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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41)

사도행전 15장 마지막 부분에는 '정말인가?' 싶은 사건이 있다. 바로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서로 다른 길로 전도 여행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툼의 원인은 1차 전도 여행 도중에 돌아가 버린(13:13) 마가복음을 기술한 것으로 알려진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동행 여부였다. 행위나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걸 확실히 한 초대교회의 파송을 받아 떠나는 길인데 두 사도가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결별한 모습이 복음 안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은 사건이었다.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DALL-E가 그린 그림)>

 

바울 사도에게 바나바는 은인 중의 은인이다. 바울이 회심했을 초기 교회는 바울을 믿지 않았다. 그런 바울의 신원을 보증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바나바의 보증으로 바울이 사도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9) 그런 바나바가 이전에 바울을 보증했듯이 마가를 보증했지만 바울 사도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은혜를 잊은 듯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들은 인내하고 말 한마디도 선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생경할 수 있다.

 

이런 모습에 우리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런 상황을 의아해하는지는 알 수 있다. 바로 행동이다. 늘 언급했듯이 행동은 의를 표현하는 수단 혹은 도구 혹은 형식이다. 감정 역시 그렇다. 그러니까 '?'를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건 곧 외모로 사람과 상황을 판단하는 습관 때문에 우리가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을 의아하게 본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행동만으로 선함을 가늠한다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을 엎으신 건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저 예수님이니까 괜찮다? 그런 관점은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기에 성경을 다 지킬 수는 없고 노력하는 것뿐이다"라는 생각과 같다.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성경은 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십일조와 돼지고기처럼 말씀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

 

화내는 행위가 성경의 쟁점이 아니라 무엇에 화를 내느냐가 쟁점이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은 어떻게 하면 복음을 더 잘 전할 것인지의 문제이지 상대에 대한 갈등이 아니다.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한 의견의 차이다. 두 사람이 결별했지만 둘 다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후일에 바울 사도는 후에 바나바에 대한 존경과 우정을 표했고(고전 9:6), 마가도 동역자로 받아들인다. (4, 딤후 4) 또한 바나바를 일컬어 서로 화평하는 일로 덕을 세운다고(14:19) 했다.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았기 때문이고, 서로가 거듭난 생명이란 걸 알고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도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본다면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물론 없으면 더 좋은 상황이란 건 맞지만, 그렇다고 복음 안에 갈등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이 갈등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갈등과 다른 건 서로의 중심을 믿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는 "말을 그따위로 하는 게 어딨느냐?"와 같은 말로 더 커지는 세상의 다툼과 완전히 다르다.

 

예수 믿으면 사람 사이에 갈등조차 없을 것이라는 환상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가 모욕을 당한다면 다윗처럼 분기탱천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상을 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면 그러면 안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는 목숨도 버릴 수 있고, 화도 낼 수 있지만, 자기 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 없는 생명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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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하나님의 영광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30. 22:22 Writer : 김홍덕

영광'나타나다'라는 말이다. (헬라어 독사(δόξα) '나타나다'라는 의미) 실체가 드러났는데 사람들이 높이 여기게 되는 걸 영광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함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다만 사람들은 이 위대함과 높으심은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듯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신인지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밝은 빛이 비취고, 몽환적인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걸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했다. 그건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신앙인들 역시 그렇다. 그래서 뭔가 기적적인 것, 보통 사람이 잘할 수 없는 결과를 도출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라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아주 비싸고 귀한 자재로 교회를 건축하거나 엄두도 내기 힘든 가격의 파이프 오르간을 교회에 설치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게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이냐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영광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나ㅏㅈ고 천한 십자가를 지시면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일로 십자가의 영광이 나타나는지를 살펴야 한다.

