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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선악과 -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3. 1. 10:06 Writer : 김홍덕

선악과(정확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데 익숙한 대로 '선악과'라고 하자)는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논제임에도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은 쟁점일 것이다. 무엇보다 선악과가 주는 가장 큰 의문은 이게 나의 원죄라는 것이다. 원죄, 그러니까 내가 존재하면서부터 죄라는 것인데, 이에 관해 내가 교회에서 들었던 답들의 주류는 '불순종'이 원죄라는 것이었다. 기억에 남는 설명 중 하나는 "죄는 Sinsins가 있다. Sin에서 sins가 비롯된다"라는 설명이었는데, 그 역시 결국은 <Sin = 불순종>에 수렴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가장 일반적인 선악과에 대한 접근은 불순종이다. 하지만 불순종은 명쾌한 답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지금의 삶에도 불순종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선악과로 대변되는 원죄가 불순종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면 구원받은 사람들은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부모는 그렇다 치고, 최소한 성경에는 순종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악과는 그렇게 접근해선 답이 없는 문제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선악과에 관한 보다 깊은 설명을 위해 먼저 먹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먹는다는 건 내 소유, 내 것, 나의 본성이나 유전자가 된다는 뜻이다. 이걸 잘 기억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자. 그렇다면 이제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선과 악이 나의 것, 내 본성이 되었다는 의미라는 걸 알 것이다.

 

그리고서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분해해 보자. 먹었다는 건 내게 되었다는 의미임을 고려하면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선과 악을 내가 먹어서 혹은 내 것이 되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악해져서 벌을 받는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선을 먹은 건 왜 같이 벌을 받는 건가? 불순종이라서? 불순종은 앞에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설명했으니, 답이 되지 않는다. 그럼, ?

 

불순종이 원죄라면 온전한 회개는 없는 것

 

사실 내가 궁금했던 건 따로 있었다. '하나님은 왜 굳이 선악과를 만들었을까?'라는 것이었는데, 이 의문은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은 사람(아담)이 먹을 거라는 걸 몰랐을까?', '왜 에덴동산 중앙에 버젓이 두면서 지키지 않았을까?', '왜 굳이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경고했을까? 지키지도 않으면서, 시험한 건가?'라는 의문들이다. 이게 의문스럽지 않나? 이게 억지인가?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겠다고 하면서 죄의 근원인 선악과와 관련해서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많은데 괜찮을 수 있을까? 이걸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는데 선악과로 인한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제 문제를 풀어가 보자. 비단 선악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모든 의문을 대하는 자세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성경을 어렵게 또 이상하게 여기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한데, 그 이유가 하나님이 수수께끼 내듯이 성경을 주셔서 그런가? 아니면 누가 성경을 잘 이해하는지 구분하기 위한 변별력 둔 건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만인을 위한 복음이다. 배우지 않아도, 신학이라는 사람이 만든 학문을 몰라도 알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주신 게 성경이다. 예수님은 또 뭐라 하셨는가? 이제 친구가 되었으니,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빛을 비추셨고, 예수님은 빛이다. 그 아래 어두움이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선악과에 관한 여러 의문은 선악과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성경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 있는 것이다. 성경 자체가 의문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일부러 어렵고 의문스럽게 기록했다고 말하면, 만민을 위한 복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기에 모든 것을 말씀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 전체를 탄핵하는 것이 된다. 성경이 의문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는 건 하나님께서 어렵게 말하거나 숨겨서가 아니라, 사람이 성경의 의도와 다른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선과 악에 관한 기준을 가지느냐의 문제


 

