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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

바나바와 결별 후 실라와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난 사도 바울은 생애 전반에서 아주 아끼고 아들처럼 여긴 디모데를 만난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고 어머니(유니게)는 유대인이다. 이런 경우 유대인들은 이방인으로 간주한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이방인이다.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나려 하니 그 지경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고 했다. 불과 얼마 전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에게 할례와 같은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왜 이런 일이 있었을까?

 

바울 사도가 디모데가 할례받는 일에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건 용인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이 정한 규례를 그 지경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지키도록 했다고 했다. 그 결과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고 전하는 바울 사도가 여러 규례를 지켰더니 복음이 왕성해졌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신념을 바꾼 것일까?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할례를 <행했다>라는 행위와 규례를 <지키게 했다>라는 행위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다분히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습성의 유산이다. 또 한편으로 복음은 어떤 규례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를 준다는 막연한 생각이 디모데가 할례받은 일을 의아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런 어색함은 모두 복음을 모르거나 미성숙함에 기인한 것이지 복음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진리기 때문인 건 아니다. 당연히 바울 사도 역시 태도를 바꾼 게 아니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안목으로 보면 여러모로 이상한 성경

 

먼저 왜 디모데는 할례를 받았는지를 생각해 보자. 디모데는 모계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의견들이 있는데 그건 작은 가지일 뿐이다. 율법이나 신약 성경을 행위로 지켜 의로워지려는 신앙은 마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따라가는 출애굽 행렬처럼 아주 경직되어 있다. 말씀을 지키면 안전하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 단순한 구조다. 아주 기계적인 셈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이를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복음은 거듭난 생명의 세계이므로 생명처럼 유연하다. 생명은 같은 상황에서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디모데가 율법의 행위라고 인식되는 할례를 받은 건 생명의 유연함 때문이다. 생명은 유전자가 같아도 반응이 다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해 본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도 같은 경우다.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생명을 가졌기에 둘이 마가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신앙 세계에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지만, 복음 안에서는 부유할 수도 있고 궁핍에 처할 수도 있다. <생명>으로 나면 이렇게 된다. 이건 생명으로 난 사람에겐 보이지만, 행위로 율법과 성경을 지켜 의로워지려는 신앙 안에서 보면 디모데가 할례받은 일은 맞거나 틀리거나 해야 하는 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걸 연구한다. 신학이 얼마나 불의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인 만큼 생명의 유연함을 가지고 있어…

 

그렇다고 복음이 줏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복음은 생명의 법을 따른다. 생명은 어떤 순간에도 자기 DNA를 표현하고 유지하고 지키려고 한다. 그리스도라는 생명도 그렇다. 다만 그 표현은 생명의 개체마다 다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 역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해 가진 모든 본성을 다한다.

 

이는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고 열심인 신앙과 다르다. 노력과 신념은 부족한 걸 메우기 위한 행위지만, 본성에 따르는 건 자기 안에 이미 있는 본성 모두를 쏟아붓는다. 호랑이 무늬가 다 달라도 언제나 호랑이라는 본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과 같다. 행위로 율법과 성경을 지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안목으로 보면 할례를 받거나 받지 않는 둘 중 하나만이 의로운 선택이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된다는 사고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본성은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이 유연함은 아주 자유롭다. 할례를 받아도, 안 받아도 된다는 건 구속되지 않는 자유다. 그런데 이 자유는 아주 남용되기도 한다.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유는 영지주의로까지 브레이크 없이 내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말에 합당한 존재가 되지 않았는데 자기 임의로 신앙의 규례를 폐하면 안 된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의 교회에 지키라고 권면한 규례(16:4)는 할례를 받으라든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게 아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우상이라고 하니 조각한 돌이나 나무에 절하는 것만을 생각하겠지만, 세상에서 성공하겠다는 사람의 욕망을 실현 시킬 대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자 자기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또한 음행은 자기 짝이 아닌 것과 짝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 아닌 걸 인생의 목적과 내용으로 삼는 것이고, 목을 매는 건 머리와 몸을 분리하는 것이니 중풍처럼 하나님의 의가 행위를 주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피는 생명이 함부로 범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거듭난 생명의 본성으로 지키는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완성, 행위로 지키는 율법은 폐기

 

말로 표현한 규례는 같아 보이지만 그 내막은 이렇게 다르다. 그러므로 규례는 함부로 폐기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한 건, 율법의 완성인 복음을 주셨기 때문에 기존의 개념이 폐기되었다는 의미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율법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완성이 성취되므로 행위로 지켜내려는 노력으로 관철된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것이지 율법 자체를 폐기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신앙이 얼마나 유연한지를 반추해 본다면 내가 생명의 법에 따라 살고 있는지, 아니면 벗어나면 안 되는 불기둥, 구름 기둥을 따라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디모데가 할례받는 일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 지극히 복음적이다. 이게 그렇게 보이지 않으면 자기 신앙을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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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41)

사도행전 15장 마지막 부분에는 '정말인가?' 싶은 사건이 있다. 바로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서로 다른 길로 전도 여행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툼의 원인은 1차 전도 여행 도중에 돌아가 버린(13:13) 마가복음을 기술한 것으로 알려진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동행 여부였다. 행위나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걸 확실히 한 초대교회의 파송을 받아 떠나는 길인데 두 사도가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결별한 모습이 복음 안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은 사건이었다.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DALL-E가 그린 그림)>

 

바울 사도에게 바나바는 은인 중의 은인이다. 바울이 회심했을 초기 교회는 바울을 믿지 않았다. 그런 바울의 신원을 보증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바나바의 보증으로 바울이 사도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9) 그런 바나바가 이전에 바울을 보증했듯이 마가를 보증했지만 바울 사도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은혜를 잊은 듯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들은 인내하고 말 한마디도 선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생경할 수 있다.

