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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0 – 듣지 못한 사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2. 22. 14:53 Writer : 김홍덕

(28:11-31)

우여곡절 끝에 바울 사도 일행은 로마에 당도했다. 로마에서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지내는 게 허용되었다. 말 그대로 불구속 재판을 받게 된 셈이다. 바울 사도에게 이런 좋은 기회는 복음을 전하는 좋은 환경이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 중 높은 사람을 불러 자기가 로마까지 온 과정을 설명했다. 바울 사도가 황제에게 자기 민족 유대인을 송사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지 이에 대해 부인하기도 한다.

 

이렇게 모인 유대인들에게 바울 사도는 자기 안에 있는 복음을 전했다. 의외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 복음에 대해 생소해했다. 유대인들은 나름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모든 곳에서 반대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바울 사도의 사상을 한번 들어보겠다고 한 것이다. 그렇게 바울 사도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강론할 기회를 얻어 복음을 전했다.

 

십자가를 진 죄인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복음은 세상 가치를 좇던 사람에게는 언제나 듣지 못한 사상

 

바울 사도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바울 사도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소환해 일깨웠다. 이후에도 바울 사도는 로마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제 사도행전을 마쳐가며 바울 사도를 만난 유대인들의 태도에서 사람이 복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복음은 정말 생소한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알려면 성령이 오셔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이자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듣지 못한 사상으로 들리는 이유는 성공과 영광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와 학문과 철학과 사람의 생각 속 영광과 성공은 낮은 곳에 있지 않다. 낮은 마음과 겸손을 말하긴 해도 성공을 위한 수단적 가치는 부여해도 그 자체가 가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니 듣지 못한 사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과 세상은 낮은 자리 자체가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아

 

사도행전을 이야기하는 내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이고, 그 믿음을 가지게 하는 이가 성령이라는 걸 뼈대로 전했다. 사도행전은 그걸 전하는 성경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한 바울 사도 역시 이것을 전했기에 높아지는 가치를 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은 듣지 못한 사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상적 지형은 지금도 같은 형국이지만 사람들의 태도는 좀 다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낮아지는 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생소해야 당연하다.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을 기도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생소하고 듣지 못한 사상이어야 정상이지만 그렇지 않다. 기독교나 각종 종교 안에서 도덕적 교훈으로서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관계로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낮아짐이 목적이거나 본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야 높아지고 복을 받는다는 목적을 받들고 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점은 낮아지기를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복음은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낮아지는 게 본성인 사람이 된다는 게 다르다. 노력과 본성이라는 절대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본성으로 사는 사람은 성공과 평안을 얻겠다는 목적으로 낮아지지 않는다. 본성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하고 그게 당연한 것으로 안다.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게 복음과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의 결정적인 차이다.

 

기독교라는 종교와 복음의 차이는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과 본성으로 사는 차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른다. 신학을 한 사람이나 목사들은 더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이 오시면, 즉 거듭나면 본성이 다 알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다. 몰라서, 더 알기 위해 공부한다는 건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는 증거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예수를 믿어 가난을 해결하려 한다. 겉으로는 부자가 되는 게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세상의 축복은 따라온다는 위선을 시전한다. 자기 어두움을 감추려고 하는 변명이 회칠한 무덤이라는 예수님의 책망을 뒤집어쓰는 꼴이다.

 

이런 무식과 어두움을 해결하기 위한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성경을 보는 공부는 오히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볼 때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만 증명한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어두움과 특히 죄 사함을 받았다면서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등의 모순에 빠져 있다. 정작 이런 어두움과 모순과 위선이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신 목적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복음을 주신 목적이 간절한 위치에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은 진정한 복음을 생경하게 만든다. 어쩌면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복음이 생소하다는 걸 고백하는 게 죄를 고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태껏 세상에서 성공하고 죽은 다음에는 천국에서 황금 면류관을 쓰기 위해 성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래서 겸손과 성찰이라며 자기를 고소하여 늘 회개하면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살았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생소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고백이 없었기에 바울 사도를 만난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처럼 자기 믿음에 반한다고 배척한다.