선악과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이제 선악과는 불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선과 악에 관한 기준을 가지느냐의 문제라는 걸 이해했기를 바란다. 앞서 언급했듯이 먹는다는 건 나와 하나가 된다는 뜻임을 생각하면,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내가 선과 악을 모두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과 악을 함께 가지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있다. 바로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졌다는 게 된다. 기준이 없다면 선과 악은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면 안 되는가? 그건 아니다. 다만 누가 정한 기준을 가지는지가 문제다. 하나님이 정한 기준을 가졌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로서 문제가 없겠지만,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선과 악을 판단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용납하시지 않는다. 이건 꼭 하나님만이 그러시는 게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물건이 설계대로 작동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작동하면 그걸 용납하겠는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내가 정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선악과에 관한 말씀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어 보인다. 로마서나 고린도후서에서 아담, 하와로부터 죄가 들어왔다는 원죄적 개념을 바울 사도가 설명하기도 했지만, 선악과라는 단어는 창세기에 나오는 게 거의 전부다. 그런데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말씀하신 게 있는데 바로 예수님을 찾아서 온 부자 청년과의 대화다. (10, 18) 그리고 이건 선악과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예수님께 나아 온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여!"라고 불렀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라며 반문하셨다. 이를 두고 "그럼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뜻은 "너는 하나님이 정하지 않은 선과 악에 관한 기준을 가졌구나!".

 

여기서 크게 주목할 게 있는데, 바로 부자 청년의 다음 말이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의 말씀들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말 중의 하나다. 그 이유는,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은 바로 <행위>에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What must I do ~" 이게 바로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이고, 복과 벌의 기준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언제나 "나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행위로 구원을 얻거나 의로워질 수 없다", "나는 중심을 본다", "보이는 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다"라며 행위나 사람의 외모로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걸 끊임없이 그리고 간절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뜻 그리고 말씀과 달리 행위와 외모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사람은 모두 선악과를 먹은 사람

 

그런데 사람은 이 하나를 듣지 않는다. 이렇게 분명한 하나님의 기준을 주목하지 않고 다른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한다. 이런 사람, 사람의 이런 모습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담이 먹은 선악과가 왜 나의 원죄인지를 알 것이다. 오히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죄가 내게 유전된 게 아니라, 내 모습을 아담이 설명하고 대변하고 있다. '붉다'라는 의미의 아담이라는 단어는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곧 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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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창조 전 혼돈하는 땅?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2. 28. 09:28 Writer : 김홍덕

이제 지금부터는 선명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이 대충 믿는 성경, 그래서 회색 성경이라고 부르기로 한 몇몇 주제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우선 처음은 창세기에 있는 이야기들, 어쩌면 성경의 의문 전부일 수도 있는 몇몇 이야기부터 시작하려 한다. 첫 번째로 빛이 있으라고 하시기 전에 있는 <>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 대부분은 개의치 않는 듯한데, 사실 성경은 시작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걸 사실로 믿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믿음 안에서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시작부터 있다. 창세기 12절이 그렇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3절부터 천지창조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는 말씀은 13절이다. 땅은 셋째 날이 되어 생긴다. 하나님께서 모든 물을 모아 바다라고 하시니 뭍이 드러났고 그걸 땅이라고 하셨다는 건 19, 10절이며 셋째 날이다. 그런데 12절에 이 나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라고 분명히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된 일인가?

 

안타까운 것은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이렇게 명확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기독교인들은 아무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문제라는 걸 인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코끼리를 보듯이 대책 없이 그냥 간다. 넓은 길로 가고 있는 다른 신앙인이 많으므로 그 수와 대세에 의지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나중에,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큰 곤란을 겪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안다고 착각한 탓에, 아무렇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큰 곤경에 처하게 할 것이다.

 

천지창조 과정에서 땅이 창조된 날은 셋째 날인데 빛이 있으라고 하시기 전에 먼저 나온다면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밀 없이 말씀하시고,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분이라는 걸 믿는다면, 이런 의문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함이거나, 어떻게 하는지 시험하시는 게 아님은 알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지를 논한다는 건,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의도를 아는지를 따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면 표현도 오해할 수 없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한다는 표현을 두고 세법은 재산 압류에 관한 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세법은 살림을 꾸려가는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하겠다는 게 의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표현을 물리적 세상 창조로만 한정한다는 건 표현에 매몰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표현에 집착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게 세례와 침례다. 이렇게 표현을 엄히 따지면서 창세기 12절의 표현은 의미만 받아넘기려 할까? 천지창조 둘째 날은 또 어쩔 것인가? 물을 만드셨다는 게 아니라 궁창을 기준으로 나누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나눈다는 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처사 아닌가? 세례에 관한 표현처럼 엄격하게 하려면 창세기 한줄 한줄에 대해 엄격히 묵상해야 한다는 뜻이다.

