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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5) 데살로니가 vs. 베뢰아

간수의 집에서 나온 바울 사도와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이른다. 데살로니가에서도 규례에 따라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했다.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 중 일부가 바울과 실라를 좇았다. 반면에 유대인들과 불량한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빌미로 소동을 일으켰고, 바울이 머무른 아손이란 사람의 집에까지 가서 바울과 실라를 헤치려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아손을 송사했고, 아손은 보석금을 내고서야 풀려나는 소동을 겪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를 떠난 바울과 실라가 머문 베뢰아 사람들은 달랐다. 바울 사도가 전한 말씀을 듣고 '과연 그런가 하여' 날마다 상고했다. 그중에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베뢰아까지 따라와서 소동하자 바울만 먼저 아덴으로 떠나고 후에 베뢰아에 있던 실라와 디모데를 아덴으로 부르는 불편을 겪게 된다. 말씀이 과연 맞는 말인지 생각도 하지 않으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행하게 된다.

 

우리는 성경을 쉽게 접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낮아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문자 그대로 읽을 뿐인 상태다. 어떤 글이나 책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건 의미가 없다. 행간을 읽어야 한다. 체납자의 자동차는 압류한다는 법은 세금을 잘 내라는 것이다. 행간을 읽지 못하고 문자대로 읽으면 압류를 본질로 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사람은 세상도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안다. 이런 사람에게 영광은 높고 평안한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이게 진리이고 의로움이다. 그 진리와 의로움으로 보면 하나님 아들은 황금마차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의 모든 임금 위에 군림하는 존재다. 이 세계에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는 건 자기 세계가 망하는 것이다. (세상의 종말 후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의도하는 종말이 이 세계의 종말이다) 복음을 심히 핍박한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이나 소동을 일으킨 데살로니가 사람 그리고 오늘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서 육신의 평안을 위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사람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을 판단함에 있어 일을 일으킨 주체나 핵심적인 원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절도 사건이 있었고 범인이 절도 전과가 있었다면 굳이 '왜 그랬지?'라고 의문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에 그럴 거 같지 않은 사람의 일탈이라면 '?'라고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베뢰아 사람들이 그랬다. 높고 위대한 지경에만 있을 것 같은 하나님인데 그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죄인이 지는 십자가를 졌다는 복음을 듣고 '과연?'이라고 반문을 가졌다. 그랬더니 많은 귀부인과 남자가 믿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성과 상식을 괜히 주신 게 아니다.

 

누구나 아는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일상 전부를 기쁜 감정으로 살 수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 생각해 봐야 한다. 이 말씀을 직접한 바울 사도 역시 여러 차례 다툼이 있었다는 것도 의문을 키운다. 그런데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닥치고 항상 기뻐하려고 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순간 율법이 된다.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시도기 때문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묵상하는 법을 더 이야기한다면, 사람이 '항상'이라는 빈도 부사 그대로 기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묵상해야 한다. 우리가 행위로 이걸 지킬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잘 아시는 게 분명할 뿐 아니라, 노력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걸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며 그렇게는 의로워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항상 기뻐하라고 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법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유추하고 그걸 알려고 해야 한다. 사람이 알아야 하는 건 이런 하나님의 뜻이다. 이 의문 정답은 존재가 '항상 기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무작정 믿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아바타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의에 순종한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간혹 말하는 자유 의지라는 단어는 이런 의미라면 맞지만,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한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선악과를 먹는 행위다) 그저 말 잘 듣는 존재가 필요했다면 아바타나 최면에 걸린 사람이면 충분하다. 성경도 그렇다. 컴퓨터에 윈도우를 설치해서 윈도우용 PC를 만들 듯 사람에게 성경을 설치하듯 주입해서 태어나게 하시면 되는 데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그걸 못하실 하나님도 아닌데.

 

