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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목사와 신학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6. 16. 17:46 Writer : 김홍덕

오늘날 교회는 목사와 신학이 인체의 척추와 같이 자리하고 있다. 모든 신앙은 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검증하며, 교회에서 목사는 음식에서 소금같이 없어서는 안 되는 신분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목사와 신학이 오늘날 누리고 있는 지위의 근거를 찾아볼 수는 없다. 성경을 지향하는 듯한데, 정작 성경에서는 그 지위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게 그냥 성경에 나오는 것 이상의 지위를 누린다는 문제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문제는 이 둘의 지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과 신앙을 그들의 프레임(혹은 기득권) 안에 가둔다. 그나마 그게 방향이나 옳으면 다행인데, 그것도 솔직히 장담하기 힘들다. 방향이 올바르다면 목사와 신학, 특히 목사에 대한 존경은 더 올은 가치로 인정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목사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목사들은 자칭 자신들이 사도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목사'라는 단어(?), 신분이 딱 한 번 나온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4:11)" 많은 언급이 중요성을 의미한다는 일반적 관점으로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우리가 더 살펴봐야 하는 건 목사라는 신분을 얻는 과정이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과는 극명하게 다른데, 성경 속 사도는 성도들이 사도로 인정한 상향식 임명이라면, 목사는 신학을 공부하고, 그 공부한 정도를 가려 우수한(높은) 사람에게 상을 주는 시스템을 거쳐 나온 사람에게 이전에 그렇게 임명된 사람들에 의해 안수를 받는 하향식이다.

 

여기까지 제기된 성경에서의 언급 횟수나 임명 방식의 방향성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쉽게 용납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데, 목사는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더 좋은 지위를 얻는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서 나시기까지 낮아지는 복음의 본성에 비추어 볼 때, 경쟁에서 이긴 사람(더 높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더 좋은 자리(큰 교회)를 주는 오늘날의 신분 정체성은 복음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복음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신분을 얻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신학은 더 어이없는 부분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가르치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게 기억나게 될 것이라 하셨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될 거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아는 일에는 신학 교수가 아니라 성령이 필요하다.

 

우리의 구원과 거듭남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성령이 오시지 않는 구원은 없다. 구원받았다면 그건 성령이 오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다 알게 된다는 게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는 이치로도 당연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거듭난 생명이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성령이 오신 것이고,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학문으로 만들어 공부하는 게 정상인가?

 

물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도 그 거듭난 생명의 생명력을 알아가는 과정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건 몰라서 공부하는 세계가 아니라, 경험을 공유하는 세계다. 그리스도가 되는 법을 학문으로 공부하는 세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을 간증하고,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그 간증을 보증하며 알아가는 것이다. 이게 성경 공부고 나눔이며, 교회의 기능이다.

 

이 상황을 상식적, 논리적으로 조명한다면, 완성이 없다는 공부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목사라는 신분을 얻어 성령이 오시면 모두 알게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상황은 온전해 보일 수 없다. 몰라서 공부하고, 공부하고 있기에 아직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다 알게 된다고 한 세계가 어떻다고 설교하는 상황인 셈이다. 예수님 말씀이 블러핑이거나 아니면 목사들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았거나 둘 중의 하나인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수많은 사람이 이런 모순적일 수 있는 체계와 교리에 자기 영혼을 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평생을 그렇게 믿었는데, 하나님께서 "그게 아닌데?"라고 말씀하시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린 오늘도 이런 위험을 안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 최소한 상황이 이렇다는 인식 정도는 있어야 한다. 자기 영혼을 방관할 게 아니라면.

 

그래서 목사와 신학은 나쁜 것인가?

그건 또 그렇지 않다. 누구나 전하는 복음을 사회적인 어떤 제도에 의해 얻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 전한다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목사라는 신분은 우선 성경에 관해 사람들이 쉽게 귀를 열어 주는 특권이 있다. 이를 계기로 온전한 복음을 전한다면 목사 아니라 그 신분이 중이여도 상관없다. 이건 흑묘백묘론은 아니지만, 복음은 신분에 상관없이 전해질 수 있고, 또 전해야 한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신학은 나쁜 것, 불필요한 것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인 사실이나 당시의 관습과 문화 등은 성경에 나오는 사건과 말씀의 배경이 된다. 성경을 객관적 사실로 믿는 걸 믿음이라 여기는 오류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분명 그런 신학적 결과물은 도움이 된다. 아울러 고고학과 같은 일반 학문 역시 그렇다.