 

안다고 생각하는 복음이 생소하게 느껴질 때 진정한 구원이 시작된다.

 

하지만 신앙인들에게 그런 담대함은 없다. 행함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성경을 믿으면서 한편으로는 행동으로 지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형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달라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신앙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방 안의 코끼리처럼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다 누가 이런 모순을 파고들면 당황하고 이상하게 여긴다. 순간적으로 자기가 처한 모순을 오히려 변호하고 방어하는 태도를 보인다. 듣지 못한 사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듣지 못한 사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게 하고, 듣지 못한 사상과의 괴리를 메운다. 예수님께서 믿음과 두려움을 자주 엮어서 말씀하신 이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려움이 건강에 대한 염려 같은 육신의 삶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높아지려는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길에 대한 불안과 낯섦에 대한 두려움이다.

 

생소한 두려움을 이기는 데 필요한 건 바로 <믿음>

 

예수님께서는 이런 두려움을 가지지 말라고 하시고,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낮고 낮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아들로 드러나셔서 낮아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이셨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두려운 낮아지는 일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시니 세상을 이긴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세상 가치관으로 보면 듣지 못한 사상이다. 생소하게 느껴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을 간구하는 사람들에겐 생소하지 않다. 생소해야 하는데, 이상하고 믿기 어려워야 하는데 그냥 아무렇지 않은 듯 신앙 생활하는 건 옳은 게 아니다. 어떻게 낮아지는 게 하나님의 영광인지, 십자가를 진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낮고 천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간구하는 자신이 생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사람의 생각에는 낮아지는 게 복음일 리 없다. 그게 믿어진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을 것이다.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에서 와서 죄인과 창녀와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건 정말 생소하고 듣지 못한 일이다. 이런 일을 믿는 건 진짜로 믿음이 필요하다.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낮아지는 본성으로 사는 게 인생의 목적이라는 걸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믿음이 없으면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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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10) 독사에 물린 바울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는 사도 바울 일행이 탄 배가 난파하여 모든 승객이 멜리데라는 섬에 오르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신기한 일이 생긴다. 바울 사도가 나무에 불을 피우는 도중 나무 묶음 안에 있던 독사가 나와 사도 바울을 무는 일이 생긴다. 이를 본 원주민들은 바울 사도가 죽을 것이라 말했지만, 바울 사도가 죽지 않자 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일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말씀을 소환한다.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 16:18)

 

이건 신기한 기적이다. 그러나 성경 속 기적은 기적 자체만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안 된다. 성경 속에 나오는 모든 기적과 말씀과 일은 모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 곧 사람이 다시 태어나야 하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을 위한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뜻하신 목적 그대로의 사람이 되는 일을 설명하고 전하는 게 성경인 만큼 모든 내용이 이를 위한 것이라는 걸 성경을 읽을 때 염두 해야 한다.

 

바울 사도가 뱀에게 물린 일은 바울 사도가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는 중에 생긴 일이다. 이 여정에 배가 난파하는 위기에서 살아서 겪는 일인데, 이런 과정은 모두 바울 사도가 로마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목적과 뜻에 따라서 진행되고 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정한 목적이 다할 때까지 사람의 안녕이 보전된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니까 육신의 수명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룰 기회의 시간인 셈이다.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이 되기 위한 기회의 시간

 