우리는 신학교를 졸업한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된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학문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전한 복음 곳곳에 있는 의문들을 안고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새 그 의문들은 기독교 신앙 세계에서 '방 안의 코끼리'가 되었다. 죄사함 받았다면서 기도할 때 회개로 시작하라는 설교를 듣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은 실수도 않으신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은 늘 잘못되었다고 기도하는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 예수님께서 분명히 성령이 오시면 나의 말을 다 알게 될 것이라 하셨음에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신학이란 학문으로 공부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신성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을 두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 안에는 구원이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엄청난 일이며 일생의 모험이다. 죽어서 당면할 영원의 개념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존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의문을 해결하지 않고 대충 남들 따라 교회에 가서, 좁은 길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묵살한 채 많은 사람이 다니는 교회와 그 교리에 몸담고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 듯이 안일하게 있을 일이 아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에 관한 의문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어떻게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죄인이 되었는가?>라는 것과 <내가 그 예수를 믿고 있는 게 맞는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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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40)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라 달리 설명이 필요할 게 없는 말씀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 분명히 이 말씀은 구원에 관한 말씀, 곧 내가 죽어서 영혼으로 영원 동안 어떻게 지낼 것인지에 대한 엄중한 말씀임에도 주 예수의 무엇을 믿으라는 건지를 생각한다거나, 내가 예수를 믿는데 집이 왜 구원을 얻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쉽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데, 정작 예수의 무엇을 믿는 거냐고 물으면 머뭇거린다. 예수가 실존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십자가를 졌다는 사실과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이 상상하기 힘든 헌신과 기적이 실재였다는 걸 믿는다는 건지, 아니면 그냥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만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과 시험이나 경쟁이나 입찰에서 무조건 이기게 해 준다는 걸 믿는다는 건지, 도대체 예수의 무엇을 믿는 건지도 선명하지 않은 채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구원도 그렇다. 구원이란 심각한 위험에서 건져졌다는 건데, 도대체 어떤 위험에 처했다가 어떤 안전한 상태로 옮겨지는 구원을 얻었다는 것인가? 또 구원은 죄사함에서 시작된다고 하면서 여전히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구원은 또 어떤 구원인가? 이런 고민도 없고, 정체도 불분명한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말만 하면 얻는 게 구원이라는 프레임을 정말로 신뢰할 수 있어서 그저 거기 머무는 것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영혼이 영원히 어떤 상태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엄청난 문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바울 사도가 간수에게 말한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그 예수를 전하다 채찍질 당하고 감옥에 갇혔던 바울이 전하는 예수다. 오늘 우리도 이런 예수를 믿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이 전하는 예수를 오늘을 사는 사람이 믿을 수 있을까?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님께 오히려 세상 높이 오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과연 세상에서 실패한 몰골로 자기에게 "이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전한다면 믿을까?

 

오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예수, 믿으면 손실을 보고 감옥에 갇히는 예수를 믿는 것일까?

 

바울이 전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는 예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다. 당장 이 예수를 믿으면 점치는 여종처럼 손실을 보는 예수며, 감옥에 갇히는 예수다. 정말 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걸 알고 믿는지 정말로 생각해 봐야 한다. 구원을 베푸는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를 믿는 건 아무 쓸모가 없다. 오히려 그런 예수는 사람이 창조한 우상일 뿐,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아니다.

 

사도행전은 아니 모든 성경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도를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성경을 믿고 구원받고자 한다면 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 이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 다른 이름 즉 다른 존재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 세상에서 낮아지고 죄인이 되는 복음을 믿는 게 아니라면 언감생심 구원은 없다. 당장 목사가 아니라 세상에서 실패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진정한 복음을 전한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그 예수를 믿어야 얻는 게 구원이다.

 

십자가로 이끈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아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줄 수 있는 생명이 될 때 구원이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의 삶이 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는 걸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 가치로는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게 구원인 셈이다. 이는 천하게 된다는 일반화가 아니다. 세상에서 낮아진다는 건 서로의 주장이 있을 때 "네가 옳다"라고 인정하게 되는 본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성은 생명이 바뀌어야 가질 수 있다. 이 생명이 그리스도기에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말한다.

 

사람이 "너 옳다"라고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게 있는데 바로 몸을 써서 수고하는 것이다. 이게 낮아짐이다. 예수님께서 섬기러 오셨다고 하신 건 신분이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네가 옳다고 하면 수반되는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는 생명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주장하는 바에 심판을 받아 육신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 예수님의 본성과 생명이 나의 생명과 본성이 되고, 나는 그 본성으로 살겠다는 순종과 그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의라는 걸 믿는 게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세상에서 잘 되기를 기도하는 것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건 구원을 도둑질하려는 시도다. 물론 성공할 수 없다.

 

이런 그리스도의 삶은 수고를 감당하는 삶이다. 이게 십자가를 지는 삶인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기에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듯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그런 삶을 살게 된다. 그 삶을 기록한 게 성경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그저 본성대로 살 뿐인데 성경을 이루는 삶이 된다.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건 구원과 무관한 삶이다.

 

이 본성대로 수고를 감당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늘 더 수고하는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마음이 감동하지 않는다면 그건 양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 집을 구원한다. 바울 사도가 '너와 네 집'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적어도 구원을 이야기하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고, 이걸 알고 믿어야 구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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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40)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그리고 간수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여종의 주인은 상관들에게 바울과 실라를 송사했고,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를 채찍으로 때린 후 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밤에 옥터가 흔들리고 옥의 모든 문이 다 열리며 갇힌 사람들의 매인 것이 다 풀어졌다. 놀란 간수가 일어나서 상황을 보니 모든 죄인이 달아난 줄로 알고 스스로 자결하려 했는데, 사도 바울이 자신이 도망가지 않았으니 몸을 해하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에 멈추고는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인지 묻는다.

