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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2 – 두려워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0. 22. 10:00 Writer : 김홍덕

(18:1-11)

바울 사도는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른다. 고린도는 여러모로 성경에서 유명한 지역이다. 이 고린도에서 바울 사도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유스도를 만난다. 또한 그리스도라는 회당장이 예수를 믿게 되어 바울 사도는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전했는데 그 기간이 16개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오래 머물러 있었던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임하셔서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에서 선교활동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곳에 머무는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 일행을 대적했고, 바울 사도는 유대인을 향해 "너희 피가 너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일갈하면서 자신은 이방인에게로 갈 것이라 말했다. 바울 사도가 더 이방인에게 집중하게 된 셈이다. 하나님의 환상은 이런 유대인들의 대적과 핍박에 대한 위로였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행 18:9)

 

사람들은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염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신다는 약속으로 해석한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일은 시험에 낙방한다거나 건강 악화처럼 육신의 평안을 해치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을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아 종교적인 이유로 육신이 구속되기도 하는 시대였기에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결국 죽임 당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육신의 평안을 담보하시는 말씀이 아닌 셈이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함께 잠잠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주목할 만하다. 무엇을 하기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 두려워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 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이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두려움 없이 계속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므로 당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니라.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라. 어둠 속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요 12:35)

 

사람은 인생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두려워하고, 원치 않는 불행을 만날까 두려워한다. 이 모든 두려움은 불확실성에서 오고, 불확실성의 근원은 인생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무엇에 사용하는 것인지 모르는 기계를 다루듯 인생을 살고 있기에 기계가 어떤 이상 반응을 할지 몰라 여러 보호구를 입고 대응하듯이 재물을 모으고, 보험을 들고, 노력해서 불확실성이 조금이라도 덜한 직장과 삶의 형태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그 말씀들이 육신에 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이 아니다. 그게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라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 미궁에 빠지고 결국은 순교한 바울, 베드로, 야고보와 같은 사도는 또 어떻게 조명해야 할지 모순에 빠진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두려움은 사람이 생각하는 육신의 불행이 아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건 우리에게 인생의 목적을 밝히 말씀하셨기 때문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빛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예수님도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고 하신 것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사람을 빛의 자녀라고 하신 것도 모두 이 맥락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바울 사도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이나, 여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신 건 그들이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밝음 속에 있다는 보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밝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이 자기 육신()이 된 사람에겐 불확실성이 없다.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은 없는 것이다.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이걸 보증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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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6-34)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울 사도는 아덴이란 지방에 이르렀다. 이 지방의 사람들은 종교성이 많아서 여러 신을 섬겼는데 그중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도 있었다. 반면에 이 지방의 사람들은 외국인이 전하는 가장 새로운 것을 듣는 것 외에는 시간을 쓰지 않았다고 할 만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 곳은 아니다. 섬기는 신이 많다는 건 문제의 근원을 보는 시각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 특징이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하니 어리석은 신앙이라 우습게 볼지 모른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이것과 같은 뿌리의 말들이 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 사해 주시고'라는 기도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있나, 최선을 다하는 거지' 혹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라는 말이다. 교회에 좀 다녔다고 말할 정도면 분명히 들었을 말들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이상한 말들이 경건한 말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방문한 아덴 지방 사람들이 보여준 습성을 지금은 오히려 경건하게 취급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칭하시는지에 늘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게 있는 존재나 오해하는 존재로 믿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칭하는 말들은 정확히 우리의 정체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시인하면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말씀이 이를 보증한다. 내가 하나님이 보시는 그대로의 존재였다는 걸 시인한다는 건 하나님의 의와 법에 순종한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영혼을 가리켜 늘 어둡고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하신다. 제대로 보는 게 없고 제대로 모른다는 뜻이다. 알아야 하는 하나님의 의와 뜻을 모른다는 걸 말씀하심이다. 그렇게 어두운 사람이니 세상의 신을 다 알 수 없다. 그렇다 보니 '알 수 없는 신'에게도 제사를 드려 혹시 자신이 놓친 무언가를 대비하려 한다. 이를 대변하는 말이 바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벌은 받기 싫은데 벌 받을만한 죄를 지었는지조차 모른다는 걸 스스로 실토하는 셈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하나님께서 자신을 늘 ''이라 하시는 건 빛 아래서는 모든 게 선명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하신 건 모든 게 선명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라는 의미인 게 분명하다. 모르고 지은 죄 같은 개 풀 뜯어 먹는 말로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퉁치려는 건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지 경건한 신앙이 아니다. 아울러 그런 신앙은 아덴 사람들처럼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것이지 빛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숨기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의 법과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거나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며 뜻을 감추고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답을 알려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뜻을 성경 시작 부분에서 먼저 분명하게 말씀하신 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순종뿐이다. 알지 못하는 신,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다는 말, 모르고 지은 죄를 사해 달라는 기도는 모두 내가 하나님의 의 밖에 있다는 실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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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5) 데살로니가 vs. 베뢰아

