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소동과 송사 이후에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힘으로 총독에게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로마 황제 앞에서까지 바울 사도의 여정은 험난했다. 다행히 로마 시민권 덕에 자유와 보호를 받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은 대단했고, 결국은 순교 당했다.(순교 기록은 성경에는 없고, 전승된 기록에 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과 달리 바울 사도는 율법과 성전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의 핍박과 살해 협박을 받았다. 복음과 율법의 갈등이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야할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이슈였다. 그런 순교와 위협을 당하면서 전해온 복음을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가치를 바로 알고 있을까?
바울 사도를 심문한 총독과 왕의 태도는 율법과 복음의 갈등이란 게 신앙 없는 이들에겐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제다. 물론 현재는 한국이나 미국 같은 민주화된 국가에서 이 일로 육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지는 않지만, 영적인 생명이 죽고 사느냐는 문제인 걸 비유한다.
율법과 복음의 갈등은 영적 생명의 문제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느냐 지옥이라는 끔찍한 곳에 가느냐를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믿는다. 영혼의 실존과 사후 세계의 영원함을 믿는다는 게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어 천국에 간다는 믿음은 이생 기간과 비교할 수 없는 영생을 결정하는 절대적 요소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귀하고 중요한 믿음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에게 복음과 율법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 낮아…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라는 기독교인들의 찬양과 달리 대부분의 기독교인에게 신앙은 옵션이다. 취미 하나에 빠지기만 해도 모든 게 취미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사람의 삶이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소위 말하는 어떤 분야의 덕후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하다고 느끼기는 힘들다.
이는 죄에 관하여, 성령에 관하여. 행위와 율법에 관하여 명백한 모순에도 태연하게 기존 신앙의 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공부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구원이란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전제 아래 있는 것인데 구원받았다면서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자기 모습이 이상하지 않고, 노력한다는 건 분명 이르지 못한 사람의 모습임에도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인 걸 발견하지 못하다.
이런 일들은 정말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자 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지려고 한다면 절대 방치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이상하게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방 안의 코끼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런 상태가 문제가 되는 건 착각에 빠진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도 아닌데 자기는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자기 구원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막상 심판대 앞에서 모든 게 헛것이라고 밝혀졌을 때 어떤 대책도 없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인생 자체가 문제인 셈이다.
온전한 신앙이 없다면 돌이킬 수 없는 문제에 빠져 있는 것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사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답하셨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대충한다. 아니 분명한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자신이 이상해야 하고, 끊임없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데도 계속 실패하는 자신에 대한 대책을 염려해야 하며, 성령과 죄와 구원에 관해 모순된 논리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함에도 그저 다들 대충하니 자신도 대충한다. 습관처럼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졸고 오는 그 하나로 구원도 영생도 얻은 것으로 여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우리가 믿는 복음은 많은 수고와 목숨으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거저 주시는 은혜라고 값어치가 없는 게 아니다. 귀한 걸 거저 주니 은혜지 값어치 없는 걸 주는 걸 은혜라고 하지 않는다. 결국 복음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정말로 귀하고 귀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그에 합당한 자세가 필요하다. 신앙에 있는 의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알고자 해야 한다. 알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알기를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그런 간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신다. 그리고 많은 신앙의 의문에 관해 설명하고 전하는 말씀을 만나면 깊이 묵상해야 한다. 나에게 까지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앞선 사람들의 큰 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리스도의 본능에 이끌려 한 수고 끝에 도달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사도들이 목숨을 바쳤고,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한 간절함으로 구하고 답을 얻어 전해온 사람들이 있어 오늘 나에게 이 말씀이 도달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말씀은 우연히 나에게 온 게 아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귀하게 여기고, 의문을 안은 채 그저 세월을 보낼 게 아니다. 죄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는 내 본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런저런 신학적 견해와 해석이 필요한 단계에 아직 머물러 있다면 뜻과 목숨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을 구해야 한다. 그렇게 구하면 반드시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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