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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6 – 기업을 얻게 하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2. 7. 21:34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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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 구원은 세상에서 힘들게 하는 인생을 평안으로 이끄는 구원이 아니다. 존재로서 사람이 자기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두움과 죄에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다. 이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보이신 정체성 그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말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이자, 인생의 존재 목적이 밝아진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다. 사람이 태어나면 인류에 속하게 되는 것과 같다. 대학에 입학하면 대학생이 되고, 학교에 속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무리가 바로 거룩하게 된 무리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분이 있는 거룩함이다.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구분이 생기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 이 무리, 이 공동체가 교회다. 건물을 짓고 사람을 모아 교회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는 순간 하나님 나라인 교회에 속하게 된다. 남은 건 그런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만날 때 교회의 형식이 완성된다.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게 하나님 나라인 이유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만나니 그 만남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건 당연하다. 이게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만남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한 목적도 모르는 어두 삶에서 빛으로, 사탄의 손아귀에서 하나님께로 회복된 구분된 사람 중에서 기업을 얻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사명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려 주셨다. 결국 사도 바울이 받은 거룩자 중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성경에 나오는 기업은 상속, 소유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헬라어가 사용된다. 이러한 개념은 부모가 자식에게 상속하는 게 당연한 가치에서 비롯된 말이다. 즉 하나님의 기업을 얻는다는 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 상용구처럼 나오는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말에서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최초의 근거는 어쩌면 주기도문이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일러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그런 개념조차 가져 본 적이 없는 유대인들에게 이건 놀라운 충격이었던 것만 봐도 이 호칭은 놀라운 호칭임에 틀림없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이어받아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전했다. 이는 당연한 이치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장자로 첫 열매가 되셨고,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므로 같은 유전자와 본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중에서 하나님과 나 자신이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정말 본질적인 근거는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형성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기업은 아버지의 아들이 상속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업을 얻는다는 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기업을 얻는다는 건 결국 하나님의 의와 뜻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이걸 성경에 있는 표현으로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 곧 의와 뜻대로 삶을 산다는 뜻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것이니, 성경대로 사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엇을 나타내야 할 것인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셨다.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본성, 육신이 된 말씀인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본성이다. 이 본성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은 자신이 이런 성품을 가졌다는 걸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려고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 뜻이 바로 우리 육신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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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5 – 거룩하게 하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2. 5. 10:28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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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손아귀에서 하나님께로 그리고 죄 사함, 이 하나의 은혜는 사람을 다른 존재, 다른 격으로 바꾼다. 거룩하게 된다는 건 하나님이 보실 때 어두움과 사탄과 죄 가운데 있는 사람과 구별된다. 거룩은 곧 구분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죄인과 하나님 아들은 전혀 다른 격을 가진 사람이다.

 

거듭난 다른 생명으로 구분되는 것이 거룩함

 

사람은 거룩은 경건하고, 청결하고, 더러워질까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성전 기물에 파리가 빠지면 기물이 더러워졌느냐 아니면 파리가 거룩해졌느냐는 거짓말 같은 논쟁을 일으키는 게 사람이 가진 거룩함에 대한 개념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룩은 구분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건 사실 다른 표현도 아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거룩한 물건이 있다면 당연히 다른 것과 구분하여 둔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지를 살피시기에 다른 존재라면 당연히 구분하신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과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 사탄의 권세를 따르는 사람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 죄인과 의로운 하나님 아들, 이 명백한 구분들은 생명체와 무생물의 차이처럼 분명하게 구분하신다. 존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거듭난다는 건 이전과 다르고 세상 가치관을 의로 삼는 사람과 다른 생명이 되는 것

 

존재가 다르다는 건 깊은 의미가 있다. 가장 먼저 한 존재가 자신의 노력으로 다른 존재의 세계로 갈 수 없다. 개가 아무리 노력해도 고양이가 될 수 없다. 존재가 달라지는 방법은 오직 다른 존재로 다시 나는 방법뿐이다. 성경이 굳이 거듭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지 여기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존재적 관점으로 사람을 보신다는 걸 믿어야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알고 믿을 수 있다.

