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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5)

야고보의 죽음과 동시에 헤롯은 유월절에 베드로를 죽이려고 베드로에게 쇠사슬을 채우고 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베드로를 구원(옥에서 꺼냈다.)했다. 하나님의 사자가 밤에 옥에 갇힌 베드로에게 와서 띠를 띠고 신을 신고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고 했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자를 따라 두 차례 파수꾼을 지나 무사히 옥에서 나왔다.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성도들이 모인 곳에 찾아갔으나 사람들이 쉽게 믿지 않을 정도의 일이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에 비해 약해 보이는 기적 같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인 건 마찬가지다.

 

세상의 가치는 복음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한다. 특히 자기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적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하나님 혹은 신에게 기적적인 요구를 많이 한다. 그러나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다. 목적과 부합되지 않는 일을 우리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한다. 기적도 마찬가지다. 기적을 일으키는 주체이신 하나님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필요할 때 기적을 일으키신다.

 

기적적으로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헤롯의 핍박으로 옥에 갇혔었다. 헤롯이 핍박한 이유는 낮아지는 걸 의로 여기는 복음인 십자가를 진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사람들이 믿는 건 높은 것을 추구하는 의를 가진 세상 임금인 헤롯이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의에 반한다. 비단 헤롯뿐 아니라 누구라도 세상에서 높아지는 걸 의로 삼고 살아가는 건 하나님의 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옥에서 꺼내셨다. 하나님의 당연한 일이 사람에게 기적이 된 것일 뿐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베드로는 그런 핍박에 갇혀 있을 수 없기에 하나님이 기적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에게 창조한 목적을 알리시기 위해 일하신다. 그게 때로 사람에게 기적이 된다.

 

기적은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만 일어난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벗어난 기적은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또한 괜히 사람을 굴복시키기 위해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모든 경영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는 걸 지향한다. 이 경영과 목적을 위해 필요하면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모든 사람을 죽이실 수도 있다. 어차피 하나님이 창조주고 소유주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피조물인 사람이 인권을 운운한다는 건 우스운 이야기다. 어쨌든 기적은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는 존재가 되는데 필요한 경우에 일어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성령의 역사로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건 반드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저 병을 낫게 하거나, 갑자기 부자가 되게 하시는 성령은 없다. 사도행전의 모든 기적과 역사가 이와 같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분명해진다. 바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높은 자리를 추구하던 사람이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걸 믿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이 일으키시는 기적이다. 이게 신앙 안에서 당연한 말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늘 언급하듯이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고 그 성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위하겠다는 신앙 세계 안에는 이런 믿음이나 생각 혹은 가치나 기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에 대해 바로 이해해야 한다. 이 이해는 단지 기적이라는 하나의 명제를 이해하는 게 아니다. 십자가의 도, 낮아지는 도와 세상 가치 기준으로 낮고 천한 자리가 바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뼈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머리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이건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생명이 바뀌고 본성이 바뀌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정말로 이렇게 정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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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 이후에 받으신 시험은 말씀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네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시험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역시 끊임없이 시험을 받는다. 이렇게 끊임없이 지속된 시험은 십자가에서 끝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저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사람의 고백이 나왔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가정이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이 되어 모든 시험을 이긴다.

 

"네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시험은 십자가를 지므로 완전히 이긴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시험의 마침표인 십자가는 쉽지 않다. 엄청난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는 걸 밝히셨을 때, 세상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제자들조차 혼돈에 빠졌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므로 자기 죄가 사해지는 혜택을 중심으로 보기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건 정해진 당연함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며 세상에서 영광 얻기를 구하는 자신을 투영해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실패 그 자체인 죄인 그것도 사형수가 된다는 게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게 여기고 은혜라고 말한다. 이런 건 사실 십자가를 욕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으로 십자가를 진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마귀의 시험은 그리스도(메시아)라면 가난과 질병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문제와 로마의 속국인 상태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그리스도를 향한 본질적 시험이다. 그러나 금식 후 받은 시험에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게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게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셨듯, 오히려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아들과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대한 세상과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친다. 십자가가 모든 시험에서 이김을 얻게 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란 시험과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라는 생각은 같은 DNA

 

그렇다면 십자가는 어떻게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해 유혹하는 시험을 이기게 할까? 그건 그리스도는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인 하나님의 형상이자,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낮아지므로 영광스러워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셨는데, 그 뜻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신의 삶으로) 표현하는 본능을 가진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다. 십자가는 그 본능에 이끌려 간 낮고 천한 자리다. 따라서 십자가는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게 드러나는 자리다.

