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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67 –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23. 10:02 Writer : 김홍덕

(22:30-23:11)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는 바울 사도의 유명한 말은 에베소에서의 고별 설교에 나오는 말이다.(19:21) 그리고 이제 바울 사도는 정말로 로마로 가게 된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압송되는 형태니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죽이겠다는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는데, 이런 전개는 다음에 이야기해 보도록 하고 이번에는 바울 사도의 로마행에 대한 의미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바울 사도의 로마행을 보면 '자발적으로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시기 위한 계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들의 여지는 충분하고 틀린 생각이라 일갈할 수도 없지만 본질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세상 기준으로 심판받아 십자가를 지신 분 아닌가?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건 이런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로마로 가는 사도 바울

 

로마도 보아야 할 것이라는 바울의 고별 설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과 완전히 똑같다. 사도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할 것이라며 자기 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과 십자가를 지시러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의 모습 역시 똑같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우리는 어떨까? 우리 역시 그렇다. 역설적으로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게 아니라고 확증할 수 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 내가 십자가를 질 것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가 이끌어가는 성경이다. 성령의 정체성과 직임과 능력을 아는 게 핵심이다. 사도행전 중반부까지 많이 설명했듯이 성령을 기적의 아이콘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성령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조건은 단 하나, 성령의 직임에 필요하실 때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이 된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일을 위해 필요할 때만 능력이 나타난다.

 

성령의 직임은 어떻게 보면 단 하나다.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게 심령에 있을 때 그 말씀이 생명이 되도록 잉태케 하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다. 그 능력으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핵심이다. 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제자들조차 쉽지 않은 문제였다. 하나님 아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귀한 존재가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천한 십자가를 지느냐는 세상 가장 상식적인 의문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 해답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자 하심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신 성품의 본질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는 본성,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성품, 이 본성을 가진 생명이 그리스도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존재가 바로 거듭난 사람, 곧 그리스도다.

 

바울 사도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삶을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 본성이 로마로 이끌었다. 그리고 로마에서 전한 복음을 인해 오늘 우리가 이 복음을 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 하나님 아들의 정체가 드러난 것처럼.

 

여기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로마로 간 이유와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걸 찾고 알고 순종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이 사도행전을 깨달은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이며,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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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66 – 각각 다른 하나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22. 00:02 Writer : 김홍덕

(22:2-29)

바울 사도로 인한 소동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천부장까지 나서서 바울 사도를 격리하므로 사태를 일단 진정시켜야 했다. 그 후에 사도 바울은 천부장에게 기회를 얻어 자기의 회심 과정에 대해 유대인들에게 간증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유대인들은 끝까지 듣지도 않으려 했고 오히려 더 바울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걸 밝힘으로써 상황은 다소 반전되었지만 그렇다고 석방이 되지는 않았다.

 

바울 사도는 변론을 통해 자기의 모든 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걸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바울 사도의 변심은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라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통할 리 없었다.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율법을 행위로 지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고, 그 행위에 따른 반대급부로 상 혹은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유대인들은 오직 행동과 말로 바울 사도를 판단할 뿐이었다.

 

사도 바울의 하나님과 유대인의 하나님은 달라

 

사람들은 단어가 같으면 뜻도 같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보면 기도, 전도, 봉사, 율법과 같은 단어들은 유대인이나 지금 기독교인들이나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대인과 사도 바울의 괴리에서 보듯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모두 여호와 하나님인 건 아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하나님 혹은 여호와로 부르지 않아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건 아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불러 복음을 전한다고 간증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배신한 배신자에 불과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을 불렀다고 간증했지만,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이방인을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이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교회와 성당 등이 있고, 그곳에서는 모두 하나님을 부르나 그들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거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하기를 구하는 게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게 아니다. 아쉽게도 대부분은 그렇다.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보면 아는데 부르기는 하나님이라 불러도 그들이 믿는 신은 바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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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65 – 왜 복음을 핍박할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21. 07:29 Writer : 김홍덕

(21:27-22:1)

나실인의 예식 기간이 일주일이 지나자,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체포하고서 "유대인들을 훼방하고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더럽혔다"며 그 이유를 외쳤다. 그러나 바울 사도를 체포한 유대인들의 이유 중에 헬라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건 오해였다. 단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사역자이자 동역자인 드로비모라는 헬리인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유대인들에게 어쩌면 그런 오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모든 행동은 율법을 훼방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본질적으로 그들의 목적은 율법을 범한 바울 사도를 계몽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그렇게 복음을 핍박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죽이려 했을까?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는 율법주의자는 근본적으로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율법주의자는 눈에 보이는 육신의 행위가 어떤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판단하고, 육신의 상태, 즉 지위나 경제 상태 등을 기준으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지는를 판단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욥의 세 친구, 빌닷과 소발과 엘리바스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보이는 복음으로 인해 율법을 준수하지 않아 자기들에게 미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한다. 고난받고 있는 욥을 보고서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범한 결과라고 했고, 그 환난을 벗어나려면 무엇을 잘못 했는지(Do)를 돌아보고 행위를 회개하라고 독려했다.

 

율법주의의 이런 이면에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에 미치는 불행을 하나님의 진노로까지 생각하기에 더 두려워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 안에서 생각하니 하나님께 행위로 죄를 범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인생의 불행은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행위를 정결하게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더 나아가 행위로 쌓은 공로로 하나님께 복을 받고자 한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과 축복의 대가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행위를 드리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거래를 장사라고 일갈하시기도 했다.

 

복음을 핍박하는 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이 만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

 

사람은 상 받지 못하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벌을 받는 건 누구나 두려워한다. 상을 받아야겠다는 욕망에 빠진 게 아니라면 상을 받지 못하는 게 두려워 능동적 핍박이나 대응을 하지는 않지만, 두려워하는 일은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하고, 필요하다면 강요하고 핍박한다.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염려와 경각심은 이런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자녀에게 헌금을 떼먹는 건 하나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 엄히 경계하며 가르치지만,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지옥 간다고 훈육하진 않는다. 잘하면 좋은 걸 하지 않는다고 두려운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유대인들의 복음 핍박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망하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다. 육신이 아프면 안 되고, 사업이 실패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두려운 일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두려운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이고, 벌을 받는 건 본질로 보고 있는 육신의 행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그 지경에 본성에 이끌려 가셨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런 본성이다. 두 사람이 있을 때 한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게 사람이 인생에서 겪는 두려움의 단면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낮아지고 발을 씻기라 하셨다. 이건 사람이 두려워하는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게 바로 그렇게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 두 사람이 있을 때 섬기는 사람이 되고, 세상의 가치로 선한 걸 추구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건 사람이 두려워하는 삶이 자기 본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이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의 발작 버튼이 누르는 일인 셈이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은 앞서 설명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이 아닌 신약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율법을 지키려는 율법주의자는 아니라고 착각한다. 육신이 세상 기준으로 성공하기를 바라고, 반대로 망하는 걸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아직 실천에 옮기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율법주의자고 복음을 핍박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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