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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성선설, 성악설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2. 05:49 Writer : 김홍덕

2013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쓴 블로그의 역대 최대 조회 글은 성선설과 성악설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주제에 많은 관심을 가진듯하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고 죄 없이 창조하셨는데 사람이 타락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데 살면서 하나님을 만나 구원을 얻는 것인지가 궁금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신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로봇이나 아바타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뒤에 설명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건 일면으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달성된 그리스도의 모습이고, 육신이라는 형상에 한정해서 보면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모습이기에 기뻐하셨다는 의미의 말씀이다.

 

그러면 이제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선악의 상태를 이야기해 보자. 이해를 위해 휴대전화를 가지고 설명하려 한다. 사람에게 창조주이자 주는 하나님이고, 휴대전화에 있어 창조주이자 주인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사람 창조 목적이 있듯, 스마트폰으로 발전한 휴대전화를 만들고 구매하는 사람의 목적은 통화하고, 인터넷 활용이다. 제조사는 그런 소비자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전화기를 만든다. 그렇게 설계하고, 제조한 다음에 엄격한 품질 검사를 시행한다. 그리고 설계 기준에 맞으면, 즉 소비자의 목적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면 출하한다. 여섯째 날 하나님이 감탄한 사람은 바로 이런 상태다.

 

하지만 아직 휴대전화는 개통되지 않았다. 소비자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못하는 상태다. 이때는 아직 목적 안에 있는 상태가 아니다. 즉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목적 안에 있지 않다는 건 목적을 기준으로 보면 아직 죄의 상태다. 창세기 시작에 있는 '혼돈하는 땅'으로 표현된 사람의 상태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이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다만 사람은 스스로 이 상태를 지속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육신으로 창조되고, 태어난 인생은 개통되지 않은 휴대전화 같은 상태

 

창세기 2장에서는 다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상세한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코에 불어 넣으신 생기다. 즉 생령이 된 사람이라는 또 다른 존재가 나온다. 바로 하나님의 뜻이 생명이 된 사람이다. 휴대전화로 치면 주인이 정해지고 개통해서 목적대로 사용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태가 진정한 휴대전화이듯, 사람 역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종적 존재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생명 본성이 된 사람이다.

 

하나님 창조의 최종 목적은 바로 생령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이런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a Christ)라고 한다.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 모습의 표상이고 본이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 실체를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놋뱀처럼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람이 보고 자기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는 게 하나님 구원의 계획이다. 이 계획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운 의지로 사람이 스스로 순종함으로 완성된다. 그런데 사람은 그걸 자기 인생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으로 생각한다. 이게 십계명에서 금한 도둑질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사람은 날 때 선한 존재, 악한 존재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선한 존재로 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 뜻만 수행하는 로봇 같은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게 되고, 그 상태에서 사람이 타락한다면 하나님은 무능한 신이 된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악한 상태로 창조하신 다음 갱생시키는 계획이라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될 수 없다는 오류에 빠진다.

 

창세기의 흐름도 그렇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자기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고,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는 존재로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게 창조하셨음을 말씀하시고, 2장에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 곧 말씀과 계획으로 생명이 되면 생령, 곧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존재가 된다는 걸 말씀하셨다.

 

그리고 3장에서의 타락은 하나님이 주신 의지로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는 사람의 모습을 설명하시고,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지만 스스로 만족할 수 없고, 서로 죽이는 타락한 모습을 설명한다. 이는 주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휴대전화와 같다. 그런 작동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폰뱅킹으로 송금하는 게 선하지 않듯,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을 벗어나 사회적으로 선한 행동을 해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되고, 악한 행위가 된다.

 

선악은 결국 사람이 선택한다. 하나님이 주신 의지로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 악이 되고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님을 보고 그 모습이 내 인생의 목적이라고 순종하면 의롭게 된다.

 

그런 사람에게 어린 양, 곧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사람이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자 하나님의 뜻을 보이신다. 사람이 보고서 돌이킬 수 있는 표상으로 예수님을 보이신 것이다. 사람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예수님이 보이셨다. 그 모습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믿는 사람은 선한 사람, 곧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나는 사람은 아직 개통되지 않은 휴대전화처럼 선악의 어떤 존재로 가늠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을 정도로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살아 있는 생명이 되지만, 자기 인생이 자기 것인 양 자기 의지로 선악을 판단하며 살면 하나님 앞에 영원한 악인으로 남는다.

