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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7)

평생의 동반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난 곳이기도 한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에겐 애증의 교회라고도 할 수 있다. 전도 여행 중 1년 반이나 되는 긴 시간을 보내며 교회를 세웠지만 나중에는 분열로 크게 책망받았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역시나 많은 저항을 경험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고 계속 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여기 곧 고린도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이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백성은 사도들과 같은 레벨의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라는 게 더 맞을지 모른다. 고린도 교회의 일이 기록된 사도행전 18장 후반부터 얼마간 요한의 세례는 알지만 성령 세례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과 두려워 말고 복음을 말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더 그렇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분명하다. 그렇다는 건 세상을 경영하시는 방침 역시 그 목적 중심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획한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 세상은 의미가 있지만, 만약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하나님께 이 세상은 무쓸모의 세계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우려하는 대로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한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를 표현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아들이니 당연한 이치다. 어쩌면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세상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보다 귀한 존재는 하나님께 없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바다를 가르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서라도 교훈을 주지만 아들이 하나도 없는 세상이라면 이 세상도 가치가 없는 게 하나님이시다. 사랑과 진노가 교차하는 성경 속 하나님의 모습은 이 하나만 이해하면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라는 설정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물론 그런 이야기에 사람이 환호하는 건 자신이 스스로 규정한 자기 삶의 어려움을 이기는 환상을 대입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류는 늘 세상이 언젠가는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건 대부분 소설이나 영화일 뿐이지만 정말로 세상을 지키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유지하시는 이유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그들이기에 그들이 있어 세상이 망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세상을 구하는 건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기 안에 있는 본성대로 살 뿐이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가졌지만, 항상 상대가 옳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자기 삶의 주변에서 남들보다 더 육신으로 수고하면서 낮은 자세로 살아간다. 그들에게 그런 삶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것일 뿐인데 거시적으로 보면 세상을 구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사람들이 이걸 알리 없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곳곳에 있다. 굳이 엘리야의 때의 7,000명을 소환하지 않아도 아직 세상이 망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실 명분을 제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많다. 또 하나 긍정적인 요소는 그들로 인해 하나님을 믿게 될 사람 또한 많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고린도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고 하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세상을 볼 때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인생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의 이치는 명확하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지혜, 세상을 이기는 형통한 삶을 약속하신 건 하나님 믿으면 딴 주머니에서 따로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면 세상과 사람을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스레 가지는 능력이다. 결국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이 하나가 모든 것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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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2 – 두려워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0. 22. 10:00 Writer : 김홍덕

(18:1-11)

바울 사도는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른다. 고린도는 여러모로 성경에서 유명한 지역이다. 이 고린도에서 바울 사도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유스도를 만난다. 또한 그리스도라는 회당장이 예수를 믿게 되어 바울 사도는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전했는데 그 기간이 16개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오래 머물러 있었던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임하셔서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에서 선교활동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곳에 머무는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 일행을 대적했고, 바울 사도는 유대인을 향해 "너희 피가 너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일갈하면서 자신은 이방인에게로 갈 것이라 말했다. 바울 사도가 더 이방인에게 집중하게 된 셈이다. 하나님의 환상은 이런 유대인들의 대적과 핍박에 대한 위로였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행 18:9)

 

사람들은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염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신다는 약속으로 해석한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일은 시험에 낙방한다거나 건강 악화처럼 육신의 평안을 해치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을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아 종교적인 이유로 육신이 구속되기도 하는 시대였기에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결국 죽임 당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육신의 평안을 담보하시는 말씀이 아닌 셈이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함께 잠잠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주목할 만하다. 무엇을 하기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지, 두려워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 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이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두려움 없이 계속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므로 당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니라.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라. 어둠 속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요 12:35)

 

사람은 인생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두려워하고, 원치 않는 불행을 만날까 두려워한다. 이 모든 두려움은 불확실성에서 오고, 불확실성의 근원은 인생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무엇에 사용하는 것인지 모르는 기계를 다루듯 인생을 살고 있기에 기계가 어떤 이상 반응을 할지 몰라 여러 보호구를 입고 대응하듯이 재물을 모으고, 보험을 들고, 노력해서 불확실성이 조금이라도 덜한 직장과 삶의 형태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그 말씀들이 육신에 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이 아니다. 그게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라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 미궁에 빠지고 결국은 순교한 바울, 베드로, 야고보와 같은 사도는 또 어떻게 조명해야 할지 모순에 빠진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두려움은 사람이 생각하는 육신의 불행이 아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건 우리에게 인생의 목적을 밝히 말씀하셨기 때문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빛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예수님도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고 하신 것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사람을 빛의 자녀라고 하신 것도 모두 이 맥락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바울 사도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이나, 여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신 건 그들이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밝음 속에 있다는 보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밝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이 자기 육신()이 된 사람에겐 불확실성이 없다.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은 없는 것이다.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이걸 보증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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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6-34)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울 사도는 아덴이란 지방에 이르렀다. 이 지방의 사람들은 종교성이 많아서 여러 신을 섬겼는데 그중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도 있었다. 반면에 이 지방의 사람들은 외국인이 전하는 가장 새로운 것을 듣는 것 외에는 시간을 쓰지 않았다고 할 만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 곳은 아니다. 섬기는 신이 많다는 건 문제의 근원을 보는 시각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 특징이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하니 어리석은 신앙이라 우습게 볼지 모른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오늘날 기독교 안에 이것과 같은 뿌리의 말들이 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 사해 주시고'라는 기도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있나, 최선을 다하는 거지' 혹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라는 말이다. 교회에 좀 다녔다고 말할 정도면 분명히 들었을 말들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이상한 말들이 경건한 말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방문한 아덴 지방 사람들이 보여준 습성을 지금은 오히려 경건하게 취급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칭하시는지에 늘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게 있는 존재나 오해하는 존재로 믿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칭하는 말들은 정확히 우리의 정체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시인하면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말씀이 이를 보증한다. 내가 하나님이 보시는 그대로의 존재였다는 걸 시인한다는 건 하나님의 의와 법에 순종한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영혼을 가리켜 늘 어둡고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하신다. 제대로 보는 게 없고 제대로 모른다는 뜻이다. 알아야 하는 하나님의 의와 뜻을 모른다는 걸 말씀하심이다. 그렇게 어두운 사람이니 세상의 신을 다 알 수 없다. 그렇다 보니 '알 수 없는 신'에게도 제사를 드려 혹시 자신이 놓친 무언가를 대비하려 한다. 이를 대변하는 말이 바로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벌은 받기 싫은데 벌 받을만한 죄를 지었는지조차 모른다는 걸 스스로 실토하는 셈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하나님께서 자신을 늘 ''이라 하시는 건 빛 아래서는 모든 게 선명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하신 건 모든 게 선명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라는 의미인 게 분명하다. 모르고 지은 죄 같은 개 풀 뜯어 먹는 말로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퉁치려는 건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지 경건한 신앙이 아니다. 아울러 그런 신앙은 아덴 사람들처럼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것이지 빛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숨기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의 법과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거나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며 뜻을 감추고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답을 알려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뜻을 성경 시작 부분에서 먼저 분명하게 말씀하신 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순종뿐이다. 알지 못하는 신,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다는 말, 모르고 지은 죄를 사해 달라는 기도는 모두 내가 하나님의 의 밖에 있다는 실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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