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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 19:7)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여기에 예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 외에 구원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말씀에 의해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사람들,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지는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는데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오해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신념을 가지고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안 해도 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 역시 십자가를 지는 일은 선택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예외적 상황이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지 않아도 되는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그리스도인데, 그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와 목적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표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낮아지고 네가 옳다고 시인하므로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겸손한 마음이다. 이 마음이 육신이 된 존재가 그리스도기 때문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를 심판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어 있다.

 

십자가를 지신 이 유일한 이유가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질 수 없다. 부모가 더 큰 힘과 능력에도 아이에게 굴복하는 본성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절대적 권능에도 어리석은 주장 앞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는 본능을 가진 생명이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의 본능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었다. 이 놀라운 비밀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는데 그리스도의 본성과 정체성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해서 표현하고자 한 하나님의 성품

 

예수님께서 육신을 내어주신 건 우리도 육신을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으니 잔말 말고 너도 하라는 식의 말씀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단지 그리스도로 사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육신을 내어준다는 게 차비를 대신 내듯 대신 죽어주는 걸 한정하는 게 아니다.

 

사람의 관계에서 네가 옳으면 나는 육신으로 수고하게 된다. 군대를 생각하면 쉽다. 부부간에 다툼이 없으려면 누군가가 먼저 육신으로 수고하면 된다. 아내를 위해 남편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면 아내가 더 옳은 위치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남편이 그저 음식물 쓰레기를 보면 당연히 치우면 된다고 생각하고서 치우면 적어도 이런 일로 다투지는 않는다. 그리고 서로가 이런 마음으로 살면 싸우는 게 더 힘든 일이 된다. 이런 놀라운 낮아짐이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구원이란 이런 삶이 본성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로 거듭남이다.

 

상대를 옳게 여기고 나를 낮추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게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 세례이자 거듭남이다.

 

성령 강림, 성령 세례는 사람이 이런 삶을 사는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노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본성이 그런 사람이 되게 한다. 이게 십자가를 지는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을 성령 세례를 받은 신앙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사도행전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 세례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게 하는 세례 곧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만 세상에서 이기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과 믿음이나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 그리고 날마다 회개하는 신앙은 이 세계를 모른다. 다시 분명히 말하거니와 모른다. 그래서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하지 못한다.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성령 세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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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 19:7)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란 말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수학의 무정의 용어처럼 일상이 된 말이다. 그냥 상용구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라는 표현은 의미를 매우 깊이 새겨야 한다. 대충 넘어가면 안 된다. 예수님은 분명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지만 신앙하는 사람이 그 예수를 믿는지는 다른 이야기다. 세상의 가난을 해결하는 메시아가 예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분명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아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시험에 합격하고, 부유하고 평안하게 되며,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기를 기도하는 신앙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실패했다는 의미다. 그런 예수님께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구한다는 건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이지 신앙하는 게 아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고 증거다. 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는 걸 구하는 건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누가 졌던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는 귀신이나 사탄을 쫓아내는 퇴마의 상징도, 세상의 성공을 방해하는 걸림돌을 해결하는 능력의 부적도 아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패배자의 상징이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도무지 쓸모가 없어서 죽여 버려야 하는 존재를 달아 처형하는 형틀이 십자가다.

 

자신은 늘 교회에서나 집에서 또 생각나는 순간마다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바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는 건 어느 모로 보나 모순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라는 말이 그런 모순으로 회칠 된 채 기독교 신앙의 교리와 상용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이 어두움에 있다고 하는지 아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형태다. 자신이 이 신앙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면 구원은 없다. 심지어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착각마저 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의미도 모른 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학력이 낮은 사람이 내는 전문적인 의견을 신뢰하지 않는다. 한 세계의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게 확인되면 크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생과 세상에서 실패해서 남이 내 목숨을 빼앗는 처지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그렇게 쉽게 인생을 넘어 영혼의 구주로 믿는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를 정말로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런 사람이 교회 문턱을 넘어섰다는 그 하나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걸 신앙이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렇게 넘어선 교회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고 평안하기를 구하고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모순인데 그걸 신앙이라 말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고 살고 있다. 이 심각한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이건 성경이나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적 논리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모순적인 신앙은 여러 문제를 자아낸다. 앞서 말한 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을 구하는 근원적인 모순 외에도 구원받았다면서 항상 회개하고, 예수님을 형제라 또 하나님을 아버지라 말하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실토한다. 그저 노력할 뿐이라고 죄책감에 절은 실토를 신앙의 겸손으로 포장까지 하고 있다. 만 가지를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모든 걸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하신 말씀만 적용해도 오늘 또 회개하는 자신은 온전한 구원의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지만 그걸 알 정도면 오히려 자기 죄를 시인한 지경에 이른 사람이다.

