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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26)

바울 사도가 아그립바 왕과 총독 앞에서 변론을 마치자, 왕과 총독은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방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 사도의 희망대로 로마로 가서 재판받도록 한다. 그렇게 시작된 바울 사도의 여정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후 어렵게 로마로 가서 황제의 판단을 받기까지 비교적 자유롭게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다.

 

바울 사도 일행은 배를 타고 로마고 출발한다. 가는 중간에 바람이 여의찮아 그레데 지방에 잠시 머물렀다가 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바울 사도는 금식하는 대속죄일 시기인 9, 10월에는 폭풍이 많이 있으니 좀 머루다 가지 않으면 크게 손해가 날 것이라고 했지만 선원들은 당장 남풍이 순하게 부는 것을 보고 출항하자고 했고 책임자인 백부장은 바울 사도의 말보다는 선원들의 말을 듣고 출발한다.

 

이 사건 속 백부장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 사도의 말과 배를 타는 것이 생업인 선원들의 말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선원들의 말을 신뢰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배가 출항하자 얼마 되지 않아 바울 사도의 말대로 큰 폭풍을 만나 배가 위태하게 되고, 결국 배에 있는 기구들을 모두 버리면서 버티지만 결국 배가 난파하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은 믿으면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세상의 지식보다 온전하다는 건 믿지 않아…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이 세상은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실수도 없이 공평하게 경영하고 계신다는 걸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와 뜻이 밝은 사람의 생각이 세상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경험보다 더 온전하다는 걸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아는 건 일의 원리를 아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원리인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사람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백부장은 사도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나님의 의와 뜻보다 세상의 경험을 신뢰했고, 죄인으로 끌려가는 바울이 하나님(백부장 입장에서는 신)의 의와 뜻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 말을 듣지 않는 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로 로마로 가는 바울 사도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는 참담했다.

 

우리의 미시적 일상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굳이 가늠하지 않아도 된다. 짜장면을 먹을 것인지 짬뽕을 먹을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어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라면,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온전한 삶이다. 모든 죄를 사함 받은 하나님 아들의 어떤 결정이 죄가 되거나, 온전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를 아들로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이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단순한 상식적 논리 앞에 늘 '말이 그렇긴 한데?'라고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그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게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결정은 언제나 온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살아가며 세상을 보면 세상의 모든 게 선명해진다. 그 선명한 이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소리, 쥐뿔도 없는 주제에 하는 술안주 같은 소리처럼 들린다. 행여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밝은 사람이란 걸 인정한다고 해도 세상일의 결정을 그에게 맡기는 건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특별할 것 없는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걸 인정하려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어야 한다. 이건 암구호와 같은 이치다. 진정 거듭나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알고 세상사를 경정한다는 게 무엇인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법으로 결정하는지를 모른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모든 일을 십자가의 법에 따라 순종한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씀 속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목적이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의 살아가는 법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자신이 더 옳은 가치를 가지고 있어도, 상대가 자기가 가진 의를 알지 못해도 상대의 의에 육신을 내어준다. 육신을 내어준다는 건 군주국가에서 의를 가진 왕은 말만 하면 되고, 그 의를 따르는 신하와 백성이 육신으로 준행하는 것과 같다.

 

이런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아니 나를 따르라"라는 식의 삶을 살지 않는다. 아니 본능상 그럴 수 없다.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의 본성인데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지식과 기술과 경험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어도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반하여 그대로 행하면 큰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면 자신이 순종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자세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출항하면 큰 위험을 만난다는 걸 알고 말했지만 듣지 않는 백부장과 선원들의 뜻에 '하나님의 뜻이 그렇지 않으니 가면 안 된다'라며 몽니를 부리거나 협박하거나 위협하거나 거절하지 않았다. 죽어서는 안 되지만 죽임당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뜻을 순종하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떤 결정이라고 온전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첫 번째고, 다음으로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생각과 지혜가 세상의 지식과 기술과 경험보다 온전하다는 걸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는 어떨까? 그렇게 하자고 누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서로 낮은 마음으로 섬길 것이다. 모두 이런 삶을 꿈꾸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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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6 – 기업을 얻게 하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2. 7. 21:34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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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 구원은 세상에서 힘들게 하는 인생을 평안으로 이끄는 구원이 아니다. 존재로서 사람이 자기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두움과 죄에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다. 이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보이신 정체성 그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말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이자, 인생의 존재 목적이 밝아진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다. 사람이 태어나면 인류에 속하게 되는 것과 같다. 대학에 입학하면 대학생이 되고, 학교에 속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무리가 바로 거룩하게 된 무리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분이 있는 거룩함이다.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구분이 생기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 이 무리, 이 공동체가 교회다. 건물을 짓고 사람을 모아 교회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는 순간 하나님 나라인 교회에 속하게 된다. 남은 건 그런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만날 때 교회의 형식이 완성된다.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게 하나님 나라인 이유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만나니 그 만남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건 당연하다. 이게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만남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한 목적도 모르는 어두 삶에서 빛으로, 사탄의 손아귀에서 하나님께로 회복된 구분된 사람 중에서 기업을 얻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사명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려 주셨다. 결국 사도 바울이 받은 거룩자 중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성경에 나오는 기업은 상속, 소유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헬라어가 사용된다. 이러한 개념은 부모가 자식에게 상속하는 게 당연한 가치에서 비롯된 말이다. 즉 하나님의 기업을 얻는다는 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 상용구처럼 나오는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말에서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최초의 근거는 어쩌면 주기도문이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일러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그런 개념조차 가져 본 적이 없는 유대인들에게 이건 놀라운 충격이었던 것만 봐도 이 호칭은 놀라운 호칭임에 틀림없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이어받아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전했다. 이는 당연한 이치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장자로 첫 열매가 되셨고,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므로 같은 유전자와 본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중에서 하나님과 나 자신이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정말 본질적인 근거는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형성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기업은 아버지의 아들이 상속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업을 얻는다는 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기업을 얻는다는 건 결국 하나님의 의와 뜻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이걸 성경에 있는 표현으로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 곧 의와 뜻대로 삶을 산다는 뜻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것이니, 성경대로 사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엇을 나타내야 할 것인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셨다.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본성, 육신이 된 말씀인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본성이다. 이 본성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은 자신이 이런 성품을 가졌다는 걸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 뜻이 바로 우리 육신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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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5 – 거룩하게 하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2. 5. 10:28 Writer : 김홍덕

