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9장)
우리는 그간 사울과 다윗의 갈등을 우리 심령 안에 있는 옛사람과 새사람의 갈등으로 조명해 왔다. 그리고 이제 옛사람인 사울의 마지막을 보고 있다. 새사람의 시대가 열리기 직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맞서고,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새사람으로 사는 삶의 앞둔 시점이다. 그런 시점에 다윗은 철천지 원수 블레셋에 망명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무당이 죽은 사무엘의 영을 소환하는 기괴한 일들을 보고 있다. 이건 이상한 일들이 이어지는 단순한 흐름이 아니다.
우리가 새사람을 입는다는 건 하나님의 의가 나의 삶을 주관한다는 뜻이다. 모든 신앙인이 소망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까지 겪는 일들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새사람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말씀하시는 책이다. 그리고 사울과 다윗의 갈등은 그런 사람이 되기까지 우리의 옛 본성을 어떻게 이겨갈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울이 신접한 여자 무당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는 일은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한 당혹감을 준다. 특히 장례식장에 가서 영정에 절하는 것은 귀신에게 절하는 것이라며 절하지 않는 한국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귀신처럼 나타나 하나님의 일을 일러준다는 건 꽤나 당혹함을 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의아함은 순전히 기독교의 교리 때문이지 성경이 괜히 우리에게 의문을 주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사탄도 부리시는데 이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게 의문스럽다 거나 신학적으로 난해하다고 하는 건 사람이 정립한 기독교의 안목으로 하나님을 조각하고 조명하기 때문이다.
다윗의 블레셋 망명이나 무당이 소환한 죽은 사무엘의 영이 사울의 죽음을 예언하는 일이 주는 새로운 안목이 있다. 바로 신앙의 지경에 대한 재고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경계, 해야 하고 해도 되는 것은 무엇이고, 하면 안 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경계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느슨하게 새로 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그 경계를 임의로 정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교리에 매몰되어 정한 경계가 늘 사람을 심판하기 때문이다. 이건 율법의 또 다른 모습이다.
새사람이 된다는 건 결국 신앙의 지경을 스스로 정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 교리에서 비롯되었든 세상의 가치 기준이나 내 욕심 그 무엇에서 비롯되었든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삶이 새사람의 삶이다. 하나님이 그 뜻을 사탄을 통해 전하시든, 나귀를 통해 전하시든(발람과 발락), 신접한 무당으로 통해 전하시든 상관없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한 그 어떤 정의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재단할 수는 없다는 걸 바로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삶의 진면목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들으며 때로 ‘이게 뭐지?’하는 사건이나 구절을 대한다. 그러면 많은 경우 ‘신학적으로 난해한 말씀’이라는 기조로 끌고 간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려운 문제를 내고 어떻게 하는지 심판하는 스핑크스의 상위 버전인가?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려운 문제를 내거나 시험하시면서 반응을 살피고 그 반응에 따라 상이나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내가 대하는 성경이 이상할 때는 내가 성경을 보는 기준과 안목을 교정할 일이지, ‘하나님이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지?’라고 볼 일이 아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밟는 땅은 모두 너희에게 준다고 하셨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라는 엄격한 지경을 준수해야 했던 광야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건 분명히 우리 신앙이 사람이 정한 교리나 철학이나 어떤 가치의 틀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뜻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의문을 느끼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교회 다니면 노래방 가도 되나요?’라며 신앙의 경계를 묻는 건 확실한 율법신앙이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수 1:3)
여기서 하나의 아니 대부분의 경우 “그럼 점 보러 다녀도 된다는 거냐?”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질문 - 죄사함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한번이면 족하다고 하면 “그럼 이제 도둑질해도 되냐?” 같은 – 질문은 많이 받는데 참 어이없다고 늘 생각한다. 그럼 난 이렇게 반문한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데, 그 본성이 도둑질하는 본성으로 보이냐?”라고.
마찬가지다. 신앙의 경계를 굳이 정할 필요가 없다는 건 무당 찾아 다니고, 점 보러 다니고, 장례식장에서 영정에 절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대로라면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순종하는 사람에게 경계나 기준이 있을 수는 없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린 사건은 사실 기괴한 사건이다. 무당이 부른다고 사무엘의 영이 소환된다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그렇게 불려 온 사무엘은 귀신인가? 싶기도 하고, 그런 사무엘의 영이 또 하나님의 일을 말하고, 그(귀신?)가 말한 대로 사울은 죽게 된다는 건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일들을 우리가 가진 신앙과 교리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완전하게 경영하시는 하나님이 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 위에서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피쟁이(가죽) 시몬 집에서 졸고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먹지 않는 것들을 보여 주며 먹으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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