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승리하지만 자신의 형편이 사울에게 쫓기는 중이라 전쟁에 이기고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기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치기 위함인지 도엑이라는 에돔 사람의 밀고로 제사장이 학살 당할 때 다윗을 도왔던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도망 올 때 가져온 제사장의 에봇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에봇은 제사장의 의복인데 그 안에 우림(긍정)과 둠림(부정)이라는 게 들어 있었고 그걸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사울이 자기를 잡으러 올 것인지, 또 자기가 구해준 그일라 사람들이 자기를 배신할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답하셨다. 이에 다윗은 피신하여 들판에 숨었다. 그리고 이때 그의 절친인 요나단을 만난다. 요나단은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걸 아버지(사울)도 안다”라고 축복한다. 이 만남은 이 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리고 숨어 있는 다윗에게는 결국 3,000명의 군사와 함께 사울이 미치게 된다.
사울은 쉽게 다윗을 찾지 못했는데 십 광야의 사람들이 다윗이 있는 곳을 사울에게 알려 주어 다윗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했고, 이를 들은 사울은 군사를 돌려 블레셋을 물리치러 간다. 이 상황은 정말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전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두어 가지 익숙하지 않은 게 있다. 먼저는 에봇으로 제비 뽑듯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답을 하셨다는 것이고, 그렇게 물리치라고 말씀하신 블레셋을 동원하여 기름 부은 다윗을 구하신 일인데 뭔가 논리적 모순이 있어 보이는 사건이기도 하다. 물론 욥의 일만 기억해도 이건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접근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일로 옛사람을 제어하여 새사람을 지키심을 보여주신 것을 조명하는 것이다.
다윗과 사울의 갈등은 국가적, 정치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지키고 인도하시는 지를 보여주시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다윗처럼 안위하신다는 관점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앞서 몇 편의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상이 좋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다스릴 것인지, 세상에 맞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 다스릴 것인지의 갈등으로 자기가 왕인 우리 각 사람의 삶의 세계를 누가 다스릴 것인지에 관한 말씀이라고 설명한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을 세상의 일로 제어하신다는 말씀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아니 그렇게 봐야 성경이 내 이야기가 된다. 다윗과 사울은 정치 드라마나 전쟁 사극이 아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
우리의 신앙 생활은 결국 나를 다스리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순종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택의 권한으로 하나님의 의가 다스려야 하는 피조물이다. 그런데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선과 악을 가늠하는 삶을 선택하고 산다. 이게 사울이 보여준 우리 옛사람의 본성이다. 반면에 다윗은 골리앗과 같은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 존재의 신이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마음이며, 이 새사람의 본성이 옛사람을 다스리는 삶의 영역을 회복시키는 과정이 신앙 생활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기에 새사람에게 세상은 늘 경계의 대상이자 적이다. 옛사람은 언제나 세상의 가치로 믿음을 시험하고 유혹하여 죽이려 한다. 그런데 영지주의와 율법주의가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는 하나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듯이 서로 죽이려 안달이 난 사울과 블레셋 역시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공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블레셋은 세상 가치관의 본질이고, 사울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둘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옛사람을 세상 일로 다스려…
그러나 이 둘은 친하지 않다. 뭐랄까?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곧 구원으로 하는 사람이 장례식장에서 절하는 걸 터부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 그 중에서도 자기 딴 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세상이 좋다고 하는 걸 이루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믿고, 그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사울처럼 세상이 좋다는 걸 하나님께 드리는 게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넘어진다. 같은 가치로 같은 파이를 다투는 관계다.
옛사람은 세상의 가치로 일이 잘 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세상의 가치로 일이 잘못되면 자기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고받는 관계, 곧 장사로 생각한다. 그래서 옛사람은 언제나 세상의 일로 시험을 받는다. 블레셋의 침략에 늘 발목이 잡힌다. 세상 가치로 좋은 것을 상실할까 전전긍긍하면서 그걸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목사나 기도원을 찾아 묻는다.
이뿐 아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자아를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는 좌절로 인하여 낙심하고, 놀랍게도 이런 실패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결단을 하게 인도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인해 다윗을 죽일 기회를 놓친 사울이 아니라 다윗의 다스림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대변하므로 하나님이 창조한 우리 각 사람의 세계다. 우리는 자아를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 세상의 가치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맞서는 믿음이 다스리는 삶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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