 

 

이 상황에는 땅이 진동하면서 감옥의 문이 어떻게 열렸는지, 죄수를 결박한 게 어떻게 풀렸는지가 우선 의문스럽긴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의 사건으로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을 구하였는지가 사실은 더 중요하고 궁금해해야 하는 지점이다. 물론 죄수를 지키는 간수로서는 죄수가 모두 탈옥한다면 신변을 보존하긴 어려웠겠지만, 어째서 바울과 실라가 달아나지도 않았는데 두려워 떨면서 구원을 구했는지가 성경을 보는 사람의 중요한 관점이어야 한다.

 

간수는 자기 신변에 위협이 될 만한 사건 앞에서 구원을 염려했다. 육신의 삶에 일어난 징조를 자기 영혼의 구원과 결부된 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과연 그 한순간의 일로 그렇게 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보는 게 옳다. 꿈도 잠재의식에서 비롯된다는 사람이 순간의 일로 자기 운명에 관한 태도 변화를 취하는 건 가식일 뿐이다. 간수는 평소에도 자기 구원에 관해 많은 고민이 많았던 사람인 게 분명하다.

 

사람은 갑자기 구원을 간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는 장면도 이와 비슷하다. 성경에 "나를 따라오너라" 하니 생업(그물)을 던져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영화처럼 그 한순간에 제자들 마음이 변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고,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인지 엄청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를 따라오라는 한 마디는 잔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었다. 이는 우리 자신을 반추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평안하게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던 사람이 어느날 길을 가다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 외치는 소리에 교회에 나가지는 않는다.

 

정황상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집에 가는 건 위험한 일일 수 있다. 바울과 실라가 탈옥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결하려 했던 사람이 상부의 지시도 없이 죄수인 바울과 실라를 집에 데려가서 씻길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에게 세례를, 그것도 온 집이 세례받는다는 건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간수의 행동은 구원을 향한 대단한 결단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자기 구원에 관해 바울과 실라에게 묻고 구했을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바울과 실라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간수로서 죄수를 자기 집에 데려가 죄수의 죄에 동참할 결단을 할 정도로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구원을 사모해야 하는지를 이 간수가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구원이 아주 쉬운 것이라고 배웠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배운다. 거저 교회에 가서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최종적인 표현은 그게 맞는 말이지만, 죄가 뭔지, 십자가가 뭔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게 어떤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거저 믿는다는 말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건 하나님과 십자가를 크게 모독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고 믿는다는 건, 십자가가 인생의 올바른 진리이자 의로움이기에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순종의 고백이다.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건 종교적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이건 생명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이 바뀐다는 건 삶의 가치관,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다. 높은 곳에 있는 영광이 있는 게 아니라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참된 영광이라는 걸 알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게 구원이다. 그러므로 나의 가치관이 과연 십자가의 가치관과 같은지를 돌아봐야 한다. 그게 아니면 구원은 없다.

 

무엇보다 사람이 삶의 가치관을 바꾸는 건 정말로 두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기 전 이런 두려움이 없었다면 정상이 아니다. 자기가 이때까지 의지하며 살아온 세상의 가치관, 높이 올라 영광을 얻고 평안을 얻는 걸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어딘지도 모르는 하나님이 지시할 땅 같은 구원을 향해 출발한다는 게 교회에 가서 교리문답에 답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결단이다. 이런 결단과 과정이 없었는데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건 말 그대로 환난이 그 앞에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간수도 갈릴리 지방에 퍼진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던 제자들처럼 빌립보 지방에 전해진 십자가의 도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은 구원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두려워했다. 어쩌면 바울과 실라가 탈옥했다는 사실보다, 다시 만날 수 없을까봐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들은 추측이라 차치하더라도 말 한마디에 자기 육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온 집이 세례를 받을 정도로 분명 그는 구원이 자기에게 없다는 걸 알고 두려워했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말씀에 순종함으로 극복하고 구원을 얻었다.

 

구원은 인생의 가치를 바꾸는 결단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구원을 싸구려 취급하고 있다.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도가 원래 사람의 존재 목적이므로 사람에게 쉽다는 의미지 세상 가치관에 올인하여 살던 사람이 낮고 천한 십자가의 삷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게 쉽다는 건 아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보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구원은 이처럼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니 구원은 그저 교회에 가서, 또 나면서부터 다니는 습관에 따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얻는 게 아님을 깊이 새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은 줄로만 알고 산 한평생이 수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사모한다면 이 간수의 간절함과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구원은 그래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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