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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는 보기 드물게 책망보다 오히려 바울 사도가 위로를 받은 내용이 많다. 많은 환난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바울 사도에 대한 신뢰가 컸으며, 지역 성도들의 본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아들처럼 여기는 디모데를 대신 보냈다. 디모데를 통해서 행여 환난으로 인한 낙심이라고 있을까 확인했는데 오히려 굳건한 믿음에 위로를 받았다고 화답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바울 사도의 관계는 사도와 성도들은 이상적인 관계다. 귀한 복음을 섬기는 마음으로 전했고, 성도들은 그 복음을 진심으로 믿었다. 서로가 서로의 보증과 위로가 되는 진정한 관계가 형성됐다. 이는 바울 사도는 복음의 본질을 바로 전했고, 성도들은 그걸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살전 3:8)

 

복음은 놀라운 면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당연히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데 막상 그 내용을 보면 낮아지고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세상이 가진 개념과 상반된다. 세상은 귀하게 여긴다면 귀하고 높이 대하는데 복음은 그렇지 않다. 존귀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세상에서 가장 귀한 마음으로 열어보니 낮아지고 섬기는 것임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바울 사도는 존귀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존귀함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일면 자기가 성도들의 대접을 받을 충분한 명분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는 그런 자격을 행사하지 않았다. 복음의 귀함은 바로 낮아지고 섬기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낮아지고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이고,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살전 2:7)

 

복음은 정말로 존귀하다. 진정으로 거듭난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의를 하나씩 알아갈 때는 마치 머리에 누군가 사이다를 쏟아부은 것처럼 생각과 삶에 큰 청량감과 감동과 만족과 감사와 기쁨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계획을 사람을 위해 행사하신다는 놀라움에 놀라고, 존귀한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그 감동을 진정한 존귀함으로 여긴다.

 

그래서 대부분은 복음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이를 모르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대비하여 자기를 존귀한, 최소한 존귀함을 간직하고 선택받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런 자부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자 하는 동력으로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고 죽는 순간까지 잊으면 안 되는 게 있는데, 그 귀한 하나님 복음의 본질은 낮아지고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복음의 가장 근원적 본질은 낮아지고 섬기고 겸손하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

 

앞서 언급한 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바울 사도의 관계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그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온전한 관계다. 복음 본질을 바로 알고 전하고, 그 복음이 온전하다는 걸 알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관계다. 이 관계는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 보증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그 복음을 받아 거듭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관계는 일반적인 관계처럼 보인다. 전하는 사람이 거저 주는 것으로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복음을 들은 사람이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복음을 전한 사람의 위로와 보람과 의미와 양식이 된다. 복음을 전한 사람을 살리고,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삶의 동력이 된다.

 

복음은 온전한 만큼 제대로 전해졌다면 사도와 성도 관계는 온전할 것

 

이런 온전한 관계가 되려면 앞서 언급한 대로 복음의 본질이 온전해야 한다. 즉 귀한 복음의 실체가 낮아지고 섬기고 겸손하며 사랑하는 것이라는 게 잊혀선 안 된다. 온전한 복음이 전해지고 그걸 듣고 살아가는 관계가 온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요즘 시대로 표현해서 목사와 성도들 간의 관계가 늘 개선점이 있고, 더 나아지기를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는 상태라면, 그건 복음이 온전하지 않아서거나 드물게 마음 밭이 온전하지 않아서 그렇다. 온전한 복음이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사람에게 전해지면 온전한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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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영성 훈련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5. 12. 07:13 Writer : 김홍덕

존재론적 신앙은 '행위는 무관하다'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떤 존재로 설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걸 전하면서 많은 도전을 받은 논쟁이다. 대표적인 게 여러 차례 언급한 "거듭나기만 하면 도둑질해도 괜찮단 말이냐?". 사실 이 반문은 거듭난 세계를 모르기에 하는 소리다. 거듭난 생명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영성 훈련은 사실 이것과 같은 맥락이다. 거듭나면 노력과 영성 훈련이 무의미한지에 관한 고찰은 존재론적 신앙 안에서 중요한 문제다. 이 주제는 거듭난 사람들끼리의 대화 주제지만, 이 문제 역시 불분명한 신앙적 사안이므로 선제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영성 훈련은 거듭난 생명에게도 필요하다. 사도들도 성경의 여러 서신에서 분명히 권면하고 있다. 영성 훈련은 우리 신앙의 자세인 게 분명한 것이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게 있다. 훈련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훈련해서 수영할 수는 있어도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하고 훈련해도 장비 없이 날 수 없다.

