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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곳곳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우리(하나님과 예수님)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17:22)"라고 기도하셨다. 십자가를 지시는 이유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1,22)

 

이 요한복음 말씀 외에 바울 사도 역시 로마서, 고린도전서, 에베소서 등에서 우리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과 하나가 되고 그 안에 거해야 한다는 걸 말씀하고 있다. 이런 말씀들을 볼 때,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이유가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온전한 구원의 상태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구원을 받은 것

 

그렇다면 과연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관해 사람들은 분명 의심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을 믿는 거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하고 믿는 건 완전한 모순이다. 그건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구원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구원은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는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건 하나님의 정체성과 우리 육신의 존재 목적 그리고 하나 된다는 본질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씀에 대해 묵상하고, 자기가 하나님과 하나인 걸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육신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 사랑과 겸손과 섬기는 마음을 표현하시려는 목적으로 창조된 존재임을 설명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을 연약하고 부정하게 보지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육신이 창조 목적에 너무 합당하다고 보시며 심히 만족하셨음을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강하고 위대한 것만을 의로움으로 여기는 신으로 믿고, 사람도 강하고 위대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 또한 설명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강하고 위대하게 되는 걸 하나 됨이라고 착각해

 

이 설명을 이해했다면 사람이 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고 믿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강하고 위대한 데 반해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완전히 이질적인 두 존재는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지 않은데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느냐고 생각하며, 그것이 합리적이고 겸손한 마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육신에 관한 이야기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강함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강하고 위대해지는 방향과 기준으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고, 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와 그렇게 하나가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질투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같은 맥락이다.

 

또 하나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의 바탕에는 하나 된다는 데 대한 그릇된 이해가 있다. 하나가 된다는 걸 무조건 동질의 개체가 된다는 것 내지는 동질의 개체로서 하나가 되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부부가 하나가 된다는 개념을 이해하는지 알 수 없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가 된다는 건 내용과 형식의 일치지, 개체의 합쳐짐을 말하는 게 아니다.

 

쉽게 설명하면, 콜라는 콜라병에 담김으로 하나가 된다. 그렇게 콜라가 콜라병에 담기는 순간 콜라병은 콜라가 된다. 콜라를 건네받을 때 병과 콜라를 하나로 보고 콜라를 달라고 하지 병은 말로 콜라 액만 달라는 사람은 없다. 콜라가 콜라병에 담기는 순간 콜라병은 콜라와 하나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뜻이 사람 안에 거하게 되면, 그것도 생명의 본성이 되는 게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신이 되어 하나님과 하나의 존재로 병합되는 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하나 됨이 아니다. 결국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해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된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건, 하나님의 의와 뜻이라는 내용이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사람 안에 거하게 되는 것

 

성경은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정의한다. 콜라로 비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한 형식으로 창조된 사람이라는 그릇()에 거하시면 당연히 사람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 특히나 하나님의 의와 뜻이 물리적으로 거하시는 게 아니라 거듭난 생명의 <본성> 곧 유전자로 거하시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나가 됨이고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본성으로 거듭나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않고 구원을 얻거나 하나님을 믿거나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다. 이걸 노력해야 하는 걸로 말하고 설교하고 가르친다는 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근본 하나님의 의도를 아예 모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진 사람을 위한 단 하나의 내용이다. 콜라가 담기지 않은 콜라병은 아무것도 아닌, 그냥 공병일 뿐이듯,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되지 않은 사람은 육신이 숨 쉬고 있어도 목적의 관점에서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내 본성이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그건 곧 거듭남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도, 성경대로 사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남도, 하나님과 하나 됨도 모두 하나의 사건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고, 그 뜻이 내 생명의 본성이 되는 것, 이게 어떻게 보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제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 창조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강함을 추구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어리석음을 떠나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란 형식의 내용이 되는 법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게 아니면 인생은 무의미해진다. 콜라를 담기 위해 만든 콜라병에 콜라가 담기지 않으면 버려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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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육신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5. 7. 08:58 Writer : 김홍덕

성경대로 사는 삶을 바란다면 육신을 보는 관점의 교정부터

 

우리가 인생을 영위하며 거하는 이 육신은 부정하거나 부족하지 않다. 다른 동물이나 자연에 대비해 상대적인 연약함은 분명하지만, 그건 강함을 판단하는 기준의 문제일 뿐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이룰 때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강하고 위대하다. 전능하신 하나님 성품의 한 측면인 낮아짐과 겸손과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이 육신보다 더 좋고 온전한 건 이 우주에 없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 안에서 가장 우수하다.

 

하지만 사람은 이 육신을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서 보지 않고, 선악과를 먹은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본다. 강하고 위대할 때 이기고, 이긴 것이 선함이라는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심판한다. 그 판결은 연약하고 부정함이다.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래서 육신을 정화하고, 행동을 경건하게 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한다. 이게 바로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본질이다.

 

율법주의나 영지주의 둘 다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관점의 뿌리는 같다.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사람의 관점은 두 가지 방향으로 방법을 모색한다. 바로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다. 율법주의는 앞에서 말한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육신이 연약하고 부정하니 육신의 행동을 정화하고 경건하게 유지하여 의에 이르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심령과 마음과 의도의 부정함은 어떻게 하지 못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부정함은 사람의 판결에 따른 부정함이다.

 

정말로 깨우치기 힘들고 어려운 게 오늘날 신앙인들의 생각이다. 달력으로 신약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자기들의 신앙이 그저 복음인 줄 안다. 분명 자신이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어 노력할 뿐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 생각을 어떻게 하기 힘들다. 신약성경, 아니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행위로 지켜내려고 하면 그게 율법이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부터 시도된 실패한 노력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고 했는데, 이게 신체의 일부를 가렸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했으니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을 감추려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화과는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는 유대인의 나무다.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상통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무화과 곧 율법으로 육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다.