 

결국은 내용이 문제다.

목사라서 혹은 목사라는 신분이 문제라는 식의 전개는 좋지 않다. 목사가 되어 무엇을 전하느냐가 핵심이다. 그렇기에 신학이라는 범주에서 경쟁해서 이긴 사람이 낮아지고 섬기는 복음을 전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주목하자는 이야기다. 목사라는 신분을 얻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든, 낮아지고 섬기고 겸손하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면야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이 예를 사도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다. 본 받을 대상과 사례가 있다는 말이다. 바울 사도는 당시 최고의 학문을 수학한 사람이다. 당시의 학문은 성경과 분리할 수 없었기에 비유하자면 지금의 신학에 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신학은 사실 비교 대상도 안 되지만) 그런 자신의 이력을 바울 사도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겸손의 교훈을 주기 위해 언급했다. 또 당시 최고의 신분인 로마 시민권도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딱, 한번 사용했다. 그것도 로마에 복음을 전할 방법으로만 사용했다.

 

어떤 신분, 어떤 지식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다. 그건 그가 어떤 존재인지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교회는 기복적이다'라는 말로 교회를 일반화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와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모든 교회라고 단서를 붙여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교회는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라 설교하고 있다. 이는 다분히 목사가 신학이라는 세계에서 경쟁해서 이겨서 강단에 선 정체성 때문이다.

 

또 많은 신앙적 의문과 모순 속에 성도들이 갇혀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될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으로 만들어 공부한 사람들의 말에 귀를 내어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부는 모르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아는 사람은 가르친다. 성령이 오셔서 가르쳐 주신다고 했는데, 학교와 학위까지 만들어 공부하는 건 최소한 칭찬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모든 논점에도 목사와 신학은 건재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변명했듯이 일방적으로 부정할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복음은 목사만 전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설교권 같은 건 없다. 복음을 전하는 건 생명의 본성이다. 생식과 같은 것이다. 누구라도 거듭난 생명이라면 그 생명을 퍼트리고 전하는 건 본성이다. 의무도 아니고 상 받을 일은 더더욱 아니며 특정한 사람만의 특권은 아예 될 수 없다.

 

그리고 성경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만민을 위한 복음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얻는 구원과 거듭남, 무엇보다 거듭남은 성령의 직임이요 능력이며 역사다. 그리고 구원을 얻는 건 옵션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안으로 들어가는 구원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그렇게 성령이 오셨다면, 또 성령으로 인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 속에 있다. 학문으로 공부할 일은 아니다.

 

목사라는 신분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노력한 성과다. 그런 점에서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고, 또 복음을 전하기에 아주 유리한 조건이므로 이를 잘 활용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신분 정체성이 어떻든 복음은 복음 그대로 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낮아지고 겸손하며 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시려 한 이상 이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한다. 그렇게 사용된다면 목사라는 신분도, 신학도 버릴 건 아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아는 목사와 신학이 과연 그런지는 다른 문제다. 강단에 서서 성경대로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설교하고 반대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자고 말하는 게 과연 예수님과 같은 말씀인가는 누구라도 따져야 한다. 이런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건 그들 자신이 경쟁에서 이겨서 오른 자리에서 설교하기 때문이란 걸 숨길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아울러 우리에겐 신학이 아니라 성령의 강림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이자 거듭난 생명을 얻는 것은 성령이 오시면 되는 일이다. 몰라서 학문을 만들어 공부할 일이 아니다. 신학은 이를 돕기 위한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 안에서 성경을 보려고 한다면 뭔가 오해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걸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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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바꿀 용기, 그것이 믿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5. 6. 15. 08:23 Writer : 김홍덕

찬송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조려서 못 가네" (찬송가 3023)

 