 

어떤 분위기나 기적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실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히셨다. 스스로 있다는 말은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인데, 이는 존재의 목적을 스스로 가졌다는 뜻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자기 스스로가 존재의 목적을 정하거나 존재성을 선택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전능자(자칭) 중에 이렇게 자기 정체성으로 밝힌 신은 하나님이 유일하다. 하나님이 자신을 유일한 신이라고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관해서는 앞서 <거룩>을 이야기할 때 상세히 다루었었다.

 

존재의 신이라는 건, 존재 정체성을 의로 여기는 신이라는 뜻이다. 이는 착한 일을 하면 인생에 필요한 복을 주고, 악한 행동을 하면 인생에 필요한 것을 앗아 가는 벌을 주는 일반적인 신의 개념과 전혀 다른 성품을 가진 신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신은 그런 신이 있다는 게 아니라 사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는 사람이 조각한 신이다. 이런 신이 생각하는 의와 선과 악의 기준은 <행동>이고 행동의 목적은 육신의 복락이다. 존재가 아닌 행위를 보고 의로움을 판단하는 신을 믿는 세계는 이렇다.

 

이렇게 존재가 아닌 행위와 그 공로를 의로 여기고 육신의 복을 반대급부로 제공하는 신과 그를 신앙하는 세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기에 사람이 조각한 행위의 신을 믿는 허구의 세계와 정체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의 신은 존재의 정체성을 의로 믿는 세계에 임하시는 게 지극히 상식적이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영광 역시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게 드러나는 영광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하기를 구한다는 건 언제나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라는 걸 아는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으로 사는 삶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건, 내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겠다"라는 고백을 끌어내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 그 삶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단 하나의 하나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존재의 신이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영이시기에 물리적 실체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드러내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육신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고자 했는데, 그 뜻하신 바가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 나타남이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함축되는데, 결국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게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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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35)

예루살렘교회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베드로의 말에 야고보 사도가 화답하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인에게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용납하기로 하고, 이를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실라와 유다(바사바)를 통해 서신으로 안디옥 교회에 전하였니 성도들은 큰 위로를 얻게 되었다. 굳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걸 보증한 것이다.

 

성경의 이런 흐름과 바울 사도가 전한 행위나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많은 이들에게 행위는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서 초창기 교회, 심지어 성경을 정하는 과정에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행위는 버릴 게 아니다. 정말로 생명의 법을 안다면 행위를 버릴 수 없고, 행함이 없다면 죽은 생명이란 걸 이해하게 된다. 행위는 살아있어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위를, 몸 쓰는 걸 귀찮아한다. 돈과 권력이 좋은 건 자기 몸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자기 몸을 드리는 것이다. 여기서도 세상과 복음의 가치관 차이가 드러난다. 몸을 움직이기 귀찮은 이유는 억지로 하기 때문이다. 하기 싫은데 돈이나 다른 이유 때문에 억지로 하는 삶은 사람을 허무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떻게든 몸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추구한다.

 

그러나 본능에 따른 행동은 다르다. 본능 때문에 하는 건 자기가 아무리 귀찮게 여겨도 결국은 하게 되어 있다. 화장실 가는 게 제아무리 귀찮아도 다 가게 되어 있는 걸 생각하면 본능과 행동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구원을 거듭남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자기 본성이 되면, 그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된다. 그래서 육신이 되는 말씀을 생명이라 한다.

 

성경은 바로 이 생명을 가진 사람이 사는 삶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 일기나 자서전 같이 읽힌다. 자기의 생각과 행동과 삶과 가치가 성경에 고스란히 있기 때문이다. 그건 역설적으로 자기 생각과 삶과 가치가 성경과 다르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는 상태나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이 상태다. 그러니까 구원이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는 건 신앙생활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증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로는 오늘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성경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형식도 예루살렘에서 온 서신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의 성도들에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도 행동을 요구한 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굳이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만 하면 성경이 자기 안에 완성된다. 예수님께서도 성경이 자기를 가리켜 한 말씀이라고 하셨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당연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물(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말씀이 육신이 된다. 그래야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로 살면 성경 말씀이 나의 이야기가 되어 늘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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