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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육신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5. 5. 11:00 Writer : 김홍덕

육신에 대한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 차이

기독교인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우리 육신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에 관한 관점은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다. "육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신앙과 무슨 상관?"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과 사람은 육신을 보는 관점이 극단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순종하고, 사람이 하나님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과 극단적으로 다르게 생각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가 분명하다.

 

자기 육신에 관한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부족하고, 성경대로 살기에도 부족하며, 자기의 의지를 실천하기에도 연약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목적에 너무나 적합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만족해하셨다.

 

사람은 육신을 가진 자기 모습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에 채울 수 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정작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창조 목적에 너무 합당하다고 생각하신다. 이런 엄청난 차이가 있음에도 기독교인들은 육신을 보는 관점을 교정하기는커녕 이걸 문제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육신을 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먼저 사람의 관점을 정리해 보면,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은 육신을 가진 체로는 성경대로 살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성경대로 살 수 없다는 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도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람은 이 정도로 육신을 부정하고 연약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더 놀라운 건 이런 분명한 모순과 상충을 알면서도 구원은 또 받았다고 믿는 것이다. 부정하고 연약한 육신으로 살면서 정결하고 죄 없는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 그 자체다.

 

반면에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은 육신을 연약하게 보시지 않는다. 강하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본다면 연약한 게 명백하지만,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보면 보시기에 심히 만족스러운 게 우리 육신이다. 하나님께서 무능하다고 믿을 게 아니라면 자기가 정한 목적도 달성하지 못할 존재를 창조해 놓고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는 말씀과 자기 생각이 다르다는 걸 유의해야 하는 게 마땅하고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강하고 위대한 하나님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게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고자 하는 성품이 강함과 위대함이라면 사람은 분명 연약하며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기에 부정한 존재인 게 틀림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실패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강함과 위대함이라는 하나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그것도 육신을 이용하여 섬기고, 겸손하며, 사랑하며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 하신다.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려는 하나님의 성품은 십자가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런데 사람은 강하고 위대함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육신으로 사는 삶은 부족하고 연약해서 그 뜻을 이루기에 부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성경 전반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갈등하는 주된 이유다. 일단 시작부터 그랬다.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고 보니 자기 육신으로는 하나님처럼 위대하고 강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어 부끄러워 숨었다. 호기롭게 도전장을 냈다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꼬 도망친 격투기 선수와 같은 모양새다. 문제는 하나님은 그걸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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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고 본이 되었다는 점을 많이 칭찬한다. 당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를 비롯해 널리 퍼져있던 유대인 중에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고난을 이기고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처럼 본받은 사람들이 되었음을 보증한다. 이런 훌륭한 믿음 때문인지 2장 마지막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전한다.

 

우리는 다시 핍박하는 이유를 상기하고자 한다. 특히 데살로니가 전서 2장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와 선지자를 죽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 게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과연 오늘날 유대인은 누구며, 오늘 복음을 핍박하는 건 어떤 모습인지, 그게 나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유대인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인들은 자기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복음 시대에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께 책망받는 성경 속 유대인들은 구약시대에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제대로 된 착각이다.

 

이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회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회개하는 잘못은 모두 자기의 잘못되고 불순종한 행동이다. 하나님께 잘못된 행동을 회개한다. 이렇게 행위로 범한 죄를 용서받고자 한다는 건 행위로 의하여 불의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행동을 의의 기준으로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이며,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믿음이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 이걸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은 복음을 핍박한 유대인들과 같은 신앙이다.

 

기도할 때 자기 행위를 하나님께 회개하는 사람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신앙은 행위가 의로워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믿는 신앙이 분명함에도 단지 자기가 사는 달력으로 시대가 AD라는 것만 보고 자기 신앙을 복음으로 착각한다. 무엇으로 의로워지려 하는지 살피지 않는다. 신약에 있는 말씀이라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그러다 실패한 모습을 회개하는 일이 반복하고 있다면 그건 누가 봐도 분명히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임에도 자기 신앙은 복음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신앙은 그 자체로도 심각한 문제지만, 자기와 다른 사람을 핍박한다는 것 역시 문제다. 비중으로 따진다면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핍박한다는 건 자신만 망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앙을 오염시키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을 핍박하여 고난받게 한다. 이게 이번 주제다.

