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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18)

바울 사도 일행이 기도하러 가는 중에 귀신 들린 점치는 여종을 만났는데 점이 신통했는지 그 여종의 점으로 인해 주인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런데 바울 사도 일행으로 인해 귀신이 나가게 되었다. 이에 여종의 주인은 바울 일행을 송사했고,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귀신 들린 여종이 바울을 향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며 소리치는 걸 그치지 않아 괴로워하던 바울이 귀신을 쫓아냈다.

 

 

성경이 귀신 들렸다고 말하는 건 한마디로 정신을 빼앗긴 상태다. 이는 여러 글에서 설명했었다. 정신을 상실했다는 건 목적을 상실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 모두를 일컫는다. 사람에겐 삶의 의미이자 목적인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귀신 들린 사람이다.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을 모른 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귀신 들린 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목적을 상실한 삶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걸 빌립보에서 바울 사도가 만난 귀신 들린 여종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삶의 목적을 잃고 세상의 가치에 메여 산다는 건 곧 주인에게 경제적 도구였던 빌립보의 귀신 들린 여종처럼 세상만 이롭게 한다.

 

성경은 이 여종이 바울을 괴롭혔다고만 말하고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귀신 들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과 남을 괴롭게 한다. 대표적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다닌 거라사 지방에서 무덤 사이에 거하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 가 계시는 동안 산 아래에 데려온 사람 역시 물과 불에 스스로 빠졌다고 했다. 빌립보에서 만난 이 여종도 바울을 괴롭혔다. 나중에 귀신이 떠난 후 이 여인의 모습이 차분한 것으로 보이니 괴롭힌 주체는 귀신이었던 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이 이 여인으로 인해 당한 괴로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실라와 함께 투옥까지 당한다.

 

어떻게 보면 바울을 높이는 것 같은 말을 여종이 하고 있음에도 바울이 괴로웠던 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알아보면서도 귀신에게 또 세상의 종살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여종처럼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칭하며 '너희에게 구원을 전할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본다는 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거듭난 사람에게 큰 괴로움을 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겪는 큰 괴로움이 있는데, 그건 하나님이 모독당하는 것과 사람이 구원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 그리고 사람이 복음을 알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는 걸 보는 것이다. 이 여종을 보면, 자기 자신은 구원받지도 못한 상태인데 바울 사도가 구원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다. 거듭난 사람이 그걸 보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기에 괴로워하고 귀신을 내어쫓았다. 세상 가치에 메여 종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 바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건을 보며 먼저 여종의 상황을 반추해 볼 필요가 여기 있다. 나는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이 내 삶의 목적인가 반추해 봐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인 십자가를 지는 삶이 내 삶의 목적이 아니라면, 나는 세상이란 주인만 살찌우는 귀신 들린 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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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6 – 자주 장사 루디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0. 9. 10:36 Writer : 김홍덕

(행 16:11-15)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이끈 마게도냐에서 전한 복음을 듣고 가장 먼저 하나님을 믿은 사람은 루디아라는 여인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그녀는 유럽 최초로 복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성경의 기록으로만 본다면 그가 처음이라고 해도 특별한 문제가 없다. 루디아는 특이하게 여성인데도 직업이 기록되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루디아 되엔 브리스길라 정도?)

 

루디아는 자주 장사, 그러니까 자주색 옷감을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장에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색인 자주색이 가지는 성경적 의미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성막과 성전을 만드는 규례를 설명한 구약성경에서는 색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볼 기회가 많이 있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사례가 많지 않은 중에 색이 언급되었고, 마침 루디아가 자주 장사인 것도 눈에 띄는 일이다.

 

자주장사 루디아, DALL-E

 

그렇다고 루디아가 자주색 옷감을 파는 사람이어서 구원받았다는 의미로 한정할 일은 아니다. 자주색이 그리스도의 색이라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이시면서 인도한 마게도냐에서 처음 복음을 영접한 사람 루디아가 자주색 옷감 장사라는 사실이 인상 깊었을 테고, 나름 자주색이 가진 의미를 환기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루디아가 구원받은 결정적인 이유를 이야기한다면, 그건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자주색 옷을 사고팔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게 보면 외모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 된다.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음에 순종하여 온 집이 구원받은 유럽 최초의 신앙인 중의 한 명인 루디아의 생업을 보니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자주색 옷감을 사고파는 일이었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 일로 자주색이 가지는 성경적 의미를 고찰해 보려는 것이다.

