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더 이상 자기를 추격하지 않겠다는 사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뜻밖의 선택을 하는데, 그렇게 싸우고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한 블레셋에 망명한 것이다. 블레셋에 속한 다윗은 블레셋과 아말렉의 싸움에서 크게 기여한다. 이에 블레셋의 왕 아기스는 이스라엘을 침공하기로 하고 다윗에게 참전을 요구하는 다윗으로는 매우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뜻밖으로 블레셋의 다른 방백들이 다윗의 배반을 우려하여 함께 전쟁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므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한편 다윗이 참전하지 않은 블레셋의 이스라엘 침략으로 사울과 요나단이 죽고 다윗은 이스라엘로 복귀한다.
다윗이 천하의 주적인 블레셋에 망명한다는 건 매우 의아한 일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많은 신학적 견해 앞에 ‘의문스러운 사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윗의 블레셋 망명과 같은 일이 한 두개가 아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은 모두 흉년으로 인해 블레셋에 거주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부자가 아니랄까봐 둘 다 모두 자기 아내는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까지 한다. 물론 족보로 따지만 먼 누이들이긴 하지만 자기들이 살려고 그런 거짓말을 한다.
다윗과 아브라함과 이삭만의 일이 아니다. 야곱도 에서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셈족의 땅에 피했으며, 요셉도 애굽에 팔려가는 형식이긴 했지만 형들의 위협으로부터 피했다. 모세도 애굽에서 40년을 피했고, 엘리야도 이세벨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사르밧이라는 이방으로 피신했으며, 사도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교회가 인정하지 않아 이방 땅 아라비아에 3년간 거주했고, 예수님도 헤롯을 피해 애굽으로 피했었다.
신앙인에게 세상은 다분히 터부시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게 정통적인 신앙관과 교리다. 그래서 이 말씀을 난해하게 여긴다. 신학이 세상을 터부시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신학으로 이 말씀을 조명하면 어렵게 보일 수밖에 없다. 예전 수도원이나 수녀원의 설립 동기도 여기에 있다. 의미도 모른 체 정결한 신앙을 중요 시 하는 경우 산속에 수련원을 건축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이단들이 이런 형태를 많이 보인다. 세상과 단절하고 폐쇄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세상과 멀어지려고 한다.
그러나 세상 역시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계다. 신앙 공동체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건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일 뿐 전혀 경건하지 않다. 세상은 신앙인이 이용하는 곳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서의 경제활동으로 교회 공동체를 운영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을 우리가 마냥 부정하게 여길 권한은 없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인생의 목적과 본질로 여기는 것이지, 세상이 가진 여러 속성들을 마냥 부인하는 게 경건한 신앙은 아니다.
블레셋에 망명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오히려 아말렉을 물리치는 능력을 주셨고, 심지어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일을 참여할 뻔했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반대하는 놀라운 도움을 주신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신앙의 많은 선진들의 일도 하나님께서 지시하셨으면 하셨지 그 일로 징계나 책망을 하신 적도 없다. 세상은 터부시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신앙을 그려내야 하는 도화지기 때문이다.
물론 다윗의 망명은 세상의 정체성을 일깨우기 위한 말씀은 아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세상을 터부시하는 게 경건한 신앙은 아니라는 걸 먼저 설명하기 위해서 세상의 정체성에 관해 잠깐 언급했다. 다시 한번 세상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펼쳐낼 장이고 운동장이며 도화지와 같은 곳이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
다윗을 비롯한 신앙 선조들의 세상 망명은 우리 신앙 여정에서 충분히 겪게 될 수 있는 일이다. 아마도 신앙이 어린 시절에는 이게 뭔가 싶은 그런 말씀이다. 세상에 대하여, 또 하나님이 기름 부은(하나님이 뜻을 가지고 인생을 주신) 사람에 대한 인식에 빛이 비춰져서 밝아져야 이 세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밝음은 필수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고 함은 나의 육신과 수고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 그것이다.
