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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10) 독사에 물린 바울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는 사도 바울 일행이 탄 배가 난파하여 모든 승객이 멜리데라는 섬에 오르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신기한 일이 생긴다. 바울 사도가 나무에 불을 피우는 도중 나무 묶음 안에 있던 독사가 나와 사도 바울을 무는 일이 생긴다. 이를 본 원주민들은 바울 사도가 죽을 것이라 말했지만, 바울 사도가 죽지 않자 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일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말씀을 소환한다.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 16:18)

 

이건 신기한 기적이다. 그러나 성경 속 기적은 기적 자체만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안 된다. 성경 속에 나오는 모든 기적과 말씀과 일은 모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 곧 사람이 다시 태어나야 하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을 위한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뜻하신 목적 그대로의 사람이 되는 일을 설명하고 전하는 게 성경인 만큼 모든 내용이 이를 위한 것이라는 걸 성경을 읽을 때 염두 해야 한다.

 

바울 사도가 뱀에게 물린 일은 바울 사도가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는 중에 생긴 일이다. 이 여정에 배가 난파하는 위기에서 살아서 겪는 일인데, 이런 과정은 모두 바울 사도가 로마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목적과 뜻에 따라서 진행되고 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정한 목적이 다할 때까지 사람의 안녕이 보전된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니까 육신의 수명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룰 기회의 시간인 셈이다.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이 되기 위한 기회의 시간

 

사람들은 아마 바울 사도가 로마에 복음을 전해야 하니 하나님께서 그때까지 목숨을 보전하셨다는 접근은 어렵지 않게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수명을 두고 동일한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면 인생이 마감된다는 건 믿고 말하면서 아직 살고 있는, 아니 살 수 있는 이유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이 시간이 주어진 이유와 목적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이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보이시려는 내용은 십자가다. 하나님께 낮은 자리에서 상대를 섬기는 마음이 있다는 걸 보이고자 하신다. 이런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사람은 연약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겸손과 순종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목숨을 보전하시고, 또 세상을 망하지 않게 경영하신다. 사람에게 삶을 사는 시간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대로 스스로 순종하는 기회를 주심이고, 세상이 망하지 않은 건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임과 동시에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들어온 터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본질적인 하나님의 목적이 바울이라는 한 사도의 마지막 여정에 깊고 직접적으로 관여하셨음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이제 와서 보면 인류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의 시작으로서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을 로마로 보내신 하나님께서 풍랑에서도 독사에게서도 바울 사도를 보호하는 게 당연한 이치인 셈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정한 목적이 바울 사도를 안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이 관점에서 자기 삶과 삶의 수명과 하나님의 경영을 조명해야 한다. 나에게 아직 삶이 있다는 건 하나님께서 정한 뜻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이며, 수명은 그 기회의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사람인 나에게 이루어지는 일을 위해서라면 태양도 멈추게 하신다는 걸 믿어야 한다. 그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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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7 44)

로마를 향하는 바울 사도 일행이 탄 배는 결국 난파하게 된다. 백부장이 선택한 선원들의 경험과 지식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다. 게다가 백부장이 선택한 경험과 지식의 선원들은 자기들만 살고자 탈주를 시도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두를 무사히 구하신다는 위로의 약속과 함께 축사하고 함께 음식을 먹은 군사들은 배가 부서지려 하자 바울 사도를 포함한 죄수들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모두를 안전하게 육지로 인도하신다.

 

세상의 지식과 경험은 자기 이익을 위한 것

 

선원들과 군사들의 최우선 가치는 자신들의 안녕이었다. 이들의 모습은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과 태도를 대변한다. 평소에는 이타적이었다가 위기가 되면 이기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사람의 이타적 행위도 선한 행위가 가져올 축복을 염두에 둔 것이기에 결국 뿌리는 이기적 소망이다. 또 이타적 행위의 동력은 사람의 신념이다. '그래야 한다', '그러는 게 맞다'라는 생각이 이타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적어도 본능이 그런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무 일이라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능>은 다르다. 이 본능은 그 자체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본능이다. 십자가를 지는 게 무엇인지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리스도라는 본능의 이타적 성격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구원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심판하자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게 그리스도라는 본능이다. 그리스도는 천국에 가서 복을 받겠다는 신념으로 노력하는 이타심이 아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본능이 자신과 사람을 구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를 지는 건 사망이고, 세상에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건 곧 패배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조롱처럼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다. 바로 그리스도라는 본능으로 거듭난 사람이 나오는 게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는 유일한 목표라는 사실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18:19)

 

높고 위대한 걸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세상을 지키고 또 나아지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기특한 생각에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다. 그건 세상을 사람이 만든 게 아니며, 자기 선택으로 이 세상에 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것도 아니고,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오히려 자기는 그 세상에 속한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작 이 세상을 지키는 건 낮아지는 게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경험이나 이기적 시도가 바울 사도 일행이 탄 배에 있는 사람들을 구한 게 아니다. 이들을 구한 건 사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세상을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세상에 있는 한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을 얻는 것이다. 즉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의인 열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시려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열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뜻의 수명이 아직 남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부른 계획이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육신의 삶이 남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자기 운명을 예견하거나 예지했다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주는 확신이다. 하나님의 뜻인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인은 어지간하면 이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 육신이 된 말씀이 내재한 그리스도인과 함께 위험에 처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은혜를 받는다. 사도 바울과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이 여기 속한다. 또 크게 보면 오늘 사람들이 세상을 안녕히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세상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고, 또 그들로 인해 멸망하지 않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 또한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기를 하나님의 계획 덕에 기회를 받은 것이다.

