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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좌경화는 이단의 길

Category : 잡동사니 Date : 2025. 2. 23. 09:12 Writer : 김홍덕

2025년 초 한국 사회는 심각한 상황이다. 이 와중에 큰 소리는 아니지만 교회가 좌편향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있다. 관망하고 있다는 걸 비판하는 소리도 있다. 물론 이는 보수 쪽 이야기라고 봐야 한다. 이런 중에 교회의 좌경화라는 이슈, 좌경화가 부담스럽다면 진보화라고 해도 되는 신앙적 관점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이야기가 보수적 관점의 논조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은 이상하게 바꾸어 놔서 오히려 어색한 사도신경의 옛 버전에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이 있다. 그런데, 정작 기도는 다르다. 주일 예배 시간에 주로 장로들이 하는 대표기도, 물론 주일 예배가 아닌 다른 집회에서도 '세상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 바로 잡아 주시길' 기도한다. 원색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당신이 경영하는 세상이 엉망이 됐어!"라는 항의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실수도 하지 않는다"라고. 황당한 모순이다. 더 황당한 건 이걸 모순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온전하게 경영하신다는 믿음은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가장 근간에 속한다. 그렇다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은 이 근간에 속한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가난이나 불평등의 문제를 신앙으로 가져와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기독교의 본질인 양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가치관을 선언하는 건 소위 말하는 깨어 있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문제를 해결하러 온 메시아라고 믿는 것이다. 개념 없이 보면 여기까지도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향유 옥합 사건 때 하신 말씀이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는 로마로부터의 독립, 가난 해결, 병든 자의 회복과 같은 세상 문제 해결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크게 환호했지만,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버렸고, 유대인들은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필요 없다고 강도 바라바를 선택했다.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은 뭔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가난이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물론이고 기독교 색채가 아주 강한 초강대국 미국에서도 사회 문제 해결이 기독교 신앙 최고의 과제인 것처럼 나서고 있다. 가난한 자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 복 받는 일이라고 외치고 있다. 사회적 문제의식과 교묘히 간음한 신앙은 당연히 사회주의나 다양성 같은 진보적 가치관과 결합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끼리끼리 노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다. 또한 사람이 보기에 너무나 엉망이 된 세상은 하나님께서 경영을 잘못하셔서 이런 꼴이 된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게 경영하시는데 이걸 사람이 생각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면서 문제로 만들어 웃기지도 않게 신앙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불에 기름을 붓듯 자기 삶이 사회적 문제 속에 있다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기도 한다. 대형 교회가 굳이 필요 없는 수억 원짜리 파이프 오르간을 배경으로 가난을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는 촌극을 찬양하고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세상은 "내가 옳다"는 사람 때문에 시끄러워진다.

 

이런 여러 신앙의 상식적 사고만으로도 교회는 진보나 좌경화가 될 수 없는 공동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난은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왜 그걸 신앙으로 해결하려고 하는가? 그건 사회의 문제이고, 가이사의 것이며, 그들에게 맡기고 순종하면 되는 일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이 맡긴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겠다는 무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신 분이 아닌가? 그런데 그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세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그건 예수님을 모욕하고 배반하고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이다.

 

 

그렇다면 세상 문제에 신앙은 외면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사회적 일에는 봉기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2025년 한국 사회의 탄핵 반대 운동이 여기 속한다고 본다. 문제는 가치관과 동기다. 사회에 문제가 있으니 이를 신앙으로 해결하자며 봉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지만, 그런 잘못된 가치관을 향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임을 외치는 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온전하게 경영하시는 분이라는 신앙을 안에서 보면, 신앙으로 가난을 해결하려 하는 외침은 거룩해 보이지만, 사실은 거만한 골리앗의 모욕으로 들린다.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 위에 있는 가치관은 세상의 문제를 대중적 신앙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교회와 공동체를 이루면서 늘어나면 그것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 가치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온전하게 다스리신다는 믿음도 없이 어떻게 목사가 되어 강대상에서 세상 문제를 해결하자고 외칠 수 있는지 그 무식한 양심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교회가 진보적 관점과 사회주의 이념 혹은 아류에 매몰되어 신앙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는 건 자기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고, 정통이라는 양의 탈을 쓴 이단 늑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온전하게 다스리신다는 이 믿음 하나만 있어도 교회는 사회주의를 멀리하게 되어 있다. 이 믿음 하나가 없는 교회를 하나님을 믿는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건 그냥 이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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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는 유대민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스더 Date : 2025. 2. 16. 14:06 Writer : 김홍덕

모르드개와 유대인을 모두 죽이려는 하만의 계획은 수포가 된다. 하지만 하만의 계획은 오히려 자기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계기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에스더가 왕후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르드개가 왕을 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만이 유대인을 말살하려고 한 이유는 자기에게 절하지 않은 모르드개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 세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에 대한 세상의 핍박을 대변한다. 세상은 왕의 권세를 자기 것으로 생각한 하만처럼 하나님이 주신 삶을 자기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인 높은 자리와 영광을 구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며 핍박한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바로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의 모습이고, 그들이 보여준 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과정이자 하나님의 섭리다.

