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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2 – 어두움에서 빛으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29. 21:36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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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회심은 사도행전에 세 번 기록되어 있다. 9장은 간증이라기보다 상황을 기록한 것이고, 22장은 예루살렘에서 송사를 받아 간증했다가 폭동 수준의 유대인들 저항에 천부장이 나서서 바울 사도를 보호했고, 마지막으로 로마로 가기 전 유다 분봉왕 아그립바와 총독 앞에서 자기 회심의 과정을 간증한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은 각 복음서에 반복되는 부분이 있으나 각각은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을 조명한 반면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관점에서, 마가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성격이 강하고, 누가복음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란 관점이고, 요한복음은 메시아,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에 관한 관점이다) 바울 사도 회심은 한 성경에서 세 번이나 같은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여러 번 자기 간증을 한 것은, 자신의 변화 과정은 자기만의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반문할 정도의 바울임에도 선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 구원과 광명과 사탄에게서의 해방과 죄 사함과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의 기업을 얻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결국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26:16-18)

 

우리는 흔히 사도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도 바울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신 것>이라고 간증한다. 유대인에게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라고 하면 사실상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 되므로, 사도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은 단지 이방인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계획임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만을 위한 부르심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부르심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동일하다. 당연히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핵심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때문이다. 아담에서 아브라함, 다윗과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과 오늘 우리에게까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삶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한결같으시다.

 

그렇다면 어쩌면 다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어두움에서 빛으로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와 모든 사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이유는 먼저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두움은 조명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런 말씀은 쉽게 이해하면서 율법이 행위를 말씀하시는 게 아닌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두움에 관한 시작은 의외로 창세기 시작부다. '흑암이 혼돈한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때 이미 땅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하시니라(창 1:2)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물리적 세계의 창조로만 보는 사람은 주목하지도 않고, 또 설명할 수도 없는 말씀인데, 이 말씀의 의도는 사람이 어두움에 거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빛을 만난다는 전개로 이어지는 말씀이다. 땅은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하늘에 대비하여 일반적으로 사람으로 인식한다. 성경은 더 분명하게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말씀으로 땅이 사람이란 걸 확증한다. 그런 땅이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은 흑암에 놓였다는 건 사람이 어둡고 바른 인식과 인지가 없는 상태라는 걸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을 두고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요한복음도 태초로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이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말씀은 천지창조를 물리적 세계의 창조만으로 한정한 관점으로는 해석하면 오류에 빠진다. 빛이 있으라 하기 전 땅이 혼돈했다는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 듯 성선설, 성악설이라는 의미 없는 논쟁이나 예정론, 자유의지 같은 논쟁을 멈추지 못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태초와 창조는 단지 물리적인 세상의 창조를 한정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위대함을 설명하기 위한 말씀 역시 아니다. 사람에게 있어 스스로 알 수 없는 자기 존재 정체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도록 인도하시고 알게 하시는 게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다.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이라는 일련의 사항들을 이해하기 위해 핸드폰이라는 걸로 비유해 보자. 먼저 사람이 통신과 인터넷 등 정보를 활용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겠다는 의도로 핸드폰을 만든다. 핸드폰 생산 이전에 사용 목적이 먼저 있다. 사람 역시 존재하기 전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한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의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인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먼저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브라함은 물론 창세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의 존재보다 창조하신 목적대로의 사람인 그리스도가 먼저다.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창조에는 목적이 있다. 심심풀이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 보다가 상이나 벌을 주시는 재미로 사시려고 만드신 게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아바타나 로봇처럼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그건 엎드려 절받기일 뿐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진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창조된 사람 스스로 하나님께서 자기 존재의 목적을 탐구하여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에 자의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렇다는 걸 알면 성경이 모두 해석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사람의 창조 목적을 알 수 있도록 세상의 이치와 율법과 말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육신이 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찾아야 할 우리 존재 정체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보고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은 사람이 자의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 나타나

 

예수님 역시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자를 고치듯 바리새인들의 정신을 사로잡아 순종하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다. 그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려고 놋뱀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다. 사람이 그걸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 계획대로 밑에서 보고 있던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도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이 법을 설명한다.

 

또한 성경에 그렇게 무수히 하나님을 부르면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도 이 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연장 하나를 선택할 때도 원하는 대로 잘 작동하는 걸 사용하듯 사람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드신 목적을 알고 살겠다는 마음으로 그 뜻을 구하면 어디서라도 만나시겠다는 약속하셨다. 이건 너무 당연한 이치기 때문에 의심하는 게 오히려 바보다.