(26)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손아귀에서 하나님께로 그리고 죄 사함, 이 하나의 은혜는 사람을 다른 존재, 다른 격으로 바꾼다. 거룩하게 된다는 건 하나님이 보실 때 어두움과 사탄과 죄 가운데 있는 사람과 구별된다. 거룩은 곧 구분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죄인과 하나님 아들은 전혀 다른 격을 가진 사람이다.

 

거듭난 다른 생명으로 구분되는 것이 거룩함

 

사람은 거룩은 경건하고, 청결하고, 더러워질까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성전 기물에 파리가 빠지면 기물이 더러워졌느냐 아니면 파리가 거룩해졌느냐는 거짓말 같은 논쟁을 일으키는 게 사람이 가진 거룩함에 대한 개념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룩은 구분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건 사실 다른 표현도 아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거룩한 물건이 있다면 당연히 다른 것과 구분하여 둔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지를 살피시기에 다른 존재라면 당연히 구분하신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과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 사탄의 권세를 따르는 사람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 죄인과 의로운 하나님 아들, 이 명백한 구분들은 생명체와 무생물의 차이처럼 분명하게 구분하신다. 존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거듭난다는 건 이전과 다르고 세상 가치관을 의로 삼는 사람과 다른 생명이 되는 것

 

존재가 다르다는 건 깊은 의미가 있다. 가장 먼저 한 존재가 자신의 노력으로 다른 존재의 세계로 갈 수 없다. 개가 아무리 노력해도 고양이가 될 수 없다. 존재가 달라지는 방법은 오직 다른 존재로 다시 나는 방법뿐이다. 성경이 굳이 거듭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지 여기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존재적 관점으로 사람을 보신다는 걸 믿어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알고 믿을 수 있다.

 

거룩함은 개념을 아는 게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핵심은 내가 거룩하게 되느냐는데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 앞에 거룩해진다는 건 나의 존재 정체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두움에서 밝음에 속한 사람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무엇보다 죄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다.

 

구원은 곧 다른 생명으로 구분되는 것

 

잊은 듯 하지만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다. 쉬지 않고 전도 여행을 다닌 긴 인생의 후반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도로 세우신 뜻을 간증하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걸 간절히 전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간절함과 하나님의 뜻은 당시의 사람들만을 향한 게 아니다. 오늘 우리를 향하시는 말씀이다.

 

시대와 무관하게 구원을 얻겠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지금까지와 구분된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란 걸 알아야 한다. 이렇게 구분된 삶은 생명과 정체성이 바뀌는 게 시작이다. 그리고 본성과 정체성이 바뀐다는 건 가치와 안목이 바뀐다는 것이다. 찬송가 가사처럼 이전에 좋던 게 이제는 값 없어지는 변화다.

 

거룩하게 된다는 건 가치와 안목이 바뀐다는 것

 

그렇다면 가치와 안목이 바뀌면 어떻게 되는가? 먼저 필요가 달라진다. 필요가 달라지면 하나님께 구하는 게 달라진다. 소망도 평안도 달라진다. 이전에는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 가치로 귀한 걸 구했지만, 존재가 바뀐다면 세상이란 건축자가 보기에는 쓸모없어서 버리는 돌 같은 가치를 구한다. 이 원리로 내가 안목이 바뀐, 존재가 바뀐 사람인지를 단순하게 검증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기 전이나 하나님을 믿는 지금이나 같은 걸 가치로 여기고 간구하고 바라고 있다면 그건 구분되지 않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다. 당연히 거듭난 존재가 아니다. 이건 너무나 쉽게 오늘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기 전후에 귀한 것이 바뀌었는지를 보면 자기 구원을 알 수 있어

 

바울 사도가 간증하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뜻은 바울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거나, 사도라는 귀한 직임을 받은 사람을 부르는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또 하나님이 바울 사도를 부르시고, 불러서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 뜻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가진 뜻 그대로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가진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계획, 이것 하나다. 이 뜻에 순종하는 게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성경으로 말씀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높이 달리게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듣고 보고서 그 말씀에 순종하라고. 그리고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자신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과 다른 삶을 깨닫고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겠다고만 한다면 성령께서 그 마음을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시켜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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