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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64 – 율법과 복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19. 05:25 Writer : 김홍덕

(21:17-26)

많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야고보의 집에 머물며 장로들에게 그간 자신의 선교활동에 대해 전했고, 이에 장로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 사이에 모세의 율법을 폐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전하는 이교도와 같은 행위를 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과, 이를 인하여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바울 사도는 예식을 행한다. 이는 나실인(6)에 관한 예식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머리를 깎음으로 율법을 준행하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예식이다. 할례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15장에서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안디옥의 성도들에게 구원의 증거로 할례를 요구했을 때 바울 사도가 할례가 구원의 증거가 아니라는 걸 전하고, 이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여 사도들 특히 베드로가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한 멍에를 이방인에게 목에 둘 수 없다"라고 확증한 일이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바울 사도는 할례라 필요 없다고 전한 사람임에 분명하고 증거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신이 율법을 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항변했다. 이는 변명이 아니다. 예수님도 늘 이런 비난에 시달렸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으로 이 모든 비난에 대응하셨다. 그건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 이상으로 율법을 지켜내는 법이 없기 때문이며, 예수님은 율법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본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로 거듭남을 전하는 사도 바울 역시 율법을 폐하는 게 아니라 완성하는 걸 전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은 율법을 폐하지 않았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율법이 완성된다는 의미

 

언뜻 바울 사도의 결례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복음은 가장 확실한 율법의 준행이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율법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 둘 중에 누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자기와 같이 그리스도가 되기를 전한 바울 사도이기에 율법을 지키는 예식으로 자신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란 걸 보여준 것이다.

 

바울 사도가 예식을 행한 건 자신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

 

먼저 예수님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늘 비난을 받았다. 대표적인 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었다. 심지어 안식일에 병자가 예수님께 낫기를 구하면 어떻게 하나 관찰할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병자를 고쳤다. 행위가 율법을 지키는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위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유대인들에게 이건 명백한 율법 위반이었다.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큰 이유였다.

 

바울 사도 역시 이 비난의 한 가운데 처했다. 특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에게 있어 할례는 갈등의 요소였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이에 대해 행위로 지키는 게 아니라는 걸 확증해 주었기에 담대히 전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사도들의 보증만을 믿은 건 아니다.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소리를 들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이 삶이 되도록 거듭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니 성령께서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는 게 본질임을 알게 하신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한 사도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는다. 행위로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용이 사람의 육신이란 형식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계획이다. 그 계획의 본체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우리의 표상이 되시는 건 그걸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행위가 아니라 거듭난 생명의 본성으로 지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육신으로 율법을, 또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지켜내는 삶을 살아 내는 게 목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행위에 앞서 우리의 본성이 되어야 한다. 그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다. 행위는 본성이 정해지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온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신 이유가 여기 있고, 바울 사도가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예식으로 보여준 이유가 여기 있다. 이건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퍼포먼스가 아니다. 우리의 표상으로서의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지킬 것인지를 보여준다.

 

오늘도 사람들은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참 가상해 보이지만 노력한다는 건 이루지 못한 지경에만 있는 것이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노력한다는 건 육신으로 도전하는 단계고, 말씀이 육신이 된 상태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아직 되지 못한 상태, 즉 구원에 이르지 못한 상태며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율법 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분명하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의 구원에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예수의 이름, 곧 예수의 정체성인데, 이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인데, 말씀이 육신이 되면 말씀의 본성대로 산다. 그리스도는 그런 존재며, 그리스도는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다. 이 생명이 되는 게 구원이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냥 말씀대로 살기만 한다. 그렇게 성경은 저절로 지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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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6)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사도를 향해 제자들과 여러 성도들이 바울 사도를 만류한다. 두로에 머무는 동안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께서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을 것을 예언하신다며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했고, 가이사랴에서는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의 딸도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한다. 심지어 빌립 집사의 딸은 바울의 띠를 가지고 자기 수족을 매는 퍼포먼스를 행하면서까지 바울 사도의 운명을 예언했지만 바울 사도는 굽힘 없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면 성령께서 운명을 알려 주시는데도 굳이 예루살렘으로 가려 하는지, 또 바울 사도는 어떤 잘못을 했기에 고난을 받게 되는지가 의문스럽다. 만류하는 이들이 자기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무당이거나 잡신에 접한 예언을 하는 것도 아님에도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렇지만 의외로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행을 이끄는 분은 성령이시다. 사도 바울의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건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가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건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행은 성령의 예언을 거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거역하는 게 아니다 순종하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

