서는 하나를 부인하는 거로는 이길 수 없다. 세상의 가치를 부인하고, 추구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길 수 없다. 어둠을 향해 "물리 가라" 소리친다고 물러가지 않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빛이 있어야 한다. 즉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의 가치가 진정한 가치가 되어야 이길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왕후라는 자리, 여자라는 자리는 왕과 남자가 가진 의를 형식으로 바꾸어 내는 존재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남자로 표현하는 건 하나님의 성별이 남자여서가 아니라 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인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온전한 존재가 된다. 온전하다는 건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유혹이나 핍박을 이길 수 있다. 인생으로서 자기 존재 목적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건 가장 합당하고 온전한 일이다.

 

우리가 세상의 핍박, 높은 것을 추구하지 않으므로 받는 비난과 조롱은 낮아지는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여길 때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노력이나 자기 세뇌로 안 된다. 그리스도의 낮아지는 본성으로 거듭나야 한다. 생명이 바뀌지 않으면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 늑대가 아무리 노력해도 늑대인 이상 고기의 가치를 버릴 수 없다. 양으로 거듭나면 고기는 무의미해진다.

 

또 하나 유대인을 구한 힘은 모르드개가 아하수애로를 구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에스더 2장 말미에 나오는데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통해 역모를 미리 알려 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잠들지 못하던 아하수애로 왕이 이 일을 상고하게 되고, 그때 어떤 보상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되므로 이를 보상하는 일이 유대인을 구하는 또 하나의 힘이 된다.

 

구조상 모르드개가 아하수애로 왕을 구하듯 사람이 하나님을 구하는 일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능력이나 의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셔야 하는 필요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사람은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존재라고 할 수도 있는 셈이다.

 

이는 아하수애로가 자신을 영화롭게 할 사람이라고 모르드개를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분명하게 언급하셨는데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고 선언하셨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요 17:10)

 

하만은 유대인,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을 핍박했지만, 하나님은 아하수애로를 통해 오히려 모르드개가 절대자를 영화롭게 하는 사람임을 확정했다. 하나님을 찬양 하는 자,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이 아니라 여기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 이걸 알아야 거듭난 사람이다.

 

세상은 높은 곳을 앙망하고 평안과 성공을 구하면서 그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핍박한다. 이런 그들의 행동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주신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이 능동적으로 핍박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핍박에 거하는 꼴이 되기는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영화롭게 여기신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하만과 모르드개의 전세 역전을 가져온다.

 

세상을 사랑하고,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아는 사람은 하만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를 영화롭게 여기는 줄로 안다. 착각에 빠진 하만은 결국 그 망상 속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무지보다 착각이 위험하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이게 하만과 모르드개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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