 

지금이야 색을 구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다. 특히 파란색 염료는 아주 구하기 어려워 귀한 대접을 받았다. 파란색은 하늘색이기도 해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색으로 사용된다. 파란색이 하나님의 색이라고 명시되거나 특정되지는 않았지만 우선 제사장의 옷과 성전 휘장을 만들 때 사용한 색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제사장의 옷 에봇을 만들 때 청색과 자색과 홍색 실을 엮어서 만들었다. 일단 성경에서 빨간색은 사람의 색이다. 사람의 시작인 아담의 이름 아담이란 말은 '붉다'라는 뜻이다. 진흙으로 사람을 빚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께 홍포를 입힌 것도 '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야!'라는 조롱도 포함되어 있다.

 

자주색은 하나님의 말씀(청색)이 육신(홍색)이 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색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셨는데, 포도와 포도주의 색이 자주색이다. 우리가 알듯이 자주색은 청색과 홍색이 합해진 색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가 자주색이고 사람이 빨간색이니 하나님은 파란색이다. 물론 굳이 여기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파란색을 하늘의 색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주색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색인 셈이다.

 

비단 색이 아니어도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거듭난 사람의 생명 본성이자 정체성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목적 그리고 우리 인생의 의미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육신 곧 생명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그 본성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이니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지침이나, 구원받는 비법이 아니다.

 

루디아든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심기도록 순종하여 들으면 심긴 말씀을 성령이 생명으로 잉태케 하신다. 이것이 성령으로 잉태하신다는 말씀의 본질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는 법이며,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알게 된다고 하신 뜻이다. 무엇보다 성령의 이 능력이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우리도 청색과 홍색이 하나된 자주색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구원을 얻는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색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색인 자주색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순종한 루디아에게 심긴 말씀을 성령이 잉태케하셨기에 그가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은 것이다. 루디아가 그랬다면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구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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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10)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려 한 사도 바울과 달리 성령께서는 마케도냐로 인도하셨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는 바울 일행이 아시아로 가는 형편을 여의치 않게 조성하셨고, 바울의 꿈에는 마게도냐 사람이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아시아로 가지 않고 마게도냐로 갔고 거기에 사는 '루디아'라는 자주장사(자주색 옷감 장사 자주색은 귀족의 색)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온 집이 구원을 얻었다.

 

 

사도 바울이 환상에 이끌려 마게도냐로 간 일은 하나님의 일을 결정하는 데 징조는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징조보다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우선한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뜻하신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인 만큼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분명하게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생명의 본능으로서 삶을 이끌기 때문에 그 본능이 항상 우선한다.

 

반대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은 사람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벗어나면 안 되었던 율법의 삶을 대변하는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사사건건 하나님의 뜻이 필요하다. 그들은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목사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이유다. 심각한 건 질문하는 내용이 육신의 일이라는 것인데, 더 최악인 건 그걸 돈 받고 기도해서 알려주는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평소에 징조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가 계획하고, 말씀이 육신이 된 교회의 사도들과 협력하여 전도 여행지를 결정하고 복음을 전했다.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 안에 육신이 되어 있는 말씀을 전하였다. 이런 사도 바울에게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의 직접적으로 마게도냐로 가도록 하신 건 선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지,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일상으로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으로 말씀하시는 건 아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이라는 신비한 일을 통해 바울의 길을 돌리신 건 하나님이 보실 때 마게도냐에 있는 사람이 더 급히 복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오직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바다도 가르고 죽은 사람도 살리신다.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안다면 바울에게 환상으로 임하신 건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을 보고 모든 일을 징조에 의해 결정하는 걸 우선하는 식의 우를 범하면 곤란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주목할 게 아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뜻을 사람이 아는 일을 위해서는 환상도, 그 이상의 기적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봐야 한다. 그걸 보려 하고 그 마음에 순종하여 같은 마음이 될 때 사람인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진정한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소망해야 하는 건 환상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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