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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예수님의 시험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10. 08:27 Writer : 김홍덕

(3) 세상의 모든 영광을 구하라

금식 후 예수님이 마귀에게 받으신 세 번째 시험은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줄 테니 자기에게 절하라는 것이었다. 마귀를 경배한다면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는 의미인데, 이게 생뚱맞은 소리 같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8-9)

 

놀라운 건 예수님께서는 이 시험을 이기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 오늘날 신앙인들은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 예수님과 달리 마귀의 시험에 완전히 굴복한 것이다. 언제나 예수 이름으로 세상 영광을 구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험을 이겨낸다고 믿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아주 흔하게 이렇게 말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잘 살고 성공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라고. 듣기에는 너무 그럴싸한 말이지만 이런 가치관이 바로 금식 이후에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번째 시험이란 걸 알지 못한다. 한편으론 그걸 안다면 그렇게 말하진 않을 것이긴 하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믿음은 마귀의 시험에 패배한 것

 

세상 영광에 대한 사람의 열망은 말 그대로 무궁하고 무한하다. 교회 다니기 전에는 자기 힘으로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우상에게 의지하다가 예수님의 구원을 믿는다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하나님께 세상의 영광을 구한다. 더욱이 세상에서 자기가 영광을 얻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라며 하나님의 영광을 참칭한다. 믿는 신이나 대상이 바뀌긴 했지만, 믿는 목적은 같다. (사람이 종교를 바꿀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이렇게 사람들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는커녕 그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라는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랬더니 천사들이 예수님을 수종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0)

 

하나님을 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의지해서 세상 영광을 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뜻에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이셨다. 바로 세상에서 높아지는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지고, 사람이 주장하는 주장에 나의 수고, 나의 육신을 내주는 사람, 종과 같이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뜻을 내 삶의 목적과 의미로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데 있지 않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영광을 얻는 게 은혜라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말 그대로 저주의 아이콘일 뿐 어떤 관점에서도 영광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영화롭게 되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더 나아가 아직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걸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제자들마저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에 있지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데 있지 않다. 십자가를 지므로 만국과 세상 영광을 얻어야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시험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건 십자가를 진다는 것, 십자가에 영광이 있다.

 

십자가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단 하나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섬기라고 하심으로 시험을 이기신 것을 상기한다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므로 세상의 영광을 얻어야 하나님 아들이라는 시험을 이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진다는 게 어떻게 시험을 이기게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는 식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마귀의 시험도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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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30)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자 이어 교회가 세워졌다. 이방인의 첫 교회는 안디옥교회다. 처음에는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아 복음을 전했는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몇몇 사람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왔고, 이를 들은 예루살렘교회에서 바나바를 파송하여 교회를 세웠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인이 참여한 최초의 교회다. 지구촌 전체에 전해진 복음과 기독교의 출발점인 교회라 할 수 있다. 바울 사도도 늘 안디옥교회를 자기 뿌리처럼 생각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객관적 사실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우리는 이때부터 생겨난 <그리스도인>의 의미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적인 용어로 정착했다. 영어로는 Christan인데 이는 a christ를 의미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 언어에는 없지만 서양 언어에는 정관사와 부정관사라는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The Applea apple이 있는데, a apple은 사람이 먹는 사과 과일 즉 실물을 의미하고, The가 붙으면 실물이 아니라 사과라는 과일의 정체성, DNA를 의미한다. 이런 문화에서 비롯된 Christan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 사람을 의미한다. 즉 그 사람을 보니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한 알의 사과를 보면서 사과(The Apple)를 알 듯이.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로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사람을 보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람이 교회 다니더니 부자가 되었다는 인식을 주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아니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사람을 보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

 

