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나의 이야기다. 다른 나라 역사나 신화도 아니고, 예수님은 할 수 있었지만 오늘 나는 할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도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되어야 할 표상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지 않을 값이라면 우리는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 이 말은 오해하면 안 된다.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기적을 보이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을 깨닫는데 필요한 교훈을 위한 것이지 그게 우리 신앙의 목표는 아니다. 심청전은 효도를 깨닫게 하는 소설이지, 임당수에 몸을 던져야 효자, 효녀가 된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같은 맥락에서 사무엘 상을 비롯한 성경의 역사서 역시 오늘 우리 신앙의 이야기다. 주로 나라의 왕을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서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는 하나님께서 삶을 주신 ‘나’라는 한 개인의 세계다. 내가 결정하고 살아가는 내 삶이 나의 나라, 나의 세계다. 그리고 왕은 그 세계를 다스리는 사람 곧 우리 각 사람의 자아다. 그리고 한 가지 나라를 다스리는 의가 있다. 내 삶을 어떤 의로 다스릴 것인가? 즉 나는 어떤 의로 내 삶을 주관하면서 살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왕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가 생각하는 의나 가치로 자기 삶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 각 사람의 왕이 이렇게 분류된다. 사울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왕이다. 우리의 옛사람이다. 출애굽의 여정을 기준으로 좀 더 엄격히 구분한다면 사울은 광야에 속한 불순종의 왕이다. 하나님을 알지만 율법적이고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대표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사울의 상태 까지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옛사람>이다.
그리고 다윗이 있다.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의 표상이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맞서는 사람이다. 세상을 상징하는 골리앗과의 싸움은 그걸 보여준다. 또한 세상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 지도 보여 준다. 여호와의 이름 곧 하나님의 정체성으로 이긴다. 다윗은 그런 삶의 표상이다. 성경은 이런 삶을 사는 우리 자아를 <새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울과 다윗의 다툼과 갈등은 우리 옛사람과 새사람의 갈등을 설명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8장에서 이 전환을 겪는 자기 간증을 아주 깊이 있게 기록해서 전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만든 형상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지에 관한 결정을 우리에게 맡기셨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정하는 게 필요하다. 하나님이 정한 답이자, 우리 존재 목적이며 우리 삶의 의미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이라는 내 나라를 다스리고 주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신앙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과정을 여러 가지 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사람에게 답은 정해져 있다. 창조주께서 정한 목적이 있으니 피조물은 창조주의 목적 안에 들어가야 한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표상인 이유다. 그러니까 다윗과 사울을 싸움은 결국 다윗이 이기고 사울이 지는 싸움이다. 역사가 승자의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의가 삶을 주관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이길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다윗처럼 하나님의 의로 내 삶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런 목적 아래 기록되고 전해진 성경, 그리고 그 속의 역사서는 하나님의 의가 주관하는 삶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다윗의 여정과, 다윗의 마음과 순종은 우리 새사람의 표상이다. 달리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목적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게 존재의 목적인 사람에게 있어 다윗의 모습, 예수님의 본성은 표상이다. 여기에 반대하고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을 사람이 좇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삶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존재가 존재의 목적을 벗어나면 그건 사망이고 폐기물 혹은 쓰레기가 된다. 통신을 목적으로 하는 전화기가 통신이 되지 않으면 폐기물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울의 실패와 죽음은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사울의 죽음으로 종식된 다윗과 사울의 갈등 중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이 몇몇 있다. 우선은 사울의 불순종이다. 사실 사울은 이방신을 섬기는 왕으로 분류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건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다. 이건 오늘날 신앙인들이 깊이 유념해야 하는 모습이다.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이게 문제인 더 큰 이유는 좋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세상적이라는 데 있다. 사울이 세상 기준으로 보기에 좋은 소와 양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살려둔 게 이런 성도들의 신앙을 설명한다. 이건 아주 중요한 교훈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늘 새겨서 기억해야 하는 말씀이자 교훈이다.
다윗 역시 많은 교훈을 준다. 물론 반면교사의 사울과 달리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은 당연하게도 골리앗과 맛서는 모습이다. 용감한 모습이 핵심이 아니다. 그가 용감해야 했던 이유, 골리앗과 맞선 이유와 골리앗을 대적하는 방식이다. 세상을 상징하는 골리앗은 하나님을 모독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철학에 젖은 세상의 가치관을 골리앗이 보여준다. 다윗은 이것에 분개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런 분노가 있어야 한다. 세상이 하나님을 이긴 것처럼 구는 것에 분노해야 한다. 분노한다는 건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사랑이 있다는 뜻이다. 그게 우리 새사람의 본성인 건 자명하다.
이후 다윗은 사울과의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게 사울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을 사람이 심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름 부은 자는 왕과 제사장 선지자만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름을 부음 받은 존재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거나 무시하는 게 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믿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긍휼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제 사울이 죽었다. 옛사람은 가고 새사람이 내 삶을 주관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부터는 새사람이 겪어가는 신앙의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다윗의 여러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의가 주관하는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윗이 보여주는 여정은 우리 신앙 여정의 모습들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삶의 마다 마디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성경의 구절구절은 내 삶의 모습이고, 내 이야기이며, 내 삶의 목적과 의미를 설명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떠나거나, 이 말씀과 나의 삶이 다르면 곤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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