 

훈련으로 자랄 수 있는 생명의 본성이 있어야 훈련으로 자랄 수 있다.

 

훈련으로 성장하려면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본성이나 역량이 내재해야 한다. 달리 표현한다면 DNA가 훈련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훈련으로 물속에서 숨을 참는 시간을 다소 늘릴 수는 있지만, 훈련으로 물속에서 숨을 쉴 수는 없는 건 우리 유전자가 그렇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훈련 역시 자라날 영적 본성이 있을 때 의미가 있고, 장성할 여지가 있다. 애초에 없는 걸 훈련으로 장성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엡 4:1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라'라는 말씀으로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잘해서 예수님의 성품에 가까워지도록 장성하라는 말씀인데, 장성한 그리스도가 되려면 먼저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로 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이를 수는 없다.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 유전자가 없는 생명이 물속에서 숨을 쉴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성품들, 기도와 성경을 아는 것과 지혜와 삶의 경건은 모두 훈련과 노력으로 자란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성품들이 장성하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다. 다만 이런 성품들은 모두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의 성품이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아무리 훈련해도 장성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겪는 실패에 더 각성하고 다른 다짐과 방법으로 다시 시도하는 걸 훈련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무덤 같은 부정한 자기 행위를 감추려 회칠하는 것과 같다. 10년 전에 했던 음란한 생각을 오늘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노력한다고 횟수나 주기가 개선되지도 않는다.

 

성경대로 살려고 행동으로 노력하다 겪는 실패와 반복은 영성 훈련이 아니라 자기 더러움과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것.

 

이는 행위를 의롭게 하려는 노력과 실패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며, 단지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다 실패한 것일 뿐이다. 율법적인 신앙은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신앙이므로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신앙인들이 경험하는 일반적인 실패와 반복은 훈련이 아니라 성장도 회복도 없는 노릇과 외식일 뿐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영성 훈련은 성령으로 거듭난 영이 있는 사람에게 의미와 효과가 있는 것이지 행위를 의롭게 하려는 노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나야 영성 훈련을 통해 더 그리스도다워지고 장성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지,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걷기까지 수백, 수천 번의 실패를 극복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중요한 건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본성에 따라 걸으려고 하는 것이며, 또 아기가 걸으려고 노력하다 넘어진다고 해서 개나 고양이가 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은 그리스도로 장성하는 과정에서 겪는 실패와 실수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영혼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율법적인,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인은 자기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지나 않을까 항상 염려한다. 행여 그릇된 행위가 있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거라 믿는다. 그래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 용서해 달라'라고 기도한다. 자기가 지은 줄로 모르는 죄를 어떻게 시인하고 자백한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생각처럼 성경대로 살려다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과정에서 늘어나는 요령의 성장은 영성 훈련이 아니다. 행위로는 의로워질 수 없기에 결론적으로 타협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성경을 모두 지키며 살 수는 없다. 단지 노력할 뿐이다.'와 같은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영성 훈련은 중요하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사도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로 자라기를 힘써 노력해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답지 못한 일, 하나님의 성품을 바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부족했던 일을 돌아보고 내일 다시 그런 상황에서는 더 그리스도답고 하나님 아들답기를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영성 훈련으로 자란다는 걸 스스로 알아 …

 

겉으로 보기에는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모습 같아도, 영성 훈련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노력이므로 생명의 과실인 열매가 있다. 또한 어제와 다르다. 날마다 새롭다. 어제는 넘어졌지만, 오늘은 걷게 된 아기처럼 어제는 하지 않았고 하지 못했던 그리스도다운 모습으로 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안다. 다만 이 모든 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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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는 3장까지 바울 사도의 칭찬이 이어진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많은 환난과 고난을 겪고 있음에도 다른 교회의 성도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고 있다는 걸 높이 사고 있다고 칭찬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고난을 인내할 수 있는 건 성령의 능력인 동시에 복음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라는 보증을 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

 

데살로니가 교회가 고난을 이겨낸 바탕에는 바울 사도 일행을 진정한 하나님의 사도로 대한 마음이 있다. 한편 바울 사도 역시 사도로서 대접받는 게 무례한 일이 아니지만 바울 사도 일행은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런 상호작용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고난을 이기게 했고,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관계로 만들었다.