 

이처럼 사람들이 육신의 행위를 경건하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시도의 뿌리는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주신 목적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가 정한 기준으로 육신을 심판한 결과다. 하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게 하나 있는데, 사람의 그런 노력은 아담의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육신은 어떻게 해도 정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영지주의자들이다. 영지주의는 율법주의와 완전히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뿌리는 같다. 육신을 부정하게 보니 육신과 영혼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한 게 영지주의다. 그나마 노력이라는 소모적인 요소가 없다는 측면으로 보면 율법주의보다 나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을 근원적으로 배제했다는 점에서 구원의 실체를 부인하고 있다.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관점은 모든 신앙 문제의 뿌리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관점은 신앙의 모든 문제를 초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육신을 부정하게 보게 되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이야기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표현해야 하는 근본 창조 목적을 외면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의 기능도 상실하게 되고, 향유 없는 옥합처럼 육신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으므로 육신의 어떤 노력이나 삶의 태도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낼 수 없다. 육신 안에 하나님 말씀과 뜻이 없어 목숨을 내어주어도 나타낼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그래서 소용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으로 나아가려면 가장 먼저 우리 육신에 관한 관점을 교정해야 한다. 사람을 통해 그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너무 합당한 육신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런 깨달음은 낮고 겸손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육신이라는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바로 알아야 육신을 바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려면 육신을 보는 관점부터 교정해야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바로 안다면, 선악과를 먹은 자신을 회개하게 된다. 사람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건 거듭나는 방법 외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건 창조 목적을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뜻과 의가 육신이 된 존재로 다시 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유전자가 된 사람의 판단은 하나님 뜻대로 할 수밖에 없다.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이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데 얼마나 온전한지를 본성으로 알고 살아간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이 육신은 보기에, 살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너무 온전하고 보기에 좋은 존재라는 걸 알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거듭난 삶이다.

 

육신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과 같아지면,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이 삶은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지 않는다. 노력은 이루지 못한 자의 정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온전함을 아는 거듭난 사람은 거저 살아갈 뿐인데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사는데 그렇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사는 걸 구원이라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라고 한다. 이 삶을 소망한다면 육신을 온전하게 보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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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성경) 육신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회색성경 Date : 2025. 5. 6. 13:1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목적에 너무나 합당한 사람의 육신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대하고 강한 신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도 강하고 위대해질 때 하나님께서 좋아하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강하고 위대하기만 한 신이 아니다. 오히려 위대하고 강한 하나님은 사람이 만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만나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잘 알 수 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을 때(왕상 19) 하나님께서는 바위를 쪼개는 바람과 지진과 불로 나타나셨지만, 엘리야는 만날 수 없었다. 바위를 쪼개는 바람과 지진과 불 속에도 하나님은 계셨지만, 그런 사람은 사람이 만날 수 없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는 건 곧 죽음이다. 육신이 견딜 수 없어서 죽는 것이기도 하고, 사람은 그런 위대함을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기에 만약 그런 하나님을 만난다면 창조 목적을 벗어난 것이기에 또한 죽음이다.

 

엘리야는 미세한 음성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났다.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하나님, 하나님의 무한 능력 중에서 사람을 향한 계획 안에 있는 사람의 역량 안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낮아지는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해 창조된 사람은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육신은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기에 더없이 훌륭한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만족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위대하고 강해질 때 하나님을 만난다고 믿지만, 위대함과 강함 속에는 사람이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이 위대해지겠다는, 아니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강함이 곧 선함이라는 기준을 스스로 가진 것이다. 이게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과 자신을 강한 게 선하다고 판단하는 자기 기준으로 육신을 약하고 부정하다고 심판한다. 선악과를 먹고서 하나님의 의도와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육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정리해 보면 우리가 거하는 육신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과 다른 건 선악과를 먹은 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신을 하나님과 다른 관점으로 본다는 건 선악과를 먹은 죄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즉 자기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진 죄의 상태에 있는 것

 

이런 관점의 차이를 없애려고 예수님께서 오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에 육신을 내어주시면서 우리도 육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기를 바라신다. 말씀이 육신이 된 육신을 내어주면 그 속에 있는 하나님 말씀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난다. 이걸 보여 준 게 '향유 옥합' 사건이다. 그래서 '향유 옥합'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함께 전해질 거라고 하셨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옆구리를 찌르니 물(말씀)과 피(생명)가 드러났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생명이 무엇인지 드러난 것이다. 이걸 보고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아들을 알 수는 없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신을 내어주니 속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 하나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다.

 

육신을 내어준다는 건 헌신한다는 것이며, 희생한다는 것이며, 대신 수고한다는 것이며, 내 안에 창조주 하나님의 의가 있어 의로운 사람인데도 세상 가치에 매몰된 사람의 주장이 옳다고 순종하는 것이다. 바로 이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이자 목적이며 우리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며, 우리 육신의 사용법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건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우리 육신은 온전하다. 우리가 늙지도 않고, 수고하는데도 힘들지 않고, 희생해도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건 슈퍼맨이거나 신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없어서 육신을 약하고 세월과 함께 쇠약해지게 만드신 게 아니다. 내가 가진 유한한 것으로 남을 섬기고 자기 옳다는 생각에 빠진 사람의 주장에 유한한 육신을 소비하고 내어주는 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고, 사람을 이렇게 창조하신 이유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걸 보여 주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건 놀라운 일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굳이 그랬다는 측면만이 아니다.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묘수기 때문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육신의 목적을 육신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육신으로 그대로 보여 주신 것이다. 낮아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겸손할 수 있는, 그래서 연약해 보이고, 위대해져야 한다는 가치관으로 보면 부정한 이 육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엔 너무 온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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