사람들은 아마 바울 사도가 로마에 복음을 전해야 하니 하나님께서 그때까지 목숨을 보전하셨다는 접근은 어렵지 않게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수명을 두고 동일한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면 인생이 마감된다는 건 믿고 말하면서 아직 살고 있는, 아니 살 수 있는 이유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이 시간이 주어진 이유와 목적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이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보이시려는 내용은 십자가다. 하나님께 낮은 자리에서 상대를 섬기는 마음이 있다는 걸 보이고자 하신다. 이런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사람은 연약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겸손과 순종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목숨을 보전하시고, 또 세상을 망하지 않게 경영하신다. 사람에게 삶을 사는 시간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대로 스스로 순종하는 기회를 주심이고, 세상이 망하지 않은 건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임과 동시에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들어온 터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본질적인 하나님의 목적이 바울이라는 한 사도의 마지막 여정에 깊고 직접적으로 관여하셨음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이제 와서 보면 인류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의 시작으로서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을 로마로 보내신 하나님께서 풍랑에서도 독사에게서도 바울 사도를 보호하는 게 당연한 이치인 셈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정한 목적이 바울 사도를 안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이 관점에서 자기 삶과 삶의 수명과 하나님의 경영을 조명해야 한다. 나에게 아직 삶이 있다는 건 하나님께서 정한 뜻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이며, 수명은 그 기회의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사람인 나에게 이루어지는 일을 위해서라면 태양도 멈추게 하신다는 걸 믿어야 한다. 그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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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7 44)

로마를 향하는 바울 사도 일행이 탄 배는 결국 난파하게 된다. 백부장이 선택한 선원들의 경험과 지식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다. 게다가 백부장이 선택한 경험과 지식의 선원들은 자기들만 살고자 탈주를 시도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두를 무사히 구하신다는 위로의 약속과 함께 축사하고 함께 음식을 먹은 군사들은 배가 부서지려 하자 바울 사도를 포함한 죄수들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모두를 안전하게 육지로 인도하신다.

 

세상의 지식과 경험은 자기 이익을 위한 것

 

선원들과 군사들의 최우선 가치는 자신들의 안녕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과 태도를 대변한다. 평소에는 이타적이었다가 위기가 되면 이기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사람의 이타적 행위도 선한 행위가 가져올 축복을 염두에 둔 것이기에 결국 뿌리는 이기적 소망이다. 또 이타적 행위의 동력은 사람의 신념이다. '그래야 한다', '그러는 게 맞다'라는 생각이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적어도 본능이 그런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무 일이라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능>은 다르다. 이 본능은 그 자체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본능이다. 십자가를 지는 게 무엇인지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리스도라는 본능의 이타적 성격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구원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심판하자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게 그리스도라는 본능이다. 그리스도는 천국에 가서 복을 받겠다는 신념으로 노력하는 이타심이 아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본능이 자신과 사람을 구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를 지는 건 사망이고, 세상에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건 곧 패배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조롱처럼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다. 바로 그리스도라는 본능으로 거듭난 사람이 나오는 게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는 유일한 목표라는 사실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18:19)

 

높고 위대한 걸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세상을 지키고 또 나아지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기특한 생각에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다. 그건 세상을 사람이 만든 게 아니며, 자기 선택으로 이 세상에 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것도 아니고,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오히려 자기는 그 세상에 속한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작 이 세상을 지키는 건 낮아지는 게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경험이나 이기적 시도가 바울 사도 일행이 탄 배에 있는 사람들을 구한 게 아니다. 이들을 구한 건 사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세상을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세상에 있는 한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을 얻는 것이다. 즉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의인 열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시려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열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뜻의 수명이 아직 남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부른 계획이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육신의 삶이 남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자기 운명을 예견하거나 예지했다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주는 확신이다. 하나님의 뜻인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인은 어지간하면 이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 육신이 된 말씀이 내재한 그리스도인과 함께 위험에 처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은혜를 받는다. 사도 바울과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이 여기 속한다. 또 크게 보면 오늘 사람들이 세상을 안녕히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세상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고, 또 그들로 인해 멸망하지 않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 또한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기를 하나님의 계획 덕에 기회를 받은 것이다.

 

이건 신앙적 자부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있어 망하지 않은 세상에서 얻은 귀한 기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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