 

십자가는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게 드러나는 자리

 

마귀의 모든 시험을 진정한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시며 물리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유혹과 시험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물리쳤다. 십자가에 달리시니 사람이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 아들은 십자가를 지는 존재임을 보이시므로 마귀와 세상의 모든 시험, '하나님 아들이라면?'이라는 논쟁과 시험을 종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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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9)

교회가 성장하자 헤롯왕이 핍박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야고보 사도가 칼에 죽임을 당했다. 이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자 세상의 임금이 반응한 형태다. 그렇다면 헤롯으로 대표되는 세상은 복음을 왜 핍박하는 걸까? 그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복음은 세상의 가치에 반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380년 테우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사건을 기독교의 승리로 본다. 하지만 이건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로마는 복음을 핍박하는 게 정상이다. 로마는 높고 강한 것을 추구하고 복음은 낮아지는 걸 의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핍박받고 외면받는 복음이 더 온전한 복음이다. 핍박과 외면이라는 대응 자체가 복음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복음은 세상 가치에 역행하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숭상하고 번영시키며 그 기조에 편승해서 권력을 얻고 유지하려는 세력은 복음을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높은 가치를 추구한다. 다만 무엇이 높으냐는 차이가 있다. 승부나 결정을 위해 가위바위보를 한다. 통상적으로는 바위가 가위를 이긴다. 하지만 가위가 바위를 이기는 걸로 설정한 후 승자와 결정권을 가지게 한다고 문제가 되거나 틀린 건 아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은 다른 사람 위에 서고, 다른 사람을 부리고, 다른 사람보다 부유하고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을 높은 것으로 여기고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다. 낮고 천한 십자가로 갈수록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세상은 높아지는 걸 이긴 걸로 하고, 하나님은 낮아지는 걸 의로운 것으로 여기신다.

 

낮아지는 걸 의로 여기는 복음은 높아지는 걸 의로 여기는 세상이 볼 때 악한 의로움

 

문제는 하나님의 이런 기준은 세상이 볼 때 못마땅하다. 높아지려는 사람은 높아지는 걸 추구하는 사람이 많아야 자기 뜻을 이룰 수 있다. 높은 걸 추구하는 무리 위에서 높아질 수 있지 낮아지려는 사람 위에서 높아질 수는 없으므로 사람이 높아지는데 관심이 없어지면 높은 사람은 힘을 잃는다. 그들에게 이건 치명적이다. 헤롯이나 빌라도나 대제사장이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건 이렇게 그들에게 치명적인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권력으로 이들을 핍박했다.

 

그렇다면 현재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핍박이 헤롯이 야고보를 죽인 이유에서 비롯된 핍박과 같을까? 그렇지 않다. 지금 교회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세상의 핍박은 다른 의를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같이 경쟁하기 때문에 받는 핍박이다. 기독교인들도 모두 높은 곳을 추구하고 있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경쟁이 불공평하거나 기독교인들이 이기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주말에 특근을 계획했는데 한 기독교인이 교회에 간다고 자기는 나오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을 보자. 그렇게 되면 회사나 동료들은 기독교를 비난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헌법에 보장된 자기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 항변할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려는 걸 비난하는 걸 핍박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핍박은 주로 이런 식이다.

 

한 집안에 종교가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모두 종교를 신앙하는데, 모든 종교에는 믿음에 반하면 받는 징벌이 있다. 서로가 자기 종교가 아니면 높은 곳에 오를 수 없다는 징벌을 믿고 강요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가진다는 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모든 걸 무너뜨린다고 생각한다. 결국 높아지려는 욕심에 핍박하는 것이지만, 낮아지려고 해서가 아니라 높아지려는 욕심의 충돌로 인한 것일 뿐 야고보가 순교 당한 이유와는 거리가 먼 일이다. 한 마디로 현대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핍박이라 여기는 핍박은 핍박이 아니라, 같은 파이를 차지하려는 경쟁이고 시기일 뿐이다.

 

기독교인도 회사나 다른 종교를 믿는 가족도 모두 세상에서 높아지는 걸 추구한다. 기독교인도 교회에 와서 늘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긴 자가 되기를 하나님께 그리고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간구한다. 기독교인도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하는 부류일 뿐이다. 그런데 남들 일할 때 교회에 가서 세상의 성공을 간구하는 건 회사 동료가 볼 때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이다. 이기적인 사람을 비난하는 건 사회가 공감하는 일이지 핍박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착각에서 헤어 나와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핍박은 같이 높아지려는 세상과의 경쟁에서 비롯된 투쟁과 시길일 뿐이다.

 

사도행전, 아니 성경의 모든 말씀 속 성령은 사람이 낮아질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걸 알게 하시는 분이다.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낮고 천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십자가에서 깨진 예수님의 육신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므로 말씀의 본체다. 성령은 이걸 알게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것이 높아져야 의로운 세상에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이다.

 

반대로 세상은 언제나 높은 곳을 추구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 어이없게도 낮고 천한 신분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얻으려 한다. 그러면서 같은 걸 놓고 경쟁하는 세상이 자기를 마치 핍박한다고 말한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걸 아는 건 단순히 핍박의 정의를 깨닫는 게 아니라 성경 전부를 아는 것이다.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는 등 복음을 핍박한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핍박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개념이다. 야고보는 높아지려는 세상이 사람이 낮아지는 걸 용납할 수 없기에 죽임을 당했다. 복음은 낮아질수록 더 가치 있고,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분이시기에 육신을 낮고 천한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은 세상이 정말로 감당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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