여러 글을 통해 우리는 확실하지 않은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언급했다. 그리고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거나, 하나의 교양 생활 정도 심지어 정치적인 목적 등을 이유로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신앙에 모순적인 부분과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있음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교회의 신앙 수준은 설교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설교는 우선 내용이 중요하고, 지속성은 교회가 그걸 어느 정도 수용하지는 지를 대변한다. 그리고 그런 설교의 일반적 수준에서 가장 좋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내 생각과 뜻에 우선해야 한다고 전하는 것이다. 덧붙인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나와 다를 때,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했으나 그게 늘 성공하지 못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실패에 대응하는 방법, 아니 자세다. 여기서 신앙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물론 이런 도전을 하지 않는 사람은 무늬만 교인일 뿐, 그에게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 지니 이상이 아니므로 논외로 한다.

 

온전한 신앙, 정말로 하나님을 잘 믿어보고자 애썼던 사람은 결국 여기서 한계를 느낀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는 자기 모습에 좌절하고, 그게 반복될 뿐 해결책을 모른 체 반복만 해야 한다는 것에 절망한다. 예수를 제대로 한번 믿어보겠다고 도전했던 사람이라면 이 감정을 알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겐 임계점이 있다. 언제까지 같은 반복, 경험으로 이제는 실패한다는 걸 뻔히 아는 데 반복에 지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26:14)"라고. 이 말씀으로 반복되는 자신을 변호하려 한다. 그러나 이 말씀조차 앞서 언급한 신앙의 반복, 솔직히 말하면 실패의 반복이 사람의 상태라는 말씀이지, 그게 당연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졸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한계, 실패하는 한계는 홍해고 요단강이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큰 물을 건넌 사람"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그런 실패 속에서 인내하고, 언젠간 이길 것이란 기약 없는 기대를 소망이라 착각하며, 그런 서로를 위로하는 걸 사랑이라 위안하면서 웃는 얼굴로 교회에 다니는 게 아니라 이런 실패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큰 물을 건널 때 비로소 히브리인, 곧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

 

문제는 "어떻게?". <어떻게>가 내 영혼의 영원한 시간을 결정한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신앙적 명제이자 사실이다. 여기서부터 신앙은 갈라진다. 비록 교회의 설교가 기복이라는 복선 없이 정말 순수하게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고 해도 이 <어떻게>가 없다면 요단강에 멈춘 신앙이거나, 가나안을 앞에서 두려움으로 멈춘 신앙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하지만 늘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좋은(?)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떠돌 듯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갈망하면서 노력만 하며 인생을 다 소진한다. 이게 오늘날 신앙인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이 쳇바퀴를 벗어나려면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 성경대로 사는 삶이라는 약속하신 땅이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으니 땅이다)이 될 수 있다는 걸 믿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지 않은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에 영혼을 의탁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건 "내가 지시할 땅"이라는 모호한 목적지를 행해 떠났다는 것이다. 여정은 분명 육신의 관점, 세상의 가치, 보편적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모호했지만, 단 하나, 하나님이 지시하셨다는 이 하나를 믿고 본토 아비 집을 떠나는 결정을 하는 용기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분명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이다!"라는 확실한 믿음이 필요하다.

 

이 약속과 믿음에는 반복적 실패라는 옵션은 없다. 반복적 실패라는 옵션은 필연적이지만 그건 "이게 바른 방법이 아니구나!"라는 걸 깨닫기 위한 것이자. 실패의 반복을 얼마간 하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게 하나님의 법이 아니다. 일만 개의 율법을 지키다 하나를 범하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는 말씀이 이걸 의미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놀랍게도 답은 간단하다. 거듭나면 된다. 기독교인들은 거듭난다는 말을 그저 상투적으로 사용할 뿐 이 말의 중대성을 가늠하지 않는다. 이건 분명하다. 만약 이 말씀의 중함을 알고 있다면, 그래서 의미를 바로 안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의 실패의 반복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을 사는 생명으로 거듭났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이 생명으로 나서 생명대로 살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게 가능하냐?"라고. 또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다"라고. 그래서, 소망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그럴 값이면 뭣 하러 예수를 믿느냐고 나는 반문한다. 성경대로 사는 것도 안 되고,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과 형제로 거듭났는데 생명의 본성은 다르다면 도대체 왜 예수를 믿고, 왜 남들 쉬는 일요일 아침에 평소보다 더 차려입고 교회에 가서 돈 내고 앉아 있느냐는 것이다. 정말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해도 될 것인가?

