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5장)
사울과 다윗의 싸움은 거의 내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유다 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들은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이 왕으로 있었다. 그렇다면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기름을 붓고) 또 사울에게 하나님의 저주 같은 심판을 면전에서 말할 정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사무엘은 왜 이 싸움에 간섭하지 않았고, 사울이나 다윗 두 사람 누구도 사무엘에게 도움이나 중재를 청하지 않았을까?
물론 사무엘에 연로하여 기력이 없었을 수도 있고, 왕들의 싸움에 끼어 든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의 권위가 그렇게 허약하지 않으므로 그건 설득력이 많이 부족한 논이다. 그리고 이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성경 속 작은 의문이기만 한 게 아니다. 사울과 다윗의 싸움은 우리 안에서 옛사람과 새사람의 갈등을 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무엘의 침묵과 무관심은 옛사람과 새사람의 갈등에 하나님이 방관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전지전능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의 피조물인 사람이 다 알 수는 없다. 사람이 알아야 하는 하나님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다. 어차피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므로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능력 전부에서 어느 정도의 비율인지도 의미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에게 오셨다. 이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대하신 하나님의 모습 중에서 유일하고 특별하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스스로 결정하는 권한을 주셨다. 그렇게 중요하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도록 하셨을 것 같고, 또 그렇게 하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라고 이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사울과 다윗을 일 위에 올려 두고 일방적으로 한 쪽의 손을 든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고 할 존재가 없는 하나님이신데 끝내 자기들이 그 갈등을 이겨 나가기를 기다리신다.
이에 관해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게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 보고 있다가 그 결과에 따라 복이나 벌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을 그렇게 닭싸움 구경하듯이 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순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순종하기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그 어떤 것도 이런 권한을 받은 게 없다. 사람은 심지어 하나님을 거역하는 선택도 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존재나 피조물도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심판에 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심판이나 벌을 받는다는 건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우리에게 어떤 권한이 있고, 그 권한을 부여한 존재가 기대하는 책임이 있는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만 심판이 있는 게 이치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께 빚진 자다. 이는 내가 돈을 주고 구매한 핸드폰이 내가 원하는 기능을 제공해야 할 빚이 있는 것과 같다. 핸드폰이 기대하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교환하거나 반품하기도 하고, 제조사를 찾아가 욕하고 화를 내는 것도 내가 지불한 기대에 대한 빚을 휴대폰이 지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하나님도 사람에게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고, 그 기대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보살폈으며, 또 다른 피조물과 달리 그걸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까지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피조물 중 유일하게 심판을 받는 존재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대 원리가 이렇다. 따라서 우리 안에 옛사람을 이겨내는 건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다윗도 도망자로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마다 하나님께 도우셨다. 하지만 밧세바에게 음욕을 품을 때 그 마음을 제어하시지 않은 것처럼 자기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관여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는 사람이 사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 기도를 사울과 다윗의 싸움에 대입하면 그저 다윗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믿음을 기대한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그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충성스럽게 여긴다. 헬라어로 믿음과 충성은 방향이 다른 같은 의미의 단어다.
다윗이 사울과 나발을 심판하지 않은 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주신 우리 인생을 다스리기에 필요한 순종이 검증되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사람들, 성경에 대해 눈이 밝아지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는 사람이 보여주는 가장 교묘하고도 위험한 모습이 바로 불순종에 대해 심판하는 자세다. 한때 잘 나가던 사람들이 이단의 길로 들어서는 대표적인 성향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에 대해 좀 더 설명하면, 만약에 영빨 있다는 기도원이나 목사님을 찾아가서 기도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때 가졌던 설레는 듯한 두려움이 기억에 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은 다윗이 사울이나 나발을 죽일 수 있는 명분과 결을 같이 한다. 교회 안에서 신앙이 좀 있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책망하고 지적하는 일이 있는데 그 또한 사울과 나발을 심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으로 내 삶을 주관할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사무엘이 죽었다는 건 마치 광야를 인도한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다윗이 하나님께 충분한 순종을 보였으므로 이제 다윗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이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에 충분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충성스럽게 여기신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의 신앙도 이와 같다. 내 삶의 평안과 내 삶이 하나님의로 굳건하게 되는 건 신앙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심판하며 책망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게 아니다. 내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라는 기름을 부은 사람들이며, 내 앞에 펼쳐지는 사건과 상황은 실수도 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경영하신 일이라는 걸 보는 안목으로 순종할 때 삶의 평안해지고 굳건해 진다. 하나님은 내 삶을 아바타와 같이 조정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순종하기를 바라시는 분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 > 사무엘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무엘 상) 32.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의는 명분보다는 긍휼 (0) | 2025.10.07 |
---|---|
(사무엘 상) 31. 구원받은 자의 본성과 하나님의 의를 아는 인간의 양심 (0) | 2025.10.06 |
(사무엘 상) 30. 세상의 일로 옛사람을 제어하시는 하나님 (0) | 2025.10.05 |
(사무엘 상) 29. 옛사람과의 갈등, 결국 세상 가치관과의 싸움이다 (0) | 2025.10.01 |
(사무엘 상) 28. 불순종의 그림자, 사울과 에돔 사람 도엑 (0) | 2025.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