 

높은 자리와 영광을 진정한 가치로 생각하는 세상은 낮아지는 본성을 하나님의 영광과 가치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다. 굳이 잡아서 때리고 고난을 가하지 않아도 세상 가치의 낙오자라며 비웃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핍박이다. 이런 핍박의 극치는 뭐니 뭐니해도 십자가다. 십자가가 이 모든 핍박을 이겨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모습은 십자가의 한 단면인 셈이다.

 

모르드개는 민족의 위기를 에스더에게 전하면서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4:14)"라고 말했다. 이런 날을 예상하고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왕후로 만든 건 아니지만, 왕후라는 자리가 백성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분명하다.

 

앞에서 우리는 왕후라는 자리, 아내라는 자리는 왕과 남편의 의라는 내용에 대응하는 형식이라는 걸 비유한다고 설명했다. 왕후가 왕의 후사를 잇는다는 건 왕이 가진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을 낳는다는 것으로 결국 왕의 의라는 내용과 여자라는 왕후의 형식이 하나가 되어 아들을 얻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육신이 되어 얻게 되는 하나님 아들로 사는 삶을 설명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 상황과 전개는 에스더가 가진 왕후라는 지위가 유대인을 세상의 핍박과 멸망에서 구했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을 때 세상의 핍박을 이길 수 있다는 걸 설명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에스더는 그 유명한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말로 대변되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는 왕의 허락 없이 왕에게 나아갔다가 왕이 허락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당시의 법을 인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자기 백성을 위해, 세상의 핍박을 이기기 위해 왕에게 나아간다. 왕이 허락하므로 에스더가 죽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입긴 하지만 에스더로서는 죽을 수 있는 자리로 스스로 간 건 분명하다.

 

에스더의 이런 모습은 십자가로 스스로 가신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하다. 물론 에스더는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죽을 자리로 스스로 갔다는 건 같다. 이 에스더의 모습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스스로 낮은 자리로 가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상고할 것은 이런 에스더의 모습이 자신과 유대민족을 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세상의 핍박을 이길 수 있다. 세상과 복음이라는 이런 가치의 선택에서는 하나를 부인하는 거로는 이길 수 없다. 세상의 가치를 부인하고, 추구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길 수 없다. 어둠을 향해 "물리 가라" 소리친다고 물러가지 않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빛이 있어야 한다. 즉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의 가치가 진정한 가치가 되어야 이길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왕후라는 자리, 여자라는 자리는 왕과 남자가 가진 의를 형식으로 바꾸어 내는 존재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남자로 표현하는 건 하나님의 성별이 남자여서가 아니라 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인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온전한 존재가 된다. 온전하다는 건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유혹이나 핍박을 이길 수 있다. 인생으로서 자기 존재 목적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건 가장 합당하고 온전한 일이다.

 

우리가 세상의 핍박, 높은 것을 추구하지 않으므로 받는 비난과 조롱은 낮아지는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여길 때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노력이나 자기 세뇌로 안 된다. 그리스도의 낮아지는 본성으로 거듭나야 한다. 생명이 바뀌지 않으면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 늑대가 아무리 노력해도 늑대인 이상 고기의 가치를 버릴 수 없다. 양으로 거듭나면 고기는 무의미해진다.

 

또 하나 유대인을 구한 힘은 모르드개가 아하수애로를 구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에스더 2장 말미에 나오는데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통해 역모를 미리 알려 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잠들지 못하던 아하수애로 왕이 이 일을 상고하게 되고, 그때 어떤 보상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되므로 이를 보상하는 일이 유대인을 구하는 또 하나의 힘이 된다.

 

구조상 모르드개가 아하수애로 왕을 구하듯 사람이 하나님을 구하는 일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능력이나 의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셔야 하는 필요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사람은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존재라고 할 수도 있는 셈이다.

 

이는 아하수애로가 자신을 영화롭게 할 사람이라고 모르드개를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분명하게 언급하셨는데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고 선언하셨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요 17:10)

 

하만은 유대인,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을 핍박했지만, 하나님은 아하수애로를 통해 오히려 모르드개가 절대자를 영화롭게 하는 사람임을 확정했다. 하나님을 찬양 하는 자,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이 아니라 여기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 이걸 알아야 거듭난 사람이다.

 

세상은 높은 곳을 앙망하고 평안과 성공을 구하면서 그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핍박한다. 이런 그들의 행동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주신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이 능동적으로 핍박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핍박에 거하는 꼴이 되기는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영화롭게 여기신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하만과 모르드개의 전세 역전을 가져온다.