 

다른 건 볼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된다고 하시지 않는가? 심지어 우리를 성경대로 살게 하시려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지 않는가? 이 하나님의 뜻을 믿지 않으면서, 그렇게는 될 수 없다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살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이게 바로 떠나야 하는 본토 아비 집이다. 이 불신의 신앙을 떠나지 않으면 모태 신앙 아니라 그 할배라도 구원은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구원을 바란다는 건 도둑놈이다

 

중학생 시절, 중등부 교육 전도사님이 설교를 하다 말고 당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고 제법 비싼 물건이었던 PAKER 45 만년필을 꺼내 들고서 "누구든지 이걸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나오라. 그럼 그냥 주겠다"라고 했다" 그때 난 '설마?'했다. 나뿐 아니라 많은 학생이 그랬다. 그런데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교회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남학생 하나가 정말로 앞으로 나갔고, 정말로 약속대로 만년필은 그 학생 것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비싼 걸 공짜로 준다고?'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구원을 값없이 준다는 말에 감동한다. 그런데 그 구원을 얻은 삶인, 성경대로 사는 삶은 믿지 않고 의심한다. 그건 믿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성경대로 살 수 있다는 것, 성경은 우리에게 의심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믿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믿음을 의심하는 건 생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 생명이라고 믿는다. 또 생명은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은 거스를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을 합하지 못한다. 생명의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생명을 얻어 거듭났다면, 당연히 그 생명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생명의 본성을 의심한다. 이러고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어리석음이다. 그런데 이게 오늘날 교회의 겸손한 신앙이자 교리가 되었다. 이 신앙을 떠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다니던 교회를 떠나라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교회를 떠나라는 게 아니라 신앙을 떠나야 한다. 삶의 울타리를 부수거나, 삶의 구조를 신앙을 위해 갑자기 바꾸는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예수님과는 다르므로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건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임을 인정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반복은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며, 안 된다고 하는데 자꾸 하는 건 도전이란 걸 시인하고 그 신앙에서 떠나야 한다.

 

이런 불신과 도전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한 본토 아비 집이다. 물리적 공간이 교회와 사회적 공동체인 교회를 떠나라는 게 아니라 이 신앙의 유전을 떠나야 한다. 이걸 떠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며, 당연히 구원이란 은혜도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안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하나님을 믿어야 얻는 구원을 얻는다는 건 어이없는 일이지 신앙생활이 아니다.

 

물론 오랫동안 괜찮을 것이라 기대했던 신앙을 떠나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더욱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면 그건 더 기막힌 일이다. 그래서 이 블로그를 통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전해 왔다. 무엇을 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설명하고 전해왔다.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고 있다는 것도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다. 정말로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드리면서까지 전한 복음이 자기 생명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다. 아니 그렇게 살지 않을 수가 없다.

 

복음은 결코 어렵지 않다. 어려운 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건 어려운 것이라는 사람의 인식이 바뀌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인생을 통해 마음 밭이 갈리는 이유도, 필요성도 이것일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쉽다고 말씀하시는 걸 어렵다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 이 하나를 바꾸기 위해 탕자는 그렇게 세월을 허비했는지도 모른다.(눅 15장)

 

이런 모든 설득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신앙을 떠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예수를 더 잘 믿으려고 노력한 사람일수록, 노력한 열정이 클수록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런 열정에도, 또 그런 열정이 오래되었음에도 이루지 못한 건 뭔가 잘못되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걸 알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고,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를 즐기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신으로 믿을 게 아니라면 이제 본토 아비 집을 떠나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는 지는 이 블로그에 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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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교회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6. 11. 12:49 Writer : 김홍덕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교회 중심적이다. 신앙의 시작과 전도를 '교회에 간다'라고 말하는 일반적 표현이 교회가 신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준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바울 사도의 말 역시 교회의 중요성을 한껏 강조한다. 그런데 기독교인 대부분은 교회에 크게 만족하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교회에 대한 만족과 신뢰가 부족하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교회에 만족하지 못하는 교인

신앙인들이 교회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선악과를 먹고 만족의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은 이유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에 대한 기준을 사람이 자기가 정하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다. 자기 맘대로 되지 않기에 만족이 없다. 세상이나 교회나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기준을 가지고 있으니 만족스럽지 않고 불평한다.

