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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너무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 없는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또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으로 권면하면서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했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운전 중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가는 게 하나님의 뜻이냐를 묻듯이 일상의 일들을 묻지만, 사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단 하나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영광이란 나타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사람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런 관점 안에서 기뻐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과 감사하는 일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바울 사도가 이 말씀으로 우리를 권면하는 이유다. 다시 정리하면 우리가 기뻐하는 모습이 세상과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표현하고 드러났을 때 감사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본분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도 그저 일상으로 사용하지만,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람의 모습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은 우리 손에 있는 하나의 사과가 the Apple에 속한다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과 같은 생명(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다.

 

'예수 안'은 예수와 같은 생명을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몸소 보이시려 낮고 낮은 땅으로 오셨다. 그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진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고, 낮은 마음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된 마음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로 나타난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삶이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와 같은 항상성은 Case by case 별로 마주하는 상황과 시간과 이벤트에 누락 없이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의도가 아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성경도 그런 식의 신앙은 인정하지 않는다. 잘하다가 하나를 그르치면 아니함만 못하다는 게 하나님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이건 깨어서 노력하는 일로 되는 게 아니다. 바울 사도 역시 그렇게 노력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존재>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법은 단 하나다. 앞에서 설명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는 것.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생명,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된 것이고, 그렇다면 언제나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살 수밖에 없다. 이것보다 온전한 방법은 세상에 없다. 무엇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신앙인 대부분이 항상 기뻐하지 못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며, 모든 일에 감사하지 않는 자신을 부족하다고 반성하긴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이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인데도. 이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게 아닌데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큰 문제로 깊이 반성해야 한다.

 

예수 안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고, 구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성품대로 사는 사람을 거듭나서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한다. 이건 순간과 상황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이걸 모르면 이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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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고난 중에도 신앙을 잘 지킨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권면들 하고 있다. 말씀을 전하는 수고를 하는 사람을 각별한 사랑으로 대하며 서로 화목하고, 게으른 자를 훈계하며,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우며 모든 사람에게 항상 선함으로 대하라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선함'이 무엇인가?'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항상' 그 선함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을 것인지다.

 

선함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착하고 성실한 행실이라 생각한다. 이 생각에 성경도 이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세상 사람에게 선한 사람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항상'은 좀 다른 문제다. 일단 누구나 '이게 가능해?'라고 생각할 법한 일이다. (그런데 기독교인 대부분은 이걸 고민하지 않는다. 이건 신앙이 없는 것이다)

 

'항상'이라는 빈도는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사안이다. 하지만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역량을 모르실 리는 없다. 그럴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어야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다.

 

'항상'은 존재적 관점이다. 일어나는 사건, 상황마다 동일한 대응을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은 항상 사람으로서 만물과 일을 대한다. 모든 사람을 항상 선하게 대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은 내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면 모든 사람을 선함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다.

 

'항상'은 존재적 관점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그대로 녹아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행함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네가 어떤 공로를 쌓았느냐?'가 아니라 '너는 어디(존재의 자리)에 있느냐?'를 물으시고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관계를 물으시는 존재의 신, 여호와시다. 하나님께서 항상, 언제나 라고 하신다면 그건 항상 그럴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다.

 

'선함'도 같은 맥락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이다.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은 사람이 하나님이 목적한 존재인지를 선의 기준으로 보신다. 그게 사실 유일한 선의 기준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을 것이므로,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과 같은 존재면 선한 존재고, 그렇지 않다면 설사 육신이 멀쩡하고 건장해도 악하고 죽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와 사망이 가득하고, 우리가 다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하시는 근거가 이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뜻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다. 특별히 사람이 표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걸 보여주러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셨다. 자기 십자가는 개인에게 특정된 십자가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래야 한다는 의미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대로 사는 것,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선함은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의 선함이자 우리의 존재 목적은 십자가다. 남들 하기 싫고 위험한 희생을 감수한다는 게 십자가의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사람들이 '그 꼴로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라 하느냐?'라는 주장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신 게 십자가다. 육신을 내어주었다는 건 육신의 수고를 감당한다는 것이고, 그 궁극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주장에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게 바로 예수님이 보이신 십자가의 본질이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모습이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는 게 거듭남이다.

 

거듭났다는 건 생명으로 났다는 말이다. 생명으로 났다면 그 생명 고유의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시는 겸손하고 사랑하는 게 본성인 생명이 된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누구를 대하든 그 생명으로 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항상' 선함으로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다.

 

결국 모든 사람에게 선함으로 대하라는 말씀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바울 사도는 그 생명으로 살아가기를 권면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고난을 이기고 소망을 가진 삶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런 삶의 성숙한 모습을 더 말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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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죽으심을 믿는 사람,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을 얻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해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세상의 잠언에도 결과는 생각지 말고 오늘, 지금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있는데, 그와 같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재림은 절대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다. 그 때가 설령 부지불시라 해도 결과는 같다. 낮에 속한 사람은 기쁨과 영광의 순간이고, 어두움에 속한 사람에겐 도둑과 같은 재앙이 된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께서 죽으심이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함께 살리시기 위함이라고 확정한다. 지금 설명하는 대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재림은 그저 사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명확하다. 오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 아들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면 어쩌면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재임에 대한 대비는 완벽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사람들은 재림에 관해 지나치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든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날 다미 선교회의 일을 회상해 보면, 그들은 '이제 예수님이 오시니 재산 같은 건 필요 없다'라는 말에 자기 재산을 팔아 헌금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예수님의 재림에 나름의 대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 바울 사도의 대비책은 다르다. 사도 바울의 대비책은 성도들이 서로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우리가 자든지 깨어 있든지 살리기 위함이므로 이를 서로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며 격려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가장 온전한 재림 대비책이란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가장 온전한 방법이 있다면 그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것이다. 오시는 예수님과 같은 본성으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재림은 미운 오리 새끼가 만난 백조 떼와 같은 구원 그 자체다. 내가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생명이면 예수님이 언제 오시든 상관이 없다. 언제나 소망은 속히 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이 도둑이 임하는 것 같은 사람에겐 오지 않아야 하는 일이 재림이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기 정체성인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자기 의와 존재 목적인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이 삶은 노력하는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그리스도로 살게 된다. 이게 생명과 본성의 이치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로 살게 된다.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하나님께서 정한 구원인 창조 목적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격려하고, 세상과 교회에서 덕을 세우고 칭찬받는 사람으로 사는 것,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재림 대비책이다. 사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이사하는 날 자전거 타고 놀고 있는 아이처럼 재림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게 언제든 부모가 자기를 데려갈 것을 아는 아이처럼 예수님이 언제 오시든 자기에게 생명과 구원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진정한 재림의 대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완벽한 재림 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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