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2 – 어두움에서 빛으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29. 21:36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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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회심은 사도행전에 세 번 기록되어 있다. 9장은 간증이라기보다 상황을 기록한 것이고, 22장은 예루살렘에서 송사를 받아 간증했다가 폭동 수준의 유대인들 저항에 천부장이 나서서 바울 사도를 보호했고, 마지막으로 로마로 가기 전 유다 분봉왕 아그립바와 총독 앞에서 자기 회심의 과정을 간증한다.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은 각 복음서에 반복되는 부분이 있으나 각각은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을 조명한 반면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관점에서, 마가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성격이 강하고, 누가복음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란 관점이고, 요한복음은 메시아,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에 관한 관점이다) 바울 사도 회심은 한 성경에서 세 번이나 같은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여러 번 자기 간증을 한 것은, 자신의 변화 과정은 자기만의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 반문할 정도의 바울임에도 선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 구원과 광명과 사탄에게서의 해방과 죄 사함과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의 기업을 얻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결국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26:16-18)

 

우리는 흔히 사도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도 바울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신 것>이라고 간증한다. 유대인에게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라고 하면 사실상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 되므로, 사도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은 단지 이방인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계획임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은 이방인만을 위한 부르심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부르심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동일하다. 당연히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핵심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때문이다. 아담에서 아브라함, 다윗과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과 오늘 우리에게까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삶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한결같으시다.

 

그렇다면 어쩌면 다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어두움에서 빛으로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와 모든 사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이유는 먼저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두움은 조명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런 말씀은 쉽게 이해하면서 율법이 행위를 말씀하시는 게 아닌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두움에 관한 시작은 의외로 창세기 시작부다. '흑암이 혼돈한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때 이미 땅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하시니라(창 1:2)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물리적 세계의 창조로만 보는 사람은 주목하지도 않고, 또 설명할 수도 없는 말씀인데, 이 말씀의 의도는 사람이 어두움에 거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빛을 만난다는 전개로 이어지는 말씀이다. 땅은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하늘에 대비하여 일반적으로 사람으로 인식한다. 성경은 더 분명하게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말씀으로 땅이 사람이란 걸 확증한다. 그런 땅이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은 흑암에 놓였다는 건 사람이 어둡고 바른 인식과 인지가 없는 상태라는 걸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을 두고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요한복음도 태초로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이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말씀은 천지창조를 물리적 세계의 창조만으로 한정한 관점으로는 해석하면 오류에 빠진다. 빛이 있으라 하기 전 땅이 혼돈했다는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 듯 성선설, 성악설이라는 의미 없는 논쟁이나 예정론, 자유의지 같은 논쟁을 멈추지 못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태초와 창조는 단지 물리적인 세상의 창조를 한정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위대함을 설명하기 위한 말씀 역시 아니다. 사람에게 있어 스스로 알 수 없는 자기 존재 정체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도록 인도하시고 알게 하시는 게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다.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이라는 일련의 사항들을 이해하기 위해 핸드폰이라는 걸로 비유해 보자. 먼저 사람이 통신과 인터넷 등 정보를 활용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겠다는 의도로 핸드폰을 만든다. 핸드폰 생산 이전에 사용 목적이 먼저 있다. 사람 역시 존재하기 전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한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의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인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먼저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브라함은 물론 창세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의 존재보다 창조하신 목적대로의 사람인 그리스도가 먼저다.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창조에는 목적이 있다. 심심풀이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 보다가 상이나 벌을 주시는 재미로 사시려고 만드신 게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아바타나 로봇처럼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그건 엎드려 절받기일 뿐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진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창조된 사람 스스로 하나님께서 자기 존재의 목적을 탐구하여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에 자의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렇다는 걸 알면 성경이 모두 해석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사람의 창조 목적을 알 수 있도록 세상의 이치와 율법과 말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육신이 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찾아야 할 우리 존재 정체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걸 보고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은 사람이 자의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 나타나

 

예수님 역시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자를 고치듯 바리새인들의 정신을 사로잡아 순종하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다. 그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려고 놋뱀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다. 사람이 그걸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 계획대로 밑에서 보고 있던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도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이 법을 설명한다.

 

또한 성경에 그렇게 무수히 하나님을 부르면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도 이 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연장 하나를 선택할 때도 원하는 대로 잘 작동하는 걸 사용하듯 사람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드신 목적을 알고 살겠다는 마음으로 그 뜻을 구하면 어디서라도 만나시겠다는 약속하셨다. 이건 너무 당연한 이치기 때문에 의심하는 게 오히려 바보다.

 

이 순종을 굳이 표현하면 '자유 의지'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자기 인생에 대한 선택권을 주시고, 선택한 대로 살 수 있도록 하신 건 바로 이 이유 하나 때문이다. 인생을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선택할 수 있게 하셔서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 뜻을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기를 바라시기에 사람에게 인생에 대핸 선택권을 주신 것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역량을 가지고 인생이 마치 자기 것인 양 생각하며 산다. 이렇게 사는 삶이 바로 어두움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도 모르면서 맘대로 사는 건 어디에 사용하는 건지 모르는 전동공구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전동 공구를 용도와 무관하게 사용하면 사고가 나듯이, 사람이 서로 인생을 자기 맘대로 사용하니 갈등과 다툼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걸 화평하게 하신다는 건 모든 사람이 존재 목적대로 회복되면 전동공구를 용도대로 안전하게 사용하는 것과 같아지니 사람 사이에 갈등이 없어진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알지만, 그렇게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인생의 목적도 모르는 어두움에 갇혀 있다.

 

이렇듯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스스로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는 인식과 인생을 선택하고 선택한 대로 살 수 있는 역량을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체가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이다. 목적을 모르는 어두움, 용도를 모르는 어두움인데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하나님의 뜻 이 하나를 몰라서 그렇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인생은 모두 어두움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람을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하신 말씀은 결국 이 어두움, 자기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어두움에서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그 빛은 영광을 얻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아는 상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시는 성품은 세상의 가치로 높아지고 위대해지는 게 아니아 낮은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이런 수고를 하신다는 자체가 낮은 자세로 섬기는 그 자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빛>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인식하는 삶을 알게 되는 것

 

하지만 핸드폰이 목적대로 생산되었다고 해서 바로 그 목적대로 활용되지는 않는다. 핸드폰을 사용할 목적을 가진 사람이 유심을 넣고 설정해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핸드폰은 존재 목적이 달성된다. 이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이 부여한 생물학적 본성에 따라 태어났다고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창조 목적을 기준으로 보면 사람이 생물학적, 의학적으로 살아 있어도 생명이 없는 상태다. 이 상태가 바로 천지창조 이전 상태, 흑암이 혼돈하는 땅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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