간수의 집에서 나온 바울 사도와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이른다. 데살로니가에서도 규례에 따라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했다.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 중 일부가 바울과 실라를 좇았다. 반면에 유대인들과 불량한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빌미로 소동을 일으켰고, 바울이 머무른 아손이란 사람의 집에까지 가서 바울과 실라를 헤치려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손을 송사했고, 아손은 보석금을 내고서야 풀려나는 소동을 겪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과 실라가 머문 베뢰아 사람들은 달랐다. 바울 사도가 전한 말씀을 듣고 '과연 그런가 하여' 날마다 상고했다. 그중에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베뢰아까지 따라와서 소동하자 바울만 먼저 아덴으로 떠나고 후에 베뢰아에 있던 실라와 디모데를 아덴으로 부르는 불편을 겪게 된다. 말씀이 과연 맞는 말인지 생각도 하지 않으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행하게 된다.

 

우리는 성경을 쉽게 접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낮아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문자 그대로 읽을 뿐인 상태다. 어떤 글이나 책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건 의미가 없다. 행간을 읽어야 한다. 체납자의 자동차는 압류한다는 법은 세금을 잘 내라는 것이다. 행간을 읽지 못하고 문자대로 읽으면 압류를 본질로 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사람은 세상도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안다. 이런 사람에게 영광은 높고 평안한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이게 진리이고 의로움이다. 그 진리와 의로움으로 보면 하나님 아들은 황금마차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의 모든 임금 위에 군림하는 존재다. 이 세계에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는 건 자기 세계가 망하는 것이다. (세상의 종말 후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의도하는 종말이 이 세계의 종말이다) 복음을 심히 핍박한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이나 소동을 일으킨 데살로니가 사람 그리고 오늘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서 육신의 평안을 위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사람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을 판단함에 있어 일을 일으킨 주체나 핵심적인 원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절도 사건이 있었고 범인이 절도 전과가 있었다면 굳이 '왜 그랬지?'라고 의문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에 그럴 거 같지 않은 사람의 일탈이라면 '?'라고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베뢰아 사람들이 그랬다. 높고 위대한 지경에만 있을 것 같은 하나님인데 그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죄인이 지는 십자가를 졌다는 복음을 듣고 '과연?'이라고 반문을 가졌다. 그랬더니 많은 귀부인과 남자가 믿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성과 상식을 괜히 주신 게 아니다.

 

누구나 아는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일상 전부를 기쁜 감정으로 살 수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 생각해 봐야 한다. 이 말씀을 직접한 바울 사도 역시 여러 차례 다툼이 있었다는 것도 의문을 키운다. 그런데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닥치고 항상 기뻐하려고 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순간 율법이 된다.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시도기 때문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묵상하는 법을 더 이야기한다면, 사람이 '항상'이라는 빈도 부사 그대로 기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묵상해야 한다. 우리가 행위로 이걸 지킬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잘 아시는 게 분명할 뿐 아니라, 노력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걸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며 그렇게는 의로워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항상 기뻐하라고 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법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유추하고 그걸 알려고 해야 한다. 사람이 알아야 하는 건 이런 하나님의 뜻이다. 이 의문 정답은 존재가 '항상 기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무작정 믿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아바타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의에 순종한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간혹 말하는 자유 의지라는 단어는 이런 의미라면 맞지만,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한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선악과를 먹는 행위다) 그저 말 잘 듣는 존재가 필요했다면 아바타나 최면에 걸린 사람이면 충분하다. 성경도 그렇다. 컴퓨터에 윈도우를 설치해서 윈도우용 PC를 만들 듯 사람에게 성경을 설치하듯 주입해서 태어나게 하시면 되는 데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그걸 못하실 하나님도 아닌데.

 

우리는 신학교를 졸업한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된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학문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전한 복음 곳곳에 있는 의문들을 안고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새 그 의문들은 기독교 신앙 세계에서 '방 안의 코끼리'가 되었다. 죄사함 받았다면서 기도할 때 회개로 시작하라는 설교를 듣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은 실수도 않으신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은 늘 잘못되었다고 기도하는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 예수님께서 분명히 성령이 오시면 나의 말을 다 알게 될 것이라 하셨음에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신학이란 학문으로 공부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신성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을 두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 안에는 구원이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엄청난 일이며 일생의 모험이다. 죽어서 당면할 영원의 개념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존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의문을 해결하지 않고 대충 남들 따라 교회에 가서, 좁은 길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묵살한 채 많은 사람이 다니는 교회와 그 교리에 몸담고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 듯이 안일하게 있을 일이 아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에 관한 의문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어떻게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죄인이 되었는가?>라는 것과 <내가 그 예수를 믿고 있는 게 맞는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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