 

그냥 생각하면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을 가졌다고 핍박하는 사람이 된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핍박은 명백히 가치관의 충돌이며, 충돌하는 두 부류 중 더 많은 사람이, 그러니까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따르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배척하고 조롱하며 압박하는 게 핍박이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엔 복선이 있다. 바로 행위로 의로워져서 행위의 주체인 육신의 평안을 소망한다는 점이다. 행위와 외모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기에 그 본질인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이 축복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 축복을 얻으려면 당연히 본질인 육신의 행위가 의로워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육신의 행위가 의롭지 않으면 인생의 소망인 육신의 평안함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경계하고 그런 사상과 사람을 멀리하고 핍박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신앙이 그렇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는 이들을 보고 그냥 두면 자기의 신앙과 육신의 평안을 헤칠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자기들과 다른 신앙을 전하는, 게다가 선한 사람이 날 수 없는 나사렛에서 온 가난한 목수의 아들 주제에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그릇된 신앙은 위험하다.

 

세상의 평안과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믿는 이들에게 복음은 아주 위험하고 배척해야 하는 도다.

 

이 신앙은 세상의 평안과 성공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높고 귀하고 좋은 것으로 믿으며 이를 추구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이걸 구하고 있다는 걸 부인하면 안 된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말은 경건한 것 같지만, 실상은 행위로 의로워져서 세상의 평안을 누리겠다는 그릇된 신앙 고백이다. 하지만 온전한 신앙이라면 낮고 천한 십자가의 존귀함을 알고 그렇게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길 소망한다. 그 십자가를 지는 게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세상이 귀하다고 여기는 걸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면, 소망하는 바를 얻지 못하거나 빼앗기게 되는 일을 염려한다. 그래서 행동을 경건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에는 세상이 귀하다고 여기는 걸 소망하지 않는 믿음을 배척하는 게 포함된다. 결국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걸 추구하는 신앙은 그 자체로 복음을 핍박하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신앙을 가진 핍박하는 자들인데 오히려 핍박받는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어두움에서 벗어나려면 자기가 세상이 귀하다는 걸 얻기 위해 성경대로 행위를 바르게 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사실 이건 어려운 게 아니다. 평생을 노력하면서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돌이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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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기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4. 29. 08:55 Writer : 김홍덕

기도하지 않는 신앙은 없다. 믿는 신이나 신앙의 부류를 막론하고 기도는 다 한다. 심지어 신앙의 대상 없이 사는 사람조차 간절한 순간에는 기도한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나 기도하고, 어느 순간이든 기도하는 존재다. 사람이 이렇게 기도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은 사람에게 없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한다. 다만 무엇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부족함은 목적에 종속된다. 목적에 따라 부족한 게 달라진다. 잔이나 그릇은 목적에 따라 모양이 다르고 채워지는 게 달라진다. 성경은 사람을 질그릇이라고 말씀한다. 무언가를 채워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다만 무엇을 채울지는 또 다른 문제다. 인생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구하고, 땅의 성분인 흙으로 빚은 질그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늘의 뜻을 구한다.

 

흙으로 창조된 질그릇 같은 사람에겐 하늘의 뜻이 부족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아들로 오신 예수님도 사람에게 기도가 필요하고, 기도해야 하는 부족함과 갈증이 있음을 아셨다. 다만 사람은 구하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들을 부족하게 여기고 구하나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를 아신다고 하셨다. 자동차 주인이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듯이 창조하시고 주시는 이가 알고 있다는 건 부족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달리 생각하고 있다.

