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1장)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사울과의 갈등은 왕권을 둘러싼 암투고, 하나님께서는 이 양자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위대함에 맞선 다윗을 세상의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울을 대신해서 왕으로 삼고자 하셨다. 다만 우리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위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일을 왜 이렇게 긴 여정을 통해 이루시는지 그 이유는 한번 생각해 봄 직하다. 역사를 보면 이런 일은 사람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은 ‘나’라는 한 개인의 인생이라는 왕국을 누가 다스릴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 처음엔 누구나 세상에서 좋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한다. 그러나 온전한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알게 되면 세상의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게 온전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세상의 좋은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점점 알아가게 된다.
다윗은 그 과정을 투사하는 모델이다. 특히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도 바로 왕이 되지 않고 긴 도망자 세월을 거쳐 왕이 되는 다윗의 삶은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 다스리는 자아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뜻에 순종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뜻이 다스리는 삶이 되기까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 믿음이라는 불순종의 사울과 같은 마음을 이겨내는 지의 과정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이후에도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제법 오래 연단의 시간을 거친다. 이건 하나님의 의가 따르기 까다롭고 어려운 것 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탓이다. 그래서 나름 어려서 하나님을 믿을수록 더 빨리, 더 온전히 믿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가기 전 조금이라도 이른 시간 돌아서는 게 아무래도 유익하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을 사랑한만큼 세상을 사랑한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사울처럼 우리를 괴롭힌다. 하나님이 선택한 왕 다윗에게 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하는 사울은 하나님의 의가 삶을 주관하는 걸 방해하는 우리 옛사람이 행하는 필사의 노력이다.
처음 도망한 다윗에겐 가진 것이 없었다. 다행히 혼자는 아니었지만 먹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 도착한 제사장(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구하지만 다른 건 없었고, 하나님의 성전에 항상 두고 안식일에 새 떡으로 바꾸면서 이전 떡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논쟁 중에 사례로 드시면서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하실 때 예로 드신 그 떡이다.(막 2:28)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다윗이 먹었다는 건 이 규례가 무력화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윗이 먹었다는 건 오히려 이 떡에 관한 규례의 완성이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떡을 항상 진설하게 하시고, 매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꾼 이후에 하나님께 드려졌던 떡을 제사장만 먹게 하신 의도가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사장만의 음식이라는 건 하나님께 온전히 제사 드린 사람만을 위한 음식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존재의 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사장과 제사와 절기와 성전에 관한 여러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들의 형식 준수를 순종으로 보시겠다는 게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의가 무엇이며, 누가 그 의에 순종하는 사람인지가 본질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분을 특정했다. 아론의 자손 레위인만 이 직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건 혈통이나 신분에 주목할 게 아니라 제사는 정해진 사람만 드릴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럼 사울은 왜 안되고 사무엘은 되었는가 반문할 수도 있는데, 사울 혹은 사무엘이라는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그가 누구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인지가 기준이다. 이는 누가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인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심령이 율법에 합당한 사람이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사람이다.
사울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겠다고, 또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시간을 지킨다고 왕으로서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버리셨고,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위대함인 골리앗과 맞서 싸워 이겼더니 비록 사울에게 쫓기는 몸이 되긴 했지만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제물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사울은 제사를 드렸지만 버림받았고,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였지만 산 제물이 되었기에 제사장의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은 세상의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한다. 시간을 잘 지키는 게 좋다고 하니 정해진 시각에 예배를 드리고 지각하면 화를 내고, 세상이 좋다고 하니 빳빳한 신권으로 헌금을 드리고 새 옷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걸 좋게 여기며 그렇지 않은 자아를 심판한다. 세상이 좋다고 하니 엄청나게 비싼 오르간으로 예배 드리려 하고 이를 반대하는 사람을 하나님을 비토하는 사람으로 낙인 찍는다. 이 모두가 사울이 다윗에게 행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우리 삶을 주관하기를 바란다. 그게 애초에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고 뜻이다. 우리 심령과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과 의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 옛사람과 세상은 언제나 그보다는 형식과 규례가 중요하다며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를 심판한다. 말 그대로 내 안에 있는 나의 모세가 나를 송사한다. 이것이 바로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과 같은 우리 자아다. 하나님을 바로 믿으려는 자아는 늘 이렇게 송사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의도는 제사장만 떡을 먹으라는 게 아니라 제사장이어야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존재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위대함을 이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 곧 삶이 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산 제물이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제물이고 제사장이다. 우리도 다윗처럼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 > 사무엘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무엘 상) 26.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 (0) | 2025.09.18 |
---|---|
(사무엘 상) 25.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 (1) | 2025.09.17 |
(사무엘 상) 24. 다윗과 골리앗 (0) | 2025.09.16 |
(사무엘 상) 23. 인생의 시련을 이기는 하나님의 이름 (1) | 2025.09.14 |
(사무엘 상) 22. 우리 삶의 시련을 투사하는 골리앗 (1) | 2025.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