 

천지창조는 과연 물리적 세계의 창조 이야기인가?

 


 

천지창조를 이야기 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세상(세계라고 해도 좋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깊은 철학적 고찰은 큰 도움이 안 된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나에게 세상은 내가 태어나면서 시작됐다. 내가 죽으면 세상은 끝난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이 있었지만,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다.

 

시작이란 내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대학은 늘 있고, 결혼이란 삶은 세상에 늘 있지만 내가 입학해야 내게 대학이란 세계가 열리고, 내가 결혼해야 부부와 가정이란 세상이 시작된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란 공동체로 발전하기는 하지만 구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며, 내게 구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성경이 그저 유대인의 역사나 신화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고 시작되는 천지창조는 단지 물리적 세상의 창조를 이야기하시려는 게 아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인식되는 과정에 관한 말씀이 천지창조의 과정이다. 이런 관점에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게 본질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세례와 침례의 논쟁부터 해결하고 와야 한다. 자기만 세례 혹은 침례라고 하면 된다고 말할 값이라면, 천지창조 역시 나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과정에 관한 말씀임을 믿어야 한다. 이 정도 양심은 가지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물리적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걸 믿어야 하는 변함없다. 다만 성경을 믿는다는 건 과학적으로 믿기 힘든 일이라도 실재했다고 믿는 걸 말하지 않는다. 믿어야 하는 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한 목적이다. 세상은 그 목적을 표현할 운동장이나 도화지로서 먼저 창조하신 것이다. 그 물리적 세상에 내가 태어나면서 세상을 인지했고, 그 세상을 혼돈 속에 살다가 하나님이라는 인생의 빛을 만나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된다는 의도로 주신 성경이 창세기고 천지창조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라는 한 개인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이 올바른 관점으로 보면, 창세기 12절에 나오는 땅은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기 전 혼돈과 의문에 빠진 사람일 수밖에 없다. 즉 불명하고 흐릿한 회색 성경을 믿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바로 혼돈하고 흑암에 쌓인 땅이다.

 

창세기 1장 2절의 땅은, 사람

 

실제 성경 속 땅은 언제나 사람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게 주기도문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곧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씀과 같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변하면 땅의 모든 게 변하듯 하나님의 뜻에 사람이 순종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혼돈하는 땅은 인생의 목적, 삶의 의미를 알려는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일생을 살며 의미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죽도록 고민하고, 삶의 목적을 알려는 끝없는 갈증과 노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혼돈하는 땅이다. 신앙 세계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간절함도 여기 속할 것이다. 결국 답이 없고 막막한 상태, 그게 바로 혼돈하는 땅이다.

 

이 땅에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한 목적,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알게 되는 빛이 비취면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세계 창조다. 이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게 바로 창세기고, 성경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왜 빛이 있으라고 하시기도 전에 먼저 땅이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보고,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

 

어둡고, 의문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듯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천지가 창조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늑대의 시간 같은 회색 신앙에 속한 혼돈하는 땅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다. 빛이 있는데 어떻게 의문이 있겠는가? 성경이 시작할 때 만나야 하는 빛을 만났다면 성경은 의문스러울 수 없다. 따라서 회색처럼 흐릿하게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 의문을 해결하지 않고 다들 그렇게 믿으니 대충 따라가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지 않았다. 솔직해지자. 그건 구원을 얻지 못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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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성경이 회색이던 시절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2. 27. 12:19 Writer : 김홍덕

