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6장)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존재 목적의 회복이다. 그렇다면 구원 이전의 상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구원도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구원 이전의 상태, 구원이 필요한 상태는 육신이 기준이다. 죄에서 구원받는 것인데, 그 죄가 행위로 지은 죄다. 육신의 행위로 지은 죄에서 받는 구원의 이전 상태는 행위로 죄를 지은 상태와 그로 인한 곤궁한 삶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구원은 행위로 지은 죄와 그 죄로 인한 원치 않는 삶의 상태에서의 탈출이다.
하지만 이런 구원의 개념은 어두움이다. 이처럼 구원의 개념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는 앞서 설명한 대로 어두움이다. 그리고 사람이 이 어두움에 잡힌 상태를 사탄에게 사로잡힌 상태라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즉 어두움의 상태나 사탄에게 속박된 상태나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잡힌 상태나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매몰된 상태는 모두 같은 상태다. 하나님의 관점이 인생의 존재 목적이라는 걸 모르는 모든 상태와 사람은 다 여기 속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뜻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자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 둘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같은 상태 전환이다. 여기서는 사탄의 권세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탄 혹은 마귀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데 이를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다.
사탄에 대한 오해 혹은 무지
사람은 사탄, 마귀를 삶을 괴롭히는 존재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삶에 괴로움을 주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영화를 봐도 알 수 있고, 기독교인의 기도나 일상 대화에서 출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사탄과 마귀(이하 사탄으로만 정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물론 그들의 능력 혹은 영향력은 분명 삶을 파괴하는 것이지만, 그들의 본질적 목적과 정체성은 육신의 삶을 괴롭히는 게 아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사탄을 직접 언급하신 곳이 몇 있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은 금식 이후 시험을 받으신 때와 변화산에 오르시기 전 베드로와의 대화 속에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책망하신 일이다. 그리고 이와 연결된 사건으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한 결심을 사탄을 인함이라 말씀하고 있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였다.(눅 22:3-4)
예수님의 시험 받으신 일과 베드로를 책망하신 일 그리고 부가적으로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간 일은 하나의 이슈로 연결되어 있다. 대게의 경우 연관성을 간과하지만, 이 세 가지 사건은 단 하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핵심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탄의 핵심 전략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조건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율법을 사람이 다 지켜내도록 하고, 육신이 상하지 않다록 하며, 세상의 권세를 추구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게 사탄의 시험 주제다. 이 시험 주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한 행인들의 조롱에 집약되어 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거기서 내려오라"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그리스도라면 초인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세상의 권세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건 조금 뒤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사탄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초인적 인물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게 하는 생각 그 자체
다음으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책망하신 사건을 보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완전 정답을 답한 후 크게 칭찬받은 바로 직후에 예수님께서는 난데없이 "내가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라고 만류했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셨다.
십자가를 지는, 낮고 천한 존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사탄 그 자체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의 일을 보자. 성경의 순서로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하게 된 사건은 향유 옥합 사건이다. 귀한 향유를 깨어 예수님 발에 부은 여자를 향해 사람들이 "가난한 자를 위해 팔아야 하거늘…"이라고 비난했을 때 예수님께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가룟 유다는 '이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아니구나!'라고 확정했고, 그 확신에 따라 그리스도가 아닌 예수는 종과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딱 종의 몸값을 받고 팔아 버렸다.
이렇듯 어떻게 보면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 세 가지 사건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주제가 관통하고 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사탄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데, 그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 육신을 가진 평범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생각, 가치관, 믿음이다. 결국 사탄은 십자가를 지는 예수,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과 그렇게 생각하도록 주입하는 사람과 생각 자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사탄이다.
사탄이 하나님과 대적하는 존재라는 건 누구나 인정한다. 무엇보다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하게 하는 존재라는 건 재론의 여지조차 없다.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연 대해는 사탄이나 귀신의 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하게 하는 모든 건 다 사탄이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하나님과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고 혼돈을 주는 모든 이론과 사상과 믿음과 철학과 그것을 가진 사람이 바로 사탄이다.
결국 어두움에 빠진 상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상실한 채 자기가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인 사람일 뿐 아니라 그 사탄의 생각으로 서로 소통하고 강요하고 동의하며 살기에 사탄 그 자체다. 즉 어두움에 거한 상태, 십자가에 달리신 낮아지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 자체가 바로 사탄이다.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과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게 하기에 모두 사탄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결국 자기 생각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추구하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인 그리스도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망치로 두부를 자를 수 없고, 양초를 받침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존재는 자기 존재 목적대로 사는 것 이상의 행복과 평안과 만족과 성공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 역시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살아 가는 것, 그것이 가장 온전하고 평안하고 행복하며 성공한 삶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온전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사람들은 낮고 천한 모습을 거부했고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 낮은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며 살면 그렇게 바라는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데 이를 배척한 채 살고 있다. 이 상태가 사탄의 권세 아래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바울 사도를 세우신 뜻도 이런 삶에서 사람의 존재 목적대로 살도록 회복하시기 위함이다. 이 하나님의 뜻이 바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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