 

예루살렘에 간다는 건 고난을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한다는 것임을 바울 사도도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에게 닥칠 이 위협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신앙과 다른 믿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를 죽이려는 시대적 상황이 만든 위협이 아니다. 이건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운명이다. 마치 결혼한다는 건 자기 인생이 축소되고 아이를 위한 헌신과 가족으로 살아가는 헌신만 요구하는 삶으로 던져지는 걸 알면서도 결혼하는 사람의 본능과 같은 것이다.

 

앞서 우리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성령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시는 분이라는 걸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셨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로서 사는 삶을 초대하신 것이다. 그건 우리도 십자가를 지는 운명으로 거듭나기를 청하신 것이고, 그게 바로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고난이 예견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건 성령이 충만하고 그 성령을 전하는 사도 바울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바울의 위대함을 찬양만 할 게 아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 그리고 많은 사도들이 불 보듯 뻔한 고난에도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고난에 순종했다는 건 그들이 전한 복음을 믿는 우리 역시 같은 순종을 살아야 한다는, 아니 그렇게 살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어쩌면 이 운명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운명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의 십자가나 사도들의 순교에 비할 바는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자기 십자가가 있고, 우리는 그 십자가라도 바로 지고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대로 살아가야 한다. Have to는 의지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고난을 감수하면 나의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지려고 노력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고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건 노력으로 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거듭난 삶을 산다면 나름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산다. 그게 어떤 이들에게는 육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엄청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육신의 목숨을 던져 헌신하는 일은 신앙의 세계뿐 아니라 모든 세계와 영역에서 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엄청난 일이다. 우리가 사도들에 대한 존경을 깊이 간직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비록 우리가 그런 엄청난 고난에 참여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나름의 십자가와 고난이 다 있다. 이 고난은 성령이 인도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모든 사람을 고난,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인도하신다.

 

성령이 담금질하듯이 우리를 고난에 이끄시는 건 아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지극히 고난에 속한다.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준다는 건 누구나 하기 싫은 일인데 이 일을 본능으로 행하게 되는 존재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성령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길로 인도하신다.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고난이 있음에도 거역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물론 이건 굳이 작심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자기 운명이 그렇다는 걸 살면서 알게 된다. 한국에서 남자로 나면 군에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여자로 난 사람은 엄청난 고통에도 출산을 하게 된다는 걸 할게 되는 것과 같다.

 

역설적으로 자기 삶에 고난,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있을 거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주 어리거나 그리스도로 거듭난 상태가 아니다.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고난 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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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8)

바울 사도는 전 선교 여행 기간을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머물렀던 에베소를 떠나면서 전한 고별 설교에서 자신이 떠나면 이리와 같은 사람들이 와서 어그러진 말로 유혹할 것임을 알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때는 자신이 전한 은혜의 말씀이 성도들을 튼튼하게 세워 그런 유혹을 이기게 할 것이므로 이를 잘 명심해 주기를 권면했다.

 

대응하는 방법으로 적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교회를 바로 정의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거리에서 보는 교회가 사도행전에서 또 많은 서신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의 정통성을 가졌는지부터 살펴보자.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고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구하고, 예수 믿었더니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걸 은혜로 알아 간증하는 곳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인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상식이 있다면 우리가 아는 교회는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교회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교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염려한 일은 지금 우리가 아는 교회에 일어나지 않는다. 즉 이리와 같은 사람들이 와서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정통 교단의 교회에 신천지가 침투하는 사건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신천지나 정통 교단이나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건 같다. 세상에서 평안과 복락을 얻고 성공하는 삶을 살고 그런 복락이 사후 세계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분명히 십자가를 지신, 낮고 천해진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바울 사도가 염려한 그대로의 모습인 오늘날 교회

 

오히려 지금의 교회는 바울 사도의 염려대로 이미 침략당한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미혹하는 이들이 들어오면 자신이 전한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같은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은혜의 말씀으로 맞서라고 했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아니라는 것과 오늘날 교회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과 이론이 이리처럼 교회를 노리는 존재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 이리들과 같은 조직이 되었다. 이미 이리에게 먹힌 상태이므로 바울 사도의 경고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건 회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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