 

성령 세례의 결정적인 증거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의 핵심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정체성은 이렇게 중요하지만, 그냥 뇌까리고만 있다. 오늘도 더 이상 낮고 천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모든 경건을 가장한 신앙들이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다. 자신이 이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모독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그것에서 구원이 시작된다. 그 구원이 시작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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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 19:7)

성령으로 받는 세례라는 의미의 성령 세례는 세례 요한이 가장 먼저 언급한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님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 성령을 받은 사도들의 시대에 성령 세례는 물세례와 명확하게 구분되었고, 이 구분을 18장 후반에서 19장 초반까지 성령 세례에 관해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이는 사도행전이라는 성경 자체가 성령의 역사를 증언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어떤 분이며, 성령을 받은 게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진정한 구원이란 성령을 받는 것이며, 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걸 설명하는 게 사도행전의 의도며, 이 의도에 비추어 보면 결국 성령을 받는다는 게 성령 세례며 이것이 구원과 교회를 이루는 성도의 기본 정체성이자 출발이다. 성령 세례는 신앙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아니라 구원의 기본이며 구분이다.

 

성령 세례는 신앙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아니라 구원의 자격

 

그렇다면 성령 세례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앞서 글에서 먼저 설명하였는데,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본능으로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신앙의 단계를 굳이 나눈다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삶 -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삶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은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사는 삶을 말한다. 바로 거듭남이다.

 

신앙의 단계를 굳이 나눈다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 –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삶 -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삶

 

여기서 특히 구분해야 하는 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이게 뭐 특별히 구분할 것인가 싶기도 할 것이고, 우리가 믿는 예수는 당연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인데 별스럽게 군다 싶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베드로 사도도 이 둘 사이에서 죽을 정도로 고민하고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신앙을 비교도 할 수 없는 우리가 태연하게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 대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변화산에 오르시긴 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이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셨고,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고 고백해서 칭찬받았다. 그러나 이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했을 때 베드로는 만류했고,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베드로를 '사탄'이라고까지 하면서 책망했다.

 

베드로의 칭찬과 사탄이라고 하신 책망 사이에 있는 유일한 것 바로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

 

이 장면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큰 차이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는 별다른 감응이 없다. 성령 세례에 관심이 없다는 의미이자 성령 세례를 모른다는 뜻이다. 그건 사도행전이 의도하는 바에 비추어 보면 명백히 구원이 없다는 증거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이때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까지 깊은 갈등의 세월을 보낸다. 성경을 보며 베드로의 이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게 무엇인지 고민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가 빌라도의 뜰에 가서 확인하고자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왜 사람들에게 심판을 받아 낮은 자리로 끌려가는지를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엠마오로 도망갈 정도로 이걸 알 수 없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그리스도로 전하는 베드로의 변화는 아주 중요한 전환

 

그랬던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니 사람들 앞에 일어서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담대하게 전했다. 이 한 사도의 변화가 성령이 누구신지, 성령강림과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된다고 한 게 무엇인지 설명한다. 이뿐 아니라 사도 바울 역시 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걸 전하므로(13) 사도들이 그를 사도로 인준했다.

 

지금은 어쩌다 그저 상용구가 되어버린 "십자가에 달린 예수"라는 이 한 표현은 극한 순교를 당하면서도 전한 사도들의 복음 중의 복음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인지 아닌지가 나의 구원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하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고, 성령으로 잉태된다. 예수님께서도 이 일이 우리에게 있기에 가시는 게 우리에게 유익이라 하셨고, 성령이 오셔서 이 비밀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성령 세례와 구원을 받은 것

 

그러므로 이걸 모른다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면 당연히 성령 세계를 체험했으니 자기 안에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너무나 상식적으로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성령 강림이 무엇인지와 성령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성령이 알게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알 수밖에 없다.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면, '십자가에 달린'이라는 표현이 이토록 중요한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건 당연히 구원받지 못한 신앙이다. (다음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이야기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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