<개와 늑대의 시간>, <방 안의 코끼리>, <낭패를 당하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말은 언뜻 성경과는 무관한 말들처럼 보인다. 분명 성경을 이야기할 때 자주 사용하는 비유나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세 가지가 오늘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상태?, 마음? 더 나아가서 믿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고 있다. 이야기하고 싶은 건 자기가 믿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믿는지다. 물론 어떤 세계든 모든 사람이 확신을 가지고 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삶을 넘어 사후 세계에 대한 기대까지 포함된 것인데, 그냥 대충 믿어서 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밝고 분명한지, 자기 신앙이 선명하고 의문스러운 거 없이 만족스러운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모태신앙인 나의 경험상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 경험은 그랬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신앙에 깊이 몰입했다. 10대 소년 시절의 열심을 깊이 몰입했다고 하기 어려울지는 몰라도, 그 이후 대학생이 되고 청년이 될 때까지 결론적으로 가장 열심이었던 건 교회 생활이었다. 하지만 많은 의문들이 있었고, 그 의문들은 청년이 되어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우선 신앙에 대해 언제까지, 어디까지 해야 "됐다!"’ 싶은 생각이 들까?’라는 의문이었다. 3 때부터 주일, 수요일 저녁 예배가 끝난 다음 한참 형인 대학부 형님들이 모여 기도하는 모임에 들어가 길게는 거의 2시간씩 기도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버스가 사고가 나서 지금 죽는다면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답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우선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게 언제까지’, ‘어디까지라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런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부는 정말로 성경 공부를 많이 했다. 2학년이 되면서부터 조의 리더가 되었다. 토요일에 있었던 대학부 모임의 성경 공부 모임 30분을 위해 내가 준비한 시간은 최소 2시간이었다. 그때까지 간간이 하는 성경 퀴즈 대회에서 1등을 놓쳐본 기억이 거의 없다. 어느 대회에선 사회자가 나에게 지금 남은 문제를 2등이 다 맞춰도 역전이 되지 않는다라며 더는 답을 맞추지 말라고까지 했었다. 그런데 나는 성경에 의문이 있었다. 이건 참 웃기는 일이었다.

 

나의 의문은 대학 졸업 후 군 생활에서 결국 임계점을 넘어섰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새벽 점호 전 잠깐 일어나 기도하면 그날은 평안한 듯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꼭 고참들의 집합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그럼 기도 열심히 하자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나의 상태가 자유롭지 않고 기도해야만 뭔가가 담보되는 구속으로 느껴졌다.

 

내가 아는 성경 지식은 나를 괴롭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는데, 예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자유롭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와서 나는 그때 피곤한 일 당하지 않으려면 기도 열심히 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나는 지금도 회색 성경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예수를 잘못 믿고 있거나, 예수가 사기꾼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로 생각했다. 물론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시간이 흘러 한 사람을 만났다. 목사였다. 그의 말씀은 그때까지 내가 듣던 것과 사뭇 달랐다. 그래서 나는 마음 깊이 잠겨 있던 질문을 던졌다.

 

“기독교 신앙은 Do에 관한 것입니까? Be에 관한 것입니까?”

 

나는 목사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려울 거로 생각했지만,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Be에 관한 것이지라고 답했다. 어느 지경까지 해야(Do) ‘됐다라는 생각이 들지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그건 나에게 아주 신선한 접근이었다. 그날 이후 19년 이상 나는 그와 함께 있었다. 그 시간은 나에게 성경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주었다. 그를 만날 때 29살이었는데 그때까지 의문은 거의 해결되었었다. 그건 분명 성경의 본질적 복음이었다.

 

하지만 또 깊은 고민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 고민은 이전과 달랐다. ‘복음과 율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복음이 율법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나는 그 목사님과 이별했다. 귀한 복음이기에 귀하게 여겨야 하지만 문제는 그 복음이 아주 낮아지는 거라는 것이다. 귀하고 귀한 것을 얻고 보니 낮아지는 것이었는데, 그때까지 그 목사님과 함께 우리집에서 시작해서 일군 교회가 그렇지 않은 길로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이후 나는 블로그에 복음을 설명하는 일을 시작했다. 때로는 사람들이 찾아 와 만나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어진 분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만남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좀 적극적 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변곡점일 수 있는 지점에서 내가 고민했던 것, 그리고 순례의 여정을 거쳐 벗어난 회색 성경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 글은 자기 신앙이 만족스러운 사람이나 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 외 다른 접근으로 인한 재앙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글이다. 그러나 적어도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었는데 왜 회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쩌면 진정한 구원의 세계를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려면 아브라함처럼 지금껏 믿어 온 아비 집을 떠나는 믿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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