 

교회에 불만을 가지는 건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교회를 심판하기 때문

 

그럼,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교회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가진 온전하고 제대로 된 교회인가? 아쉽지만 그건 또 아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설교하고, 성도들은 그걸 신앙하면서 모인 곳이 오늘날 교회인데, 각 사람이 바라는 성공과 평안의 기준도 다르고, 교회는 모든 이의 바람을 충족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온전하지 못한 건, 신앙의 지향점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필요로 알아보는 교회 정체성

우리는 교회의 정체성을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성도들이 모임으로 형성되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도들이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두고, 사도들은 그것들을 <필요>에 따라 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필요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부족한 필요를 뜻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런 것들은 공중 나는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 사항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교회나 성도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부족한 걸 채우는 것으로 생각한다. 교회는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게 하신다고 설교하고, 사람들은 그걸 신앙하면서 모인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성도들 각자가 생각하는 평안과 성공의 기준은 모두 다르므로 늘 불만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 4:28)

 

초대교회 필요는 육신의 필요가 아니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모일 때 온전한 교회다. 교회는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기를 위해 모인 공동체다. 교회의 필요는 오직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필요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겠다는 회칠을 하기 위해 교인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게 교회의 필요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와 초대교회와의 근원적 정체성 차이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보다 세상에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어떤 처신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낮아지고 겸손하고 사랑하는 일도 그게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외친다. 교인들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평안과 성공을 얻기 위해 교회에 다닌다. 교회와 성도가 서로 상생하는 관계처럼 보이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걸 바라시는 게 아니다.

 

 

온전한 교회의 시작은

이렇게 올바르지 않은 상황은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부터 어긋난 결과다. 마치 천로역정에서 담을 넘어 들어온 순례자처럼 시작이 잘못됐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있다고 하셨는데, 예수님 말씀의 의도는 두세 사람이 모이면 나도 가겠다는 게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견해처럼 교회를 세워 사람이 모이면 내가 함께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막 18:20)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내 이름>이다. 그리고 이름은 정체성이다. '사과'라는 이름은 사과라는 과일의 정체성, 유전자, 생명을 말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만남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 아울러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만남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만나는 만남이다. 이런 만남과 모임이 바로 예수님이 함께 하는 공동체다.

 

이런 만남은 앞서 설명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룬다는 초대교회의 정체성과도 일치한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은 오직 사람이 예수님이 보이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고,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낮아지고 겸손하며 섬기고 사랑하는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며,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보여 주신 우리의 정체성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생명 공동체다. 생명이 있는 사람이 모여 교회가 된다. 목사나 건물보다 그게 먼저다. 거듭난 생명이 만나면 그곳이 어디든 거기가 교회다. 빌립 집사를 태운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장이 탄 마차도 교회고, 바울 일행이 탈출한 줄 알고 목숨을 끊으려던 간수와 바울 사도가 만난 감옥도 교회며, 예수님을 만난 세리 삭개오의 집도 교회며, 베드로를 초청한 고넬료의 집도 교회다. 이들 중에 시험을 쳐서 사도가 된 사람이 없고, 세상의 평안을 구하려 사도를 만난 이도 없다. 무엇이 교회인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예는 이렇게나 성경에 많이 있다.

 

온전한 교회는 오직 사람이 하나님 말씀이 생명이 되도록 하는 곳이다.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의 만남과 사람에게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걸 유일한 필요로 삼는 공동체가 교회다. 전자 오르간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성가대 가운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목사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하신 뜻, 그것이 이루어지는 공동체 그곳이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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