 

여전히 같은 걸 구하고 있다는 건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먹을 걸 간구한다는 걸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구하고 있다는 건 아직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먹을 것은 항상 필요한 것이기에 항상 구해야 한다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항상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상 믿음의 문제인데, 눈만 감으면 육신의 필요를 구한다는 건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는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니 항상 하나님께서 부족하지 않다고 하시는 것들을 구한다. 거의 모든 교회 예배 시간에 건강과 사업과 자녀들의 성공 그리고 육신이 속한 나라와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구하는데 그건 하나같이 아직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얻은 것을 이렇게까지 꾸준하게 구할 리는 없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약 4:3)

 

생각이란 게 있다면, 이렇게 꾸준하게 기도하고 있다는 건 얻지 못했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더 현명하다면 기도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건 하나님께 구하는 게 아닌가?'라고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분명히 그건 이방인, 곧 하나님의 의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기도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얻지 못했다는 건 정욕을 구한 것이라고까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걸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건 진정한 어두움과 어리석음이다.

 

여전히 구하고 있다는 건 얻지 못했다는 것이고, 얻지 못했다는 건 육신의 정욕을 위해 구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사람에겐 반드시 기도하고 구해야 하는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예수님께서 기도로 가르쳐 주실 정도로 부족한 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그건 바로 우리의 존재 목적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라는 주기도문은 이 하나를 구하는 기도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건 존재 목적을 위해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는 뜻이지 육신의 필요를 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기도하고 간구해야 하는 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인 이상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일 수밖에 없다. 만약 사람이 이걸 스스로 알 수 있다면 굳이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사람은 물론이고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자기 존재 목적을 스스로 알 수는 없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심의 위대함을 아울러 알 수도 있다.

 

다행히도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 목적을 숨김 없이 아주 밝히 말씀하셨다.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사람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늘 말씀하신다. 그러면서도 그걸 강제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 순종하길 기다리시는 긍휼도 함께 베푸신다. 성경의 시작부터 창조 목적을 밝히 말씀하시고, 그래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들, 곧 그 뜻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를 보내서 십자가에 높이 달아 그 목적을 보이셨다.

 

그 뜻은 다름 아닌 십자가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며, 우리 삶의 목적과 의미다. 이건 십자가에 달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과정과 모습 속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우리가 가져야 할 본성이라는 뜻이다. 높고 높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므로 전하고자 한 뜻은 하나님 안에 있는 낮고 겸손하며 섬기는 마음을 사람이 표현해 주기를 바라서다. 우리는 하나님 속에 있는 낮고 섬기고 사랑하고 긍휼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시는 하나님 아들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 안에 있는 낮아지고 섬기는 성품을 표현하는 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진 존재가 되기를 구해야 한다. 그 마음이 땅에 이루어져야 하는 하늘의 뜻이다. 땅은 사람이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건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건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는 게 아니다. 본성은 생명 정체성이므로 생명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아는 건 기도의 의미를 깨우치는 단편적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께 내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간구한다는 건 많은 게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나는 존재 목적을 모른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그걸 모르고 살아온 삶이 하나님 앞에 죄악이란 걸 깨닫고 고백해야 한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고 살았다는 것과 그게 죄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나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걸 믿지 않고 그걸 하나님께 구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바른 기도는 신앙의 모든 것이다. 어긋난 시작을 바로 잡는 기회이자 간절함이다. 순종과 회개가 아우러져야 온전한 게 기도다. 밥 달라고 기도하는 건 정말로 이방인의 간구며 부끄러운 것임을 알고 몸이 떨리는 수치스러움을 느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육신의 삶에 필요를 구하는 건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목적을 구하는 것

 

우리는 이제 기도에 관해 다르고 바르게 알아야 한다. 더 이상 이방인의 간구는 없어야 한다. 매일 구하는 건 얻지 못한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깨달음도 있어야 한다. 아직 얻지 못했다는 건 바로 구하지 못함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알아야 하는 건 우리가 구할 것은 하늘의 뜻, 곧 나를 창조하시고 삶을 주신 목적, 그것이다. 그걸 구하는 게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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