우리 신앙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본다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다윗, 그리고 그 다윗이 투사하고 있는 내 안에 있는 새사람이 항상 평안하고 유리한 조건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상하게 사울은 궁전에 머물고 다윗은 쫓겨 다니다 못해 아예 세상에 망명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는 건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하는 게 기독교 일반의 신앙관과 믿음이며 교리인데 그 관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서 앞서 언급한 대로 세상을 보는 관점과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자기 육신과 그 수고를 내어주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라는 걸 이해함과 동시에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세상에 망명하듯 의탁하는 일도 있다는 걸 깨달으면 좋을 것 같다. 신앙이 자라면 어느 날에는 분명 세상에 의탁하는 과정도 마주하게 될 것이므로 그때 이 말씀이 위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은 또 다른 어려움을 가져온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영적 전쟁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지만 사람은 내면의 상황이 겉으로 드러나는 존재다. 이는 우리 심령에 하나님이 거하시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표현하는 하는 걸 목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질그릇이라고 표현된 육신 안에 무언가가 담기면 담긴 것을 표현하게 된다. 콜라가 담기면 콜라병이 되고, 심지어 “콜라를 달라”라는 말에서 보듯이 콜라 자체가 된다. 그러니까 영적인 전쟁인 옛사람과 새사람의 갈등은 겉으로 표현되고 드러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낭중지추라는 말처럼 옛사람을 점점 이겨갈수록 나타나는 새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성이 다윗의 망명을 난해한 일로 바라보는 신학에 의해 신앙을 학습한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을 터부시 하는 사람, 그리스도를 내가 내일 범할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은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불신자마저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름 부은 사람으로 상대해 가는 그리스도의 모습, 하나님 앞에 더 의로운 사람인데 오히려 죄인이 되는 모습은 실패하고 타락한 신앙으로 보이기에 새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 낮아지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처럼 그냥 낮고 천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일을 마주한 날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다는 걸 발견하는 날이다. 그럼 예수님의 말씀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나 멀리 도망해야 한다. 이건 때로 교회를 떠나는 일이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 말씀의 의도는 그런 신앙과 가치관에서 멀리 떠나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건 나의 이야기고, 내 안에 있는 옛사람과 새사람의 갈등이고, 내가 이전에 하늘처럼 여기던 가치관이 무너지는 일이며, 지금껏 의롭다고 여겼던 신앙 안에서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세례를 받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율법적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만 하는 신앙에서 떠나면 막상 갈 데가 없음을 알게 된다. 어떻게 은혜로 낮아지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교회나 사람을 만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게 아니라면 다윗이나 믿음의 선진들처럼 세상에 의탁하는 시절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연단의 시절을 거쳐내고 옛사람이 다 죽고 나면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권을 회복하듯 삶을 온전히 하나님의 의로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
다윗이 원수인 블레셋에 망명한 사건은 일반적인 신앙관으로는 다소 의아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위대함에 맞서고, 세상과 사람 모두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경영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과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나를 위태롭게 할 때, 우리가 아는 기독교인들과 교회처럼 “어디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라는 태도가 아니라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닌 다윗처럼 나와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게 되면 우리 신앙의 여정에 세상을 의탁하는 세월이 있음도 알게 된다.
그러나 바닷속 물고기가 짜지 않듯이 그런 세월 속에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세상에 물들지 않는다. 하나님도 외면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그렇게 순례와 연단의 과정을 거쳐 옛사람을 이기고 나온 한 사람은 말 그대로 세상보다 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블레셋과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일을 막으시는 도움을 주신 것에서 비록 신앙의 여정을 따라 세상에 의탁해 있어도 하나님께 도우심을 알 수 있다,
이런 연단의 과정은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는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안에서 벌어진 옛사람과 새사람의 전쟁을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이겨내어 그리스도의 본성이 내 삶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에 어쩌면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핍박을 피해 세상에 의탁하는 세월을 보내게 될 수 있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이런 세월을 보내고 있을 텐데, 그들의 여정이 그릇되거나 죄를 번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 다윗의 일로 말씀하고 있다. 그 여정에 위로가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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