 

이 순종을 굳이 표현하면 '자유 의지'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자기 인생에 대한 선택권을 주시고, 선택한 대로 살 수 있도록 하신 건 바로 이 이유 하나 때문이다. 인생을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선택할 수 있게 하셔서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 뜻을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기를 바라시기에 사람에게 인생에 대핸 선택권을 주신 것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역량을 가지고 인생이 마치 자기 것인 양 생각하며 산다. 이렇게 사는 삶이 바로 어두움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도 모르면서 맘대로 사는 건 어디에 사용하는 건지 모르는 전동공구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전동 공구를 용도와 무관하게 사용하면 사고가 나듯이, 사람이 서로 인생을 자기 맘대로 사용하니 갈등과 다툼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걸 화평하게 하신다는 건 모든 사람이 존재 목적대로 회복되면 전동공구를 용도대로 안전하게 사용하는 것과 같아지니 사람 사이에 갈등이 없어진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알지만, 그렇게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인생의 목적도 모르는 어두움에 갇혀 있다.

 

이렇듯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는 인식과 인생을 선택하고 선택한 대로 살 수 있는 역량을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체가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이다. 목적을 모르는 어두움, 용도를 모르는 어두움인데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하나님의 뜻 이 하나를 몰라서 그렇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인생은 모두 어두움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람을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하신 말씀은 결국 이 어두움, 자기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어두움에서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그 빛은 영광을 얻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아는 상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시는 성품은 세상의 가치로 높아지고 위대해지는 게 아니아 낮은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이런 수고를 하신다는 자체가 낮은 자세로 섬기는 그 자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빛>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인식하는 삶을 알게 되는 것

 

하지만 핸드폰이 목적대로 생산되었다고 해서 바로 그 목적대로 활용되지는 않는다. 핸드폰을 사용할 목적을 가진 사람이 유심을 넣고 설정해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핸드폰은 존재 목적이 달성된다. 이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이 부여한 생물학적 본성에 따라 태어났다고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 목적을 기준으로 보면 사람이 생물학적, 의학적으로 살아 있어도 생명이 없는 상태다. 이 상태가 바로 천지창조 이전 상태, 흑암이 혼돈하는 땅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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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3-25:27)

바울이 심문받는 동안 유대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뀐다. 이에 베스도는 부임 후 바울 사도의 사건을 해결하려고 한다. 마침 베스도 총독을 찾아온 아그립바 왕 버니게라는 사람과 천부장 등이 모여서 바울 사도를 심판하는 재판을 열었지만, 결론은 죄를 찾지 못했다.

 

이 재판에서 바울 사도는 매우 당당하게 불의를 행하지도, 죽을 만한 죄를 짓지도 않았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사도 바울의 일이라 당연하게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참 놀라운 자세다. 신앙생활의 범주 안에서 성경을 보면서 보면 이게 특별해 보이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 그것도 세상의 권력자 앞에서, 더욱이 자기 행위를 문제 삼은 송사의 재판에서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반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죄 없다고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기독교인들은 사도 바울처럼 '나는 죄 없다'라고 할 수 있을까?

 

종교인들에게 종교의 영역 안에서 죄 사함을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 않은지 교회에서 죄 없다고 말하는 건 어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럼 너는 교통 신호 위반도 한 번도 없었나?"라는 반문을 마주한다면 이야기는 아주 달라진다. 어쩌면 교회 안에는 '우리 서로 그런 시비는 걸지 말자'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어서 아무렇지 않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모른 체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사하신다고 하셨으니, 죄가 없을 것 같은데, 또 막상 '나는 죄 없다'라고 말하려고 하면 자기 행위와 기억이 검사로 돌변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눈도 경계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목사나 장로가 교인들에게 시비 걸리는 이유는 전부 행위 때문이다. '목사가 혹은 장로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는 말로 시비와 지탄이 시작된다.

 

기독교인들은 행위로 지은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끼리는 '나는 죄 없다'라고 말하는 건 양심 불량인 사람처럼 보인다는 걸 서로 안다. 이런 인지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아주 강력한 감시 체제가 된다. 동병상련이라고 서로서로 같은 마음이라는 것도 서로의 입을 다물게 한다. 너나 나나 행위 규범을 모두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행동을 기준으로 죄를 심판하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는다. 정말로 성경을 믿는다면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을 믿어야 한다. 말은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를 회개하는 건 모순이다. 행위를 회개한다는 건 행위가 의롭지 않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건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믿음의 동전 뒷면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외모는 행동이고,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중심은 내용 곧 존재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정한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만 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과 다른 죄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

 