 

이런 모습에 우리가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런 상황을 의아해하는지는 알 수 있다. 바로 행동이다. 늘 언급했듯이 행동은 의를 표현하는 수단 혹은 도구 혹은 형식이다. 감정 역시 그렇다. 그러니까 '?'를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건 곧 외모로 사람과 상황을 판단하는 습관 때문에 우리가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을 의아하게 본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행동만으로 선함을 가늠한다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을 엎으신 건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저 예수님이니까 괜찮다? 그런 관점은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기에 성경을 다 지킬 수는 없고 노력하는 것뿐이다"라는 생각과 같다.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성경은 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십일조와 돼지고기처럼 말씀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

 

화내는 행위가 성경의 쟁점이 아니라 무엇에 화를 내느냐가 쟁점이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은 어떻게 하면 복음을 더 잘 전할 것인지의 문제이지 상대에 대한 갈등이 아니다.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한 의견의 차이다. 두 사람이 결별했지만 둘 다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후일에 바울 사도는 후에 바나바에 대한 존경과 우정을 표했고(고전 9:6), 마가도 동역자로 받아들인다. (4, 딤후 4) 또한 바나바를 일컬어 서로 화평하는 일로 덕을 세운다고(14:19) 했다.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았기 때문이고, 서로가 거듭난 생명이란 걸 알고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도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본다면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물론 없으면 더 좋은 상황이란 건 맞지만, 그렇다고 복음 안에 갈등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이 갈등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갈등과 다른 건 서로의 중심을 믿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는 "말을 그따위로 하는 게 어딨느냐?"와 같은 말로 더 커지는 세상의 다툼과 완전히 다르다.

 

예수 믿으면 사람 사이에 갈등조차 없을 것이라는 환상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가 모욕을 당한다면 다윗처럼 분기탱천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상을 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면 그러면 안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는 목숨도 버릴 수 있고, 화도 낼 수 있지만, 자기 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 없는 생명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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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하나님의 영광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30. 22:22 Writer : 김홍덕

영광'나타나다'라는 말이다. (헬라어 독사(δόξα) '나타나다'라는 의미) 실체가 드러났는데 사람들이 높이 여기게 되는 걸 영광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높으심과 위대함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다만 사람들은 이 위대함과 높으심은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듯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신인지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밝은 빛이 비취고, 몽환적인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걸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했다. 그건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신앙인들 역시 그렇다. 그래서 뭔가 기적적인 것, 보통 사람이 잘할 수 없는 결과를 도출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라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아주 비싸고 귀한 자재로 교회를 건축하거나 엄두도 내기 힘든 가격의 파이프 오르간을 교회에 설치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게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이냐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영광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나ㅏㅈ고 천한 십자가를 지시면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일로 십자가의 영광이 나타나는지를 살펴야 한다.

 

어떤 분위기나 기적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실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히셨다. 스스로 있다는 말은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인데, 이는 존재의 목적을 스스로 가졌다는 뜻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자기 스스로가 존재의 목적을 정하거나 존재성을 선택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전능자(자칭) 중에 이렇게 자기 정체성으로 밝힌 신은 하나님이 유일하다. 하나님이 자신을 유일한 신이라고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관해서는 앞서 <거룩>을 이야기할 때 상세히 다루었었다.

 

존재의 신이라는 건, 존재 정체성을 의로 여기는 신이라는 뜻이다. 이는 착한 일을 하면 인생에 필요한 복을 주고, 악한 행동을 하면 인생에 필요한 것을 앗아 가는 벌을 주는 일반적인 신의 개념과 전혀 다른 성품을 가진 신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신은 그런 신이 있다는 게 아니라 사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는 사람이 조각한 신이다. 이런 신이 생각하는 의와 선과 악의 기준은 <행동>이고 행동의 목적은 육신의 복락이다. 존재가 아닌 행위를 보고 의로움을 판단하는 신을 믿는 세계는 이렇다.

 

이렇게 존재가 아닌 행위와 그 공로를 의로 여기고 육신의 복을 반대급부로 제공하는 신과 그를 신앙하는 세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기에 사람이 조각한 행위의 신을 믿는 허구의 세계와 정체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의 신은 존재의 정체성을 의로 믿는 세계에 임하시는 게 지극히 상식적이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영광 역시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게 드러나는 영광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하기를 구한다는 건 언제나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라는 걸 아는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으로 사는 삶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건, 내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겠다"라는 고백을 끌어내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 그 삶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단 하나의 하나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존재의 신이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영이시기에 물리적 실체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드러내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육신을 가진 사람을 만들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고자 했는데, 그 뜻하신 바가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 나타남이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함축되는데, 결국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게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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