 

거룩함은 개념을 아는 게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핵심은 내가 거룩하게 되느냐는데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 앞에 거룩해진다는 건 나의 존재 정체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두움에서 밝음에 속한 사람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무엇보다 죄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다.

 

구원은 곧 다른 생명으로 구분되는 것

 

잊은 듯 하지만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다. 쉬지 않고 전도 여행을 다닌 긴 인생의 후반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도로 세우신 뜻을 간증하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걸 간절히 전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간절함과 하나님의 뜻은 당시의 사람들만을 향한 게 아니다. 오늘 우리를 향하시는 말씀이다.

 

시대와 무관하게 구원을 얻겠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지금까지와 구분된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란 걸 알아야 한다. 이렇게 구분된 삶은 생명과 정체성이 바뀌는 게 시작이다. 그리고 본성과 정체성이 바뀐다는 건 가치와 안목이 바뀐다는 것이다. 찬송가 가사처럼 이전에 좋던 게 이제는 값 없어지는 변화다.

 

거룩하게 된다는 건 가치와 안목이 바뀐다는 것

 

그렇다면 가치와 안목이 바뀌면 어떻게 되는가? 먼저 필요가 달라진다. 필요가 달라지면 하나님께 구하는 게 달라진다. 소망도 평안도 달라진다. 이전에는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 가치로 귀한 걸 구했지만, 존재가 바뀐다면 세상이란 건축자가 보기에는 쓸모없어서 버리는 돌 같은 가치를 구한다. 이 원리로 내가 안목이 바뀐, 존재가 바뀐 사람인지를 단순하게 검증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기 전이나 하나님을 믿는 지금이나 같은 걸 가치로 여기고 간구하고 바라고 있다면 그건 구분되지 않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다. 당연히 거듭난 존재가 아니다. 이건 너무나 쉽게 오늘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기 전후에 귀한 것이 바뀌었는지를 보면 자기 구원을 알 수 있어

 

바울 사도가 간증하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뜻은 바울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거나, 사도라는 귀한 직임을 받은 사람을 부르는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또 하나님이 바울 사도를 부르시고, 불러서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은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 뜻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가진 뜻 그대로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가진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계획, 이것 하나다. 이 뜻에 순종하는 게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성경으로 말씀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높이 달리게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듣고 보고서 그 말씀에 순종하라고. 그리고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자신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과 다른 삶을 깨닫고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겠다고만 한다면 성령께서 그 마음을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시켜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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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4 – 죄 사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2. 3. 16:43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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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이유는 모든 사람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의 의미까지 살펴봤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유에는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들은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은혜다.

 

앞서 어두움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사탄은 십자가를 지신 낮고 천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생각과 사람이라는 걸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을 인식하는 게 밝음이고,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이 말씀들은 죄 사함의 다른 표현이다.

 

사람은 행위로 죄를 판단하고, 하나님은 존재가 목적 안에 있느냐로 죄를 판단하신다.

 

사람이 생각하는 죄는 성경이 말하는 죄와 다르다. 물과 불처럼 이질적이라기보다 무엇을 죄의 본질로 보는지의 차이다. 사람은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가늠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행위는 존재 본성의 표현이라는 걸 주목하시기에 행위 이전에 존재가 무엇이냐를 죄의 기준으로 삼는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행위를 본질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행위는 본질인 내용의 표현이라고 보신다. 그리고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정체성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물으시는 질문은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은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의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죄라고 여기시는 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벗어난 상태, 하나님이 정한 목적 아닌 걸 삶의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의 어원이 '자리를 벗어나다'라는 의미의 '하말티어라'라는 게 이를 증명한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죄라고 여기시며, 그 죄의 상태에서는 어떤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냥 죄인일 뿐이라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창조한 목적을 벗어난 상태 자체를 죄로 여기신다.