사람이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다른 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탓이다. 하나님은 존재 정체성을 보시는데 사람은 행위와 외모를 본다. 이 차이는 사람에게 아주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출발이 죄 사함인데, 사해야 할 죄를 하나님과 다르게 생각한다면 내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이 아닌 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근본 목적인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사하시는 죄와 내가 사함을 받고자 하는 죄가 다른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님과 관점이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관점이 같을 수 있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 곧 삶의 본성과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 그대로의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창조 목적이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우리는 이 법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계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을 죄인으로 살 이유가 없다. 이건 단순한 논리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온전하면 세상에서 내가 의인이라는 걸 굳이 믿으려고 신학 같은 초등학문을 동원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고 어떤 관계인지만 명확하면 사는 동안 항상 의롭다는 걸 알고 살아간다. 아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바울 사도는 그런 사람이었고, 사람이 그래야 한다는 걸 전한 사도다. 그러니 그가 세상 어디에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사도들의 순교로 전수한 이 복음을 믿는 우리는 어때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나는 불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는데 그가 전한 복음을 믿는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죄 없다고 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바른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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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0 – 복음을 귀하게 여기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26. 07:35 Writer : 김홍덕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소동과 송사 이후에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힘으로 총독에게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로마 황제 앞에서까지 바울 사도의 여정은 험난했다. 다행히 로마 시민권 덕에 자유와 보호를 받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은 대단했고, 결국은 순교 당했다.(순교 기록은 성경에는 없고, 전승된 기록에 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과 달리 바울 사도는 율법과 성전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의 핍박과 살해 협박을 받았다. 복음과 율법의 갈등이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야할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이슈였다. 그런 순교와 위협을 당하면서 전해온 복음을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가치를 바로 알고 있을까?

 

바울 사도를 심문한 총독과 왕의 태도는 율법과 복음의 갈등이란 게 신앙 없는 이들에겐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제다. 물론 현재는 한국이나 미국 같은 민주화된 국가에서 이 일로 육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지는 않지만, 영적인 생명이 죽고 사느냐는 문제인 걸 비유한다.

 

율법과 복음의 갈등은 영적 생명의 문제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느냐 지옥이라는 끔찍한 곳에 가느냐를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믿는다. 영혼의 실존과 사후 세계의 영원함을 믿는다는 게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어 천국에 간다는 믿음은 이생 기간과 비교할 수 없는 영생을 결정하는 절대적 요소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귀하고 중요한 믿음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에게 복음과 율법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 낮아…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라는 기독교인들의 찬양과 달리 대부분의 기독교인에게 신앙은 옵션이다. 취미 하나에 빠지기만 해도 모든 게 취미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사람의 삶이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소위 말하는 어떤 분야의 덕후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하다고 느끼기는 힘들다.

 

이는 죄에 관하여, 성령에 관하여. 행위와 율법에 관하여 명백한 모순에도 태연하게 기존 신앙의 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공부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구원이란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전제 아래 있는 것인데 구원받았다면서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자기 모습이 이상하지 않고, 노력한다는 건 분명 이르지 못한 사람의 모습임에도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인 걸 발견하지 못하다.

 

이런 일들은 정말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자 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지려고 한다면 절대 방치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이상하게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방 안의 코끼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런 상태가 문제가 되는 건 착각에 빠진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도 아닌데 자기는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자기 구원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막상 심판대 앞에서 모든 게 헛것이라고 밝혀졌을 때 어떤 대책도 없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인생 자체가 문제인 셈이다.

 

온전한 신앙이 없다면 돌이킬 수 없는 문제에 빠져 있는 것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사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답하셨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대충한다. 아니 분명한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자신이 이상해야 하고, 끊임없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데도 계속 실패하는 자신에 대한 대책을 염려해야 하며, 성령과 죄와 구원에 관해 모순된 논리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함에도 그저 다들 대충하니 자신도 대충한다. 습관처럼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졸고 오는 그 하나로 구원도 영생도 얻은 것으로 여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우리가 믿는 복음은 많은 수고와 목숨으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거저 주시는 은혜라고 값어치가 없는 게 아니다. 귀한 걸 거저 주니 은혜지 값어치 없는 걸 주는 걸 은혜라고 하지 않는다. 결국 복음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정말로 귀하고 귀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그에 합당한 자세가 필요하다. 신앙에 있는 의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알고자 해야 한다. 알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알기를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그런 간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신다. 그리고 많은 신앙의 의문에 관해 설명하고 전하는 말씀을 만나면 깊이 묵상해야 한다. 나에게 까지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앞선 사람들의 큰 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리스도의 본능에 이끌려 한 수고 끝에 도달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사도들이 목숨을 바쳤고,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한 간절함으로 구하고 답을 얻어 전해온 사람들이 있어 오늘 나에게 이 말씀이 도달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말씀은 우연히 나에게 온 게 아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귀하게 여기고, 의문을 안은 채 그저 세월을 보낼 게 아니다. 죄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는 내 본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런저런 신학적 견해와 해석이 필요한 단계에 아직 머물러 있다면 뜻과 목숨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을 구해야 한다. 그렇게 구하면 반드시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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