 

이는 바울 사도의 공치사가 아니다. 고난을 이기고 본이 되는 좋은 신앙의 시작은 복음을 받는 자세와 밀접한 영향이 있다. 당연히 복음을 귀하게 받들어 받으면 그 귀한 마음만큼 귀한 믿음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복음을 귀하게 받지 않는다면 귀한 믿음에 이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십자가의 구원이 이를 증명한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사람을 각성시켜 구원을 베푸시는 게 아니라 몸소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심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을 귀하게 여긴다는 건 복음을 전한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에 비례한다고도 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 사도와 동역자들을 그렇게 대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자신들이 당한 고난보다 분명 복음을 귀하게 여겼고, 복음을 전한 사도들 역시 고난보다 귀하게 여겼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그리 귀하게 얻지 않는다. 교회에 가면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정확히는 착각이지만) 종교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면 오히려 대접받고, 얼마 가지 않아 마치 교회에 다녀 주는 것처럼 주인 행세를 한다.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런 세태는 교회에 원초적 책임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목사로 한정하는 듯한 문화를 형성한 탓이다. 교회의 제도는 목사가 복음을 전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인식을 주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듣는다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목사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구도 때문이다. 복음은 시스템적으로 전해진다고 생각하게 만든 교회에서 복음을 귀하게 여기긴 어렵다.

 

그렇다고 목사가 사도인 것도 아니다. 비판적으로 들리겠지만 이제는 분명히 직업이다. 목사 역시 교회에서 직위로 군림하고 있다. 성도들이 신앙에 관해 의문을 가지는 자체를 차단하고, 성경과 신앙에 관해서는 자기 의견을 따르라고 가스라이팅하고 있다. 심지어 주보에 다른 신앙적 관점과의 접촉을 경고하기도 한다. 성도들이 의문을 가지지 않도록 밝히 말하고 있다면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천지 금지 포스터를 당당하게 교회 곳곳에 붙이고 있는 건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소 장황했던 현실 풍자적 이야기들의 주제는 사람들이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인식되는 목사의 설교는 제도의 일환이고 심지어 직업적 행위로 인식될 뿐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복음을 깨닫고, 얼마나 간절하게 전하려고 하는지가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는 복음의 귀함을 알 수 없다.

 

성도들,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의 관심은 교회가 말하는 신앙을 이용하고 기생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생각뿐이다. 자기들이 바라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안녕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설교하는 설교자들의 말에 성공과 안녕에 대한 자기 소망의 명분을 기대고 있을 뿐, 이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릴 정도로 귀하고 값진 것이다. 원래는 복음이 아주 쉬운 것이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뜻은 사람에게 너무 적합하기에 사실 쉽고 가볍고 즐거운 일이다. 예수님께서도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하셨다. 그렇게 가볍고 당연한 게 자기 의로움으로 자기 인생을 살려는 사람의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 멀고 어려운 일이 되었고, 그걸 돌리는 건 쉬운 게 어려워진 만큼 되레 어려운 일이 되어,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야 회복될 정도의 일이 되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복음을 깨닫고 전할 지경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그 어렵고 먼 길을 온 것이다. 원래는 쉬운 일이었는데,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자기 의로움을 좇아 사람 힘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된 게 하나님의 뜻이다. 복음은 그렇게 무화과 나뭇잎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몸소 어린 양을 잡아야 회복될 정도로 어렵게 된 상태에서 돌아오는 여정을 거쳐 깨닫는 것이다. 성경은 그 돌아옴이 생명이 바뀌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걸 <거듭남>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은 가볍지 않다. 매우 귀하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되었다는 걸 알면 이 귀함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시작된 복음이다. 이게 어찌 귀하지 않을 수 있나? 이건 제도화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세상에서 성공하고 안녕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받을 게 아니다. 하나님 아들이 피를 흘려야 할 정도로 귀한 것이다. 그걸 전하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과 바꾼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걸 깨닫는 사람 역시 자기 인생 전부와 바꾸어 얻은 게 복음이다. 밭에서 귀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전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산다는 비유를 가볍게 여길 게 아니다. 하지만 복음을 알고 나면 복음과 바꾼 자기의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의 것이고 복음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렇게 깨달은 복음은 낮아지는 게 본성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자기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전한다고 고백한다.

 

바울 사도는 그 마음과 본성으로 복음을 전했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 귀함을 알았다. 그렇게 귀함을 알기에 고난과 바꿀 수 없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깨달음 복음은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어서 본능적으로 고난과 바꿀 수 없었다. 오늘 우리 역시 이런 복음을 깨달아야 한다. 다만 이 복음은 그 귀함을 모르는 자들에겐 세상의 성공과 안녕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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