 

그리고 성경은 이 법에 관해 사람이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사람이 선택하고 순종해야 할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표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이다. 이는 작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으면 무단횡단하는 사람 모두가 죄인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요 15:2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선하게 태어났는지, 아니면 악한 존재로 태어났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게 어느 것이라도 나를 구원하거나 나의 범죄를 핑계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 필요한 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낮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게 본성이 되는 하나님의 생기로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게 순종이고,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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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자유의지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3. 26. 11:23 Writer : 김홍덕

이번에는 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주제는 바로 <자유의지>. 자유의지라는 말이 성경에 선명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구글에서 검색해도 명확한 성경 구절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측면이나 아담이 자기 선택으로 선악과를 먹은 걸 보면 사람에겐 분명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할 의지가 주어진 게 분명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믿음을 투영하면 그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주신 게 된다.

 

자유의지는 사실 앞서 선악과를 이야기할 때 거의 설명했다. 절대로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지만,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에 근접도 못 하게 하거나, 먹지 못하도록 하는 어떤 보안 조치도 하지 않으셨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뱀이 꼬셨다고는 하나 결국은 자기들의 의지로 선악과를 먹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의 의지로 선악과를 먹었다.

 

그 의지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의문이 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에 대한 강력한 경호를 하지 않았는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아담과 하와 즉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흉악한 범죄마저 범할 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는지가 더 큰 의문이다. 능력이 없는 분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이런 의문은 하나님의 방조 혹은 무능을 의심하게도 한다.

 

여기서부터는 선악과와 내용이 겹친다. 그리고 역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핵심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 표현하기를 원하심이다. 그것도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성품 표현하기를 바라신다. 아바타나 아무 생각도 없이 프로그램된 로봇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고 표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옳다는 걸 인정하고 믿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원하신다.

 

이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도 순종을 원하신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은 분명 사람이 순종할 수밖에 없도록 사람을 강제할 능력이 있는 분인데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건 그게 하나님의 법과 계획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기를 잡으러 온 병사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에게 하늘의 군사를 불러 충분히 물리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이 뜻이 충분히 녹아있다.

 

어떻게 명명하든 사람은 분명히 자유로운 의사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인권이나 무한한 자유 권한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로운 의사 결정 권한을 주신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는 회사가 경영진과 간부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지만 그 모든 권한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과 같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건 오직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자기 결정으로 순종하길 원하심이다.

 

사람들이 신학적 관점에서 자유의지를 논쟁하고, 선악과를 두고 왜 만들었는지, 아담이 먹을 걸 몰랐던 건 아닌지 등을 논쟁하는 이유는 자기 인생의 목적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내뱉는 어리석은 소리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음을 알고, 그 목적이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여 하나님의 형상, 곧 성품 표현이라는 목적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면 모든 건 선명해진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롭게 결정할 의지를 주신 이유는 우리 육신의 수명이 기회라는 것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고 더 나아가 흔히들 성선설, 성악설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떤 존재로 태어나는지에 관한 의문도 해결한다. 이걸 구원의 시점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 이야기를 다음에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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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객관적 사실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5. 3. 22. 18:25 Writer : 김홍덕

(feat. 재림이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이 성경을 믿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성경의 무엇을 믿을까?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걸 믿는다. 그런데 이 영적 변화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는 데는 하나님의 실존과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지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람으로선 하나님을 신으로 검증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큰 기준으로 삼는다. 기적과 신비한 일은 신의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게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실존과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기준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와 기드온과 같은 사람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에도 늘 표적을 구했다고 했다. 사람이 자기 운명에 대한 애착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기도 하고, 믿음이란 게 쉽게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의 의심과 믿음에 관한 생각은 성경에 있는 내용들, 그것도 기적과 신비한 일들이 실재 사건이었는지를 검증하게 한다. 그래서 심지어 '창조과학회'라는 모임도 있다. (1981년 설립) 그뿐 아니라 인공위성으로 노아의 방주로 보이는 사진이라면 언론에 공개된 적도 있고, 지구의 자전 주기를 역산하면 히스기야가 해를 뒤로 물린 시간과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쟁할 때 해가 멈춘 시간을 합한 시간만큼이 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신비하고 기적적인 사건이나 기록들이 어떻게 하다 과학으로 증명이 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을까? 또 지금은 인공위성과 인터넷으로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실시간 중계가 되고 있고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므로 훗날 예수님이 공중 재림을 하실 때 실시간 중계될 게 틀림이 없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땅에 완전히 착륙하기 전에 자기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까?