 

이건 신앙적 자부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있어 망하지 않은 세상에서 얻은 귀한 기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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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26)

바울 사도가 아그립바 왕과 총독 앞에서 변론을 마치자, 왕과 총독은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방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 사도의 희망대로 로마로 가서 재판받도록 한다. 그렇게 시작된 바울 사도의 여정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후 어렵게 로마로 가서 황제의 판단을 받기까지 비교적 자유롭게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다.

 

바울 사도 일행은 배를 타고 로마고 출발한다. 가는 중간에 바람이 여의찮아 그레데 지방에 잠시 머물렀다가 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바울 사도는 금식하는 대속죄일 시기인 9, 10월에는 폭풍이 많이 있으니 좀 머루다 가지 않으면 크게 손해가 날 것이라고 했지만 선원들은 당장 남풍이 순하게 부는 것을 보고 출항하자고 했고 책임자인 백부장은 바울 사도의 말보다는 선원들의 말을 듣고 출발한다.

 

이 사건 속 백부장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 사도의 말과 배를 타는 것이 생업인 선원들의 말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선원들의 말을 신뢰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배가 출항하자 얼마 되지 않아 바울 사도의 말대로 큰 폭풍을 만나 배가 위태하게 되고, 결국 배에 있는 기구들을 모두 버리면서 버티지만 결국 배가 난파하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은 믿으면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세상의 지식보다 온전하다는 건 믿지 않아…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이 세상은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실수도 없이 공평하게 경영하고 계신다는 걸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와 뜻이 밝은 사람의 생각이 세상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경험보다 더 온전하다는 걸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아는 건 일의 원리를 아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원리인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사람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백부장은 사도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나님의 의와 뜻보다 세상의 경험을 신뢰했고, 죄인으로 끌려가는 바울이 하나님(백부장 입장에서는 신)의 의와 뜻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 말을 듣지 않는 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로 로마로 가는 바울 사도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는 참담했다.

 

우리의 미시적 일상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굳이 가늠하지 않아도 된다. 짜장면을 먹을 것인지 짬뽕을 먹을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어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라면,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온전한 삶이다. 모든 죄를 사함 받은 하나님 아들의 어떤 결정이 죄가 되거나, 온전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를 아들로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이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단순한 상식적 논리 앞에 늘 '말이 그렇긴 한데?'라고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그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게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결정은 언제나 온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살아가며 세상을 보면 세상의 모든 게 선명해진다. 그 선명한 이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소리, 쥐뿔도 없는 주제에 하는 술안주 같은 소리처럼 들린다. 행여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밝은 사람이란 걸 인정한다고 해도 세상일의 결정을 그에게 맡기는 건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내 앞에 있는 특별할 것 없는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걸 인정하려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어야 한다. 이건 암구호와 같은 이치다. 진정 거듭나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알고 세상사를 경정한다는 게 무엇인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법으로 결정하는지를 모른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모든 일을 십자가의 법에 따라 순종한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씀 속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목적이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의 살아가는 법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자신이 더 옳은 가치를 가지고 있어도, 상대가 자기가 가진 의를 알지 못해도 상대의 의에 육신을 내어준다. 육신을 내어준다는 건 군주국가에서 의를 가진 왕은 말만 하면 되고, 그 의를 따르는 신하와 백성이 육신으로 준행하는 것과 같다.

 

이런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아니 나를 따르라"라는 식의 삶을 살지 않는다. 아니 본능상 그럴 수 없다.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의 본성인데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지식과 기술과 경험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어도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반하여 그대로 행하면 큰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면 자신이 순종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자세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출항하면 큰 위험을 만난다는 걸 알고 말했지만 듣지 않는 백부장과 선원들의 뜻에 '하나님의 뜻이 그렇지 않으니 가면 안 된다'라며 몽니를 부리거나 협박하거나 위협하거나 거절하지 않았다. 죽어서는 안 되지만 죽임당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뜻을 순종하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떤 결정이라고 온전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첫 번째고, 다음으로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생각과 지혜가 세상의 지식과 기술과 경험보다 온전하다는 걸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는 어떨까? 그렇게 하자고 누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서로 낮은 마음으로 섬길 것이다. 모두 이런 삶을 꿈꾸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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