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1-24:23)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다하지 못했던 하나님께서 인도한 여정에 대한 간증을 유대인들의 송사를 받은 자리인 로마 총독 앞에서 다시 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바울 사도가 성전을 더럽히는 이단이라고 송사하고 바울 사도는 자신은 하나님 앞에 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힘쓴다는 걸 호소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공소 제기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자신이 율법을 어겼다는 걸 확증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걸 언급했다. 제대로 본 게 아니라는 뜻이다.

 

바울 사도의 변론 요지는 자기는 유대인들의 송사와 달리 자신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할례에 대한 바울 사도의 태도는 율법을 어긴 게 분명하다고 확증하고 있는데, 바울 사도가 이방인에게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고 다닌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율법을 어긴 것인가? 오늘날 신앙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왜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하는 건 다른 일이다. 자기 안에도 바울 사도와 같은 이유와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보기는 힘은 면이 많다.

 

바울 사도는 총독과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는 율법과 선지자의 기록을 다 믿고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기를 힘쓴다고 했다. 이는 유대인들의 송사에 반하는 내용이지만 행위로만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할만한 행적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사도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이 율법을 다 지키고 있다고 말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율법 아닌 복음을 믿는다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바울 사도가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하는 근거를 신앙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유대인들은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런 그들보다 더 열심이었던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그 과정을 거쳐 복음에 이른 사람이다. 물론 이건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인정할 수 있는 것이지 당시 유대인들이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관점은 아니다. 그들에게 바울 사도는 어쨌든 변절자다.

 

유대인들은 아직 광야에, 사도 바울은 약속의 땅에 이른 상태

 

유대인과 사도 바울의 이런 차이를 출애굽 과정으로 비교해 본다면 유대인들은 광야에 있는 상태고 사도 바울은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의 약속에 이른 상태다. 유대인들로서는 바울 사도의 지경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상태라는 건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이 비유는 타당하다. 이는 오늘날 신앙인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들 스스로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 말하지만 이르지 못해 노력하고 있는 상태인 건 다르지 않다. 어떻게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건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사람은 간혹 자기가 모르거나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 경솔하게 대하기도 한다. 청년들이 자기들은 아직 살아보지 못한 노인의 삶을 가볍게 다루듯이. 또 자주 강조하듯이 곤경에 처하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다 안다는 확신 위에서 사도 바울과 복음을 핍박하고 있다. 정작 자기들은 다 지키지 못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주제에.

 

우리는 여기서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들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하나님의 일이면 흥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소멸될 것이라며 만류한 바울의 스승으로 알려진 가말리엘의 태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 정도는 있어야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의 복음 핍박은 신앙의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이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비판이라는 어리석은 행태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생소하고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바로 잡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만 대했어도 되는 일인데,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눈에 보이는 세계의 실패에 두려워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을 핍박하고 있다.

 

이렇게 복음을 핍박한 유대인들처럼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날 신앙인들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사하신다고 하셨음에도 애굽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면 된다고 하는데 막상 두려워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처럼, 행위로 범한 죄를 떨칠 수 없어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분명 이르지 못한 세계다.

 

구약이냐, 신약이냐, 유대인의 율법이냐, 복음이냐가 본질이 아니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행위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노력한다는 자체로 아직 복음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성경을 행위로 노력해서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이르지 못한 세계다. 현대 신앙 대다수는 복음을 핍박한 유대인들처럼 아직 복음에 이르지 못한 지경에 머물고 있다. 행동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게 아직 이르지 못한 증거다. 구약이냐, 신약이냐, 유대인의 율법이냐, 복음이냐가 본질이 아니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행위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노력한다는 자체로 아직 복음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노력하고 있다는 자체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건 상식의 영역이다.

 

육신의 삶이 실패하는 걸 두려워 행위로 성경을 지킨 공로로 축복을 받는 거래를 시도하는 자신도 함께 발견해야 한다. 이런 발견들이 아직 자신이 광야에 머물러 있다는 걸 깨닫게 한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으로 이룬 공로로 두려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는 신앙에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죄(상태)를 시인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걸 시인하는 그것으로 모든 게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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