안디옥교회에 모인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그렇게 생겨났다면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고, 그 예수님이 보이신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걸 순종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교회에 다니면 병도 낫고 사업이 잘된다는 인식을 좇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낮아지는 십자가가 아닌 높은 걸 추구하는 사람인데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면 안 되는 것이다. 어 괴상한 건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자기 인생의 목적이란 걸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이 시대 속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변질되고 왜곡되었으며 도용당한 상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기를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한다. 자기 교회에 오면 성공한 사람이 많다는 말로 사람을 현혹한다. 그런 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세상에서 실패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과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표현하는 존재다. 삶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낮고 낮은 예수를 표현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서 높아지는 걸 추구하지 않는다. 예수 믿어 성공하면 사람들이 우러러보면서 예수를 믿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린, 세상에서 실패한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고, 자신도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이기려 하지 않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런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그런 그리스도인처럼 자신도 살게 된다. 높은 곳을 추구하는 가치관으로 사니 아닐 것 같지만 성령이 그렇게 하신다. 그게 성령의 일이고, 그렇게 낮아지는 삶이 본성이 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며, 이런 삶을 살기 바라며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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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예수님의 시험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7. 12:33 Writer : 김홍덕

(2)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첫 번째 시험을 성공 못 한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곳(성전 꼭대기)으로 데려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여기서 뛰어내려도 천사가 너를 받들 것"이라며 시험한다. 역시 평범한 육신의 능력 이상을 보여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시험이다.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6)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마귀가 가자는 대로 따라갔을까?' 이유는 그리스도는 항상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언제라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시험을 당한다. 이건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숙명이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몸소 이런 운명을 보이셨다. 말씀을 선포하려 하니 마귀가 시험하고, 십자가에 달리니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당했다.

 

그리스도는 마귀가 예수님에게 그랬듯,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보통의 사람과 다른 능력을 보이라고 하고, 인간이 가진 한계 이상의 능력을 보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을 향한 마귀의 끝없는 시험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죽는 게 정상인 육신을 가진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시중을 들 것이니 무사하리라는 마귀의 시험은 이렇게 우리 일상에 남아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의 한계를 넘는 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두 번째 시험의 본질

 

마귀가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란 시험을 하는 건 하나님 아들에 대한 기준의 차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람은 육신을 연약하고 부족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 상태로는 하나님 아들이라 할 수 없고 돌로 떡을 만들고, 추락해도 다치지 않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 아들이라고 시험한다. 육신에 관해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지는 건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결과다.

 

하지만 하나님은 행위로 성경을 지킬 수 없고 추락하면 다치거나 죽는 육신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사람은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건 사람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고 하나님은 처음 창조한 사람을 보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고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육신이면 하나님의 뜻이 임하여 하나님 아들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신다.

 

마귀의 시험에 빠진 사람의 생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 믿는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교회 다닌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게 아니냐?", "신학은 했느냐?", "직분은 뭐냐?", "성경은 몇 번 읽었느냐?", "십일조는 하느냐?"는 말들은 모두 교리라는 가면을 덮어쓴 교묘한 마귀의 시험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이런 요구는 언뜻 신앙의 성장을 인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아들이라면 남들과 달리 성경을 지키고, 능력을 보이라는 마귀의 시험이다.

 

일반적인 사람의 능력 이상을 할 수 있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시험

 

예수님은 이 시험을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시므로 물리친다. 마귀가 시험하는 상황 속에서 마귀의 구체적인 시험에 답하시지는 않고 거저 시험하지 말라는 말로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을 부족하다고 우기는 건 그 자체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뿌리를 둔 각양의 유혹과 그럴듯한 말은 모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건 마귀의 의도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시험은 실체를 알면 이길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람이 육신의 능력 이상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시험은 단지 사람을 시험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분명한 선언으로 이 시험을 이기셨다. 우리 역시 그렇게 이 시험을 이긴다는 의미다.

 

육신을 가진 사람의 한계와 능력 이상을 보이는 게 하나님 아들이란 생각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이 우리가 받는 시험이자 주기도문에 나오는 시험이다. 주기도문은 하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로 결국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구하는 기도다. 이 간구에 이어 시험에 들지 않기를 함께 구하라고 하셨다는 건 당연히 그리스도로서 받는 시험을 이기기를 구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건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걸 알면 이 시험은 이긴다. 예수님께서 "네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다는 말씀만으로 이 시험을 이기신 게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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