 

세상을 사랑하고,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아는 사람은 하만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를 영화롭게 여기는 줄로 안다. 착각에 빠진 하만은 결국 그 망상 속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무지보다 착각이 위험하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이게 하만과 모르드개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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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이유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건 어쩌면 너무 상투적이고 교리적인 표현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들리는 이유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접근이 내 죄를 사하기 위해 형벌을 당한 구세주로 생각할 뿐, 내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으나 혹시나 있을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가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는 the Christ가 아니라 a Christ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에 대해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따라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해 상고해 볼 차례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고, 히브리어로 같은 의미의 말은 메시아다. 그 의미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성경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리스도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머리에 기름을 부은 건 상징적인 의식이다. 길 가던 사람에게 다짜고짜 기름을 부으면 그리스도가 되는 게 아니다. 기름 부음을 받을 자격이 있는 합당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을 때 유효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내가 그리스도다" 혹은 "너는 지금부터 그리스도다"라고 선언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굳이 그런 선언이나 보증이 없어도 된다. 정말 필요한 건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걸 확신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에 대해서는 다른 여러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믿으려고 애쓰고, '혹시 아니면 어떻게 하지?' 같은 고민이 있는 믿음이 아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으로 부인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남자로 난 사람이 세상에서 배운 모든 것으로 자신을 여자라고 우겨도, 심지어 성전환 수술을 해도 그 유전자가 남자인 걸 바꿀 수 없는 지경과 같다. 자기가 거듭났다는 사실이 그 정도로 인식이 되어야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는가?

사람들은 거듭남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거나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과 유전자와 본성이 다른 존재로 다시 난다는 뜻인데 교회에서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라는 대답이면 된다고 믿는다. 돈을 내고 죄를 면죄받는 면죄부가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고 말하면서 같은 매커니즘을 따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일시불로 내지 않을 뿐 교회에 다니는 동안 할부로 내고 있다.

 

성경은 거듭남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씀하신다. 게다가 이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성경을 조금만 읽었다면 물은 말씀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일과 그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기적이라는 뜻이다. 유일신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과 하나가 되는 게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순종하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되도록 성령께서 잉태케 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모양 그대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무엇보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한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하기에 보이신 본이고 표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는 게 바로 구원이다.

 

 

그리스도는 영이신 하나님의 신성인 말씀과 그 하나님의 성품과 의와 뜻을 표현하기 위한 형식으로 창조된 사람이 하나가 된 사람의 정체성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고,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사람이 그리스도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걸 논하기 전에 달리실 때부터 예수님을 이끈 건 그리스도라는 본능이다.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처럼 순순히 십자가를 지신 것도, 또 스스로 내려오지 못한 이유도 모두 그리스도의 본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신성)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아니라 신이라서 참았다거나 심지어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도 십자가에 대한 바른 견해가 아니며,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이었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고 인성을 한정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바른 견해가 아니다. 이런 그릇된 견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건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본성과 성품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본성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 그리고 육신을 가진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겠다는 사람 창조의 목적 그 자체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인데,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된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으로 표현하시겠다는 게 창조 목적의 본질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말씀이 육신이 된 이유, 되어야 하는 이유이자 우리의 존재 목적이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건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났을 때 우리 삶의 모습이고 우리 삶의 목적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십자가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다.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처럼 순순히 끌려가 십자가를 지고, 또 하나님의 아들인데 스스로 내려오지 못하는 그 모습 전부가 사람을 통해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함은 십자가를 지는 낮아지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려는 성품이기 때문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이기에, 사명감 때문에, 우리와 같은 육신이라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게 아니라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표현하시려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는 순종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그 모습과 본성은 결국 우리를 위한 것, 우리가 되어야 하는 모습이다.

 

덧붙여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생명 본성이 우러나는 것이므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으로는 절대로 이를 수 없다. 성경이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지적이 바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신앙이다. 여기서 성경은 신약, 구약이 따로 없다. 성경의 어느 구절이라도 노력으로 대하면 그게 율법이고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 것이면 굳이 생명의 표현인 <거듭남>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우리가 되어야 하는 생명인 그리스도는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다. 이 낮아지는 마음을 가진 본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성품이다. 사람은 육신을 연약하다고 생각하지만, 낮아지는 마음을 표현할 존재가 바위를 쪼개는 바람 같은 정체성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이루기에 너무 적합하다.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낮은 마음은 노력이나 신념이 아니다. 본성이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이 낮아진다니 신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모든 면에서 더 능력이 있지만 아들을 이길 수 없고,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한다. 사람 살리는 능력이 사라지거나 감추어서가 아니라, 낮아지는 본성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인데 사람들이 "그 꼴로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라 할 수 있느냐?"며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하니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자, 우리 존재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이 마음을 표현하시려고 나를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것이다.

 

 

맺는 말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이자 사람이라는 생각을 동의하고 싶으면서도 십자가에서 늘 막힌다. 이건 있으면 안 되는 일이다. 십자가는 구원의 열쇠인데 오히려 십자가가 구원을 이해하는 방해가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순순히 졌고 또 내려오지 못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예수님 신성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모습에 헛갈리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신성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 속에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신 안에서 새로운 생명 본성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는 게 바로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걸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인 육신이 하나가 된 존재고, 그리스도가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낮아지는 마음이다. 따라서 낮아지는 마음으로 지신 십자가는 예수님이 가진 신성과 인성,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실체이다. 가장 온전한 모습을 깨고 스스로 능력을 발휘해서 내려올 이유가 없다.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자기 안에 이것을 이해하는 말씀이 없는 것이고, 그건 구원이 없다는 증거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에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 분이고, 하나님과 하나인 분이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정체성은 곧 우리가 되어야 하는 정체성이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내용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구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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