 

이 같은 목적론적 관점에서 죄의 정의는 사실 사람에게도 있다. 매장에서 목적을 가지고 구매한 물품이 목적을 벗어나면 자리를 벗어난 죄로 여긴다. 음식이 상했다는 건 신선해야 하는 자리 곧 정체성을 벗어난 것이고, 방송 신호를 보여주지 못하는 TV는 드라마를 보려는 목적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자리를 벗어난 죄의 존재다. 그런 상태에선 어떤 신기한 기능을 보여줘도 그냥 고장난 TV일 뿐이다. 그냥 죄인이란 이야기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는 거듭남, 곧 구원은 죄는 행위로 범한 죄가 아니라 목적을 떠난 존재로 있는 것일 때 유효하다. 거듭난다는 건 존재가 바뀌는, 다른 생명이 된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행위로 계명을 어기는 걸 죄의 본질로 보신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물으셨을 것이고, 사람을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의 행동을 내가 주목하겠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추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그러나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관점과 다르게 행위로 죄를 가늠하고 판단한다. 회개의 기도가 자기가 행위로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지은 죄'라는 말은 행위로 죄를 범했다는 뜻이다. 성경은 구원받았다는 건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심에도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죄를 회개하는 건 행함으로 지은 죄를 자기 죄로 여기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회개하는 건 행위가 죄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이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대한 대안으로 기독교인들이 선택한 건 끊임없는 성찰과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각성과 성경을 지키는 최선의 노력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만 가지를 지켰다고 해도 단 하나를 범한다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고 일갈하신다.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바라는 사람의 노력은 무쓸모임이 드러났음에도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관하고 있는 건 아주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므로 노력할 뿐'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우리는 죄에 대한 바른 견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아야 하므로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죄를 알고 내가 그런 죄인이었다는 걸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죄는 회개하지 않고, 사람이 가진 죄의 관점으로 자신을 송사하는 죄만 회개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죄를 사함 받아야 하는 것

 

여기서 논하기도 유치한 반론이 있는데 그건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만 회복하면 도둑질을 해도 되느냐?'라는 것이다. 이 반문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도둑질도 하는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사람도 죄를 범한다고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과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자기 행위를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다. 이런 반문이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 정도 논리도 없이 질문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어리석음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이다. 어리석음과 인식의 어두움은 같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기 원하셔서 바울을 사도로 세우셨다. 자기 존재 목적을 떠나 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목적 안으로 회복시키겠다는 뜻이다. 이걸 모르면 어둠이고,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 자기가 삶의 뜻을 정해서 사는 삶은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힌 삶이다.

 

우리는 빠져 있는 죄는 행위로 범한 죄가 아니다. 하나님 앞, 사람의 죄는 하나님 창조한 목적을 떠나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상태 자체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상태다) 이 자리를 떠나 원래 정체성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회개다. 회개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걸 인식하고 자신을 조명하면 많은 게 달라진다.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가 왜 사는지를 모르고 있고, 나도 그 중에 하나라는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인정하고 믿어야 하는 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믿음의 기초 중의 기초 그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라면 나를 창조한 이유인 목적을 가졌을 게 분명하다. 이 평범한 논리만 믿어도 되는데 사람은 이 하나를 믿지 못한다.

 

이렇게 인생의 목적을 모른 채 살아가는 오늘의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시는 은혜를 베풀고 또 바울과 같은 사도들을 세워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나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알려 주셨다. 그것도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그렇게 알려 주신 인생의 목적은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인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사는 이 하나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게 바로 이걸 믿는 것이다.

 

하나님 정한 목적 아닌 나의 의지로 사는 사람이었다는 걸 고백하는 것이 죄 사함을 받는 고백이다.

 

이 믿음이 우리 죄를 사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이라는 빛이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한 나의 모든 삶이 죄인으로서의 삶이라는 게 드러낸다. 그렇게 드러난 나를 인정하는 게 죄를 시인하는 것이 죄 사함을 받는 고백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죄 사함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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