 

나는 장담하건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건 줄탁동시 같아서 내 밖에 있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내 안에 연결고리나 가치관 혹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는 거의 망했고, 사회주의가 경제적 후퇴를 가져온다는 게 완전히 증명되었지만, 자기 형편과 가치관과 생각을 사회주의에 투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신봉하는 것과 같다.

 

이를 정리하면, 사람들은 기적이 객관적 사실이었다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근거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온 기적과 신비한 일들의 사실성, 실존적 증거를 찾아서 그걸 이해하면 하나님을 믿을 것 같지만 막상 그런 사실이 하나님을 믿는 동력이 되진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유익이다. 하나님을 믿는 게 나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예수와 성경을 믿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성경은 먼 나라 역사와 신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된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기적이 있었다는 걸 탐구하여 믿는 식의 믿음은 시간상으로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과거에 있었다는 성경 기록의 사실 여부고, 또 하나는 종말론과 같이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이 과연 그렇게 될 것인지에 관한 믿음이다. 사실 후자가 더 믿기 어려운 일이다. 통계적으로도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 높은 확률을 가졌다고 해서 다음에 또 일어나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과거 기록이 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미래를 사실로 단정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역시 재림과 종말론이 그 중심에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객관적 사실을 믿는 믿음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경은 객관적 사실에 관한 믿음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무시할 수준인가? 그건 또 아니다. 본질이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하는 게 중요한데, 본질은 객관적 사실과 말 그리고 표현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기본 원리다. 영이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객관적, 과학적으로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형식 있는 존재가 아니다.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는 정체성이 이를 대변한다. 더욱이, 아니 이런 하나님의 정체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객관적 현상과 실존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표현하시기 위해 물리적 세상과 육신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게 그 증거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말씀과 물 위를 걸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들은 모두 사실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사람으로선 믿기 힘든 수단이나 방법을 얼마든지 동원하실 수 있다. 세상의 주인인데 뭘 못하시겠는가? 다만 우리는 그의 행하심이 나타난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상고해야 한다. 중풍 환자를 고치셨다는 건 분명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는 '내게 그런 능력이 있으니 나를 믿으라'는 게 아니다. 중풍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생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야 하는 육신을 주관하지 못하는 상태를 바로 잡으신다는 걸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성품을 표현하시는 근원적인 방법은 현실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좀 더 설명을 이어간다면, 객관적 사실의 대표인 육신과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 표현된 형식이다. 당연하게도 내용과 형식 중 본질은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형식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형식이 없다면 내용을 인지할 수 없고, 인지하지 못한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형식이 없다면 내용이 무의미해진다. 본질이 무엇이냐는 논한다면 당연히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형식을 배척한 내용은 또 아무 의미가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용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셨다면, 사람이란 육신을 가진 존재는 필요 없다. 이런 하나님의 분명한 성품을 안다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내용과 형식의 관점으로 보면 표현된 형식으로 본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척하거나 버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게 없으면 본질도 사라진다.

 

사람들에게 때로 불필요해 보이는 것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말씀은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의 기적 내용과 의미만 새기고 형식은 버린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영으로 내게 다시 오셨다는 본질만 챙기고 실질적 재림은 없다는 식의 생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4)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모든 일들을 객관적 사실로 믿을 것인지에 대해 "당연히 사실로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된 일들이 객관적인 사실과 실재한 일이었다는 걸 믿는 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은 아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건 그 사실들 속에 있는, 아니 그렇게 표현하신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인 기적을 부인하고서 그 속에 있는 내용을 믿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며 창조한 사람의 실체를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믿을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에 관해서도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이 그 대표적인 일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사실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본 사람들 중에 이미 재림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이 있다. 이걸 부인하는 건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말씀하셨다는 건 분명히 다시 오심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 뜻에 관해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생각을 정의할 수는 있지만, 사람이 어떻게 하더라도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따라서 어떤 순간에도 재림은 없다는 식의 논리는 있을 수 없다. 그 재림이 어떤 의미인지를 새기고 믿는 게 본질이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분명한 실체적 사건은 있다.

 

본질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오늘 내 심령에 오심이 재림의 본질이고 내용인 건 분명하다. 따라서 재림이라는 약속은 확실히 실존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는 예수님이 정말로 구름타고 다시 오실 것이다. 공중 재림은 그 이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우리 심령에 오시는 일이 본질이다. 그렇다면 그 본질에 적합한 형식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본질이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존재를 실존적으로 창조하심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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