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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3-41)

사도 바울 일행은 버가모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다.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아 있는데 회당장이 권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이스라엘 역사, 출애굽과 다윗의 일을 중심으로 전했는데, 주제는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바울 사도의 전 생애를 통해 전한 복음의 핵심적 주제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예수 그리스도)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우리는 이제부터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말씀을 자주 대하게 된다. 사도행전 13장에서부터 빌레몬서까지 계속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건 너무 중요한 이야기다. 그리고 옛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율법이 구약성경 속 율법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게 너무너무 중요하다. 율법은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는 시도와 노력을 이끄는 모든 생각과 가치 그리고 교리와 이론이다.

 

율법은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는 시도와 노력을 이끄는 모든 것

 

바울 사도는 율법을 상징해서 다윗을 소환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다윗은 썩어 없어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썩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씀은 다윗의 육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육신은 율법의 주체다. 다윗의 육체는 썩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는 건,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로만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기본 원리다.

 

또 하나는 다윗의 신분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신분 차이다. 사람의 외모로 볼 때 다윗과 예수님은 너무 큰 차이가 난다. 하지만 다윗은 많은 시편에서 육신으로 자기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고 칭송했다. 육신으로 지키는 율법이나 육신의 어떠함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증거한 바울 사도의 설교다.

 

이 설교는 특히 이방인을 감동하게 했다. 이방인은 육신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게 명확했다. 할례도 없고,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킨 것도 아니기에 유대인들은 아예 육신을 기준으로 차별을 두었었다. 그런데 유대인인 사도 바울이 육신의 어떠함이나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한 것이다. 설교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고 설교를 들은 이들은 사도 바울 일행에게 다음 안식일에도 와서 말씀을 전해 주기를 청했다. (13:42)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나, 하나님은 행위나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대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자신들은 이미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생각이 엄청난 착각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블로그의 많은 지면에서 이를 계몽하려고 하고 있다.

 

행위로 지키려고 할 때 신약 성경과 모든 설교도 율법이 된다.

 

우선 기독교인들은 율법은 구약성경 내지는 유대인들의 규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율법은 구약성경을 한정하는 게 아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지키려고 슬픈 순간에도 기뻐하려고 애쓰고 노력한다면, 그 순간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행위로 지키는 율법이 되는 것이다. 이건 굳이 성경 말씀이 아니라 그저 상식 수준의 논리인데도 이에 대해 생각도 고민도 반성도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회개로 시작하는 기독교인들 기도가 행위가 의로워야 한다는 걸 믿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건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의미이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인데, 정작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며 말하고 감사하는 이들이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건 심각한 모순이자 문제다.

 

그런데 이 심각함을 모른다. 그래서 이를 지적하면 큰 틀에서는 죄 사함을 받았지만 생활하면서 화를 내는 것과 같은 행동으로 범하는 죄는 목욕한 자가 발을 씻는 것과 같으므로 회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회개해야 한다는 건,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회개할 법한 행동 후에 실제로 책상 위의 물이라도 쏟기라도 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린다고 말하거나 깨닫게 하시는 것이라고 자책한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논리를 들여다보면 바보가 아닌 이상 행위가 의로워야 하나님이 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굳건한 믿음 위에 있는 논리이자 교리인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걸 외면한다.

 

이렇듯 현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분명히 행위가 의로워야 한다는 믿음에 의존하고 있다. 즉 율법으로 의로워진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믿음으로 의로워졌다고 참칭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기도할 때마다 회개할 거리가 있는 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현대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건지 깨달아야…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설교를 오늘 묵상한다면 자신이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에 있지 않은지 돌아보고, 생활 속에서 늘 자기 행위를 회개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이걸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처럼 자신이 그렇다는 걸 알려주는 말씀을 더 듣고자 청해서 진정한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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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악에서 구하옵소서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16. 14:22 Writer : 김홍덕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사람의 기도다. 지금까지 하늘은 어디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그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건 무엇인지 그리고 죄와 시험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악에서 건져 주시기를 구한다. 악에서 건져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다는 건 사람이 악에 빠져 있다는 의미다.

 

사실 지금까지 전개된 주기도문의 내용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그리스도로 살아가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진다는 건 곧 죄가 사해졌다는 의미고, 시험을 이겼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은 악하지 않다. 유일하게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사람은 그 자체로 선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당연히 선한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게 악에서 구원받았다는 의미라면, 우리는 어떤 악에서 건져짐을 받았는지, 즉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또 어떤 위험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악에 관한 고찰은 아직 악에 속한 사람에겐 또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시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잘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어떤 젊은 부자가 예수님께서 와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여"라고 불렀다. 그냥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선하다고 했으니, 문제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가 끝내 돌아가게 할 정도로 매정하게 대하셨다. 예수님은 시작부터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며 까칠하게 반문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선하시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7-18)

 

사람이 악으로 규정하는 대상은 기본적으로 행위와 현상들이다. 어떤 행동은 악하고, 어떤 행동은 선하다고 규정한다. 그래서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우리가 악하게 행동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의도라고 해석하고 믿는다. 악의 실체를 행동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도, 성경 공부도 다 높은 가속도로 이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악하게 행동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악한 행동을 한다면 삶이 재앙을 맞을 것이라 믿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악()의 실체를 행위로 본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처음 행한 악은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순서로 처음이 아니라 선악과가 죄와 악의 시작이란 뜻이다.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는 건 불순종이란 행위라서 선악과 먹은 <행위>를 악으로, 죄로 이해한다. 즉 행위로 지은 범죄로 여긴다. 그런데 선악과가 행위로 인한 범죄라면 여전히 행위로 죄를 범하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다. 여전히 행위로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선악과를 먹은 행위를 범죄로, 악한 행위로 믿고 있다.

 

선악과를 악한 행위로 본다면 사람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선악과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존재다. 아담('사람'이란 뜻)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에 있느냐 아니냐가 선악과의 핵심이다. 아담과 하와는 사람의 자리를 버리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처럼 되어야 선해질 수 있다는 생각, 이게 죄의 DNA. 실제로 죄는 '자기 자리를 벗어난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어원이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행위가 아니다. 존재가 존재 목적 안에 있는지다.

 

자기 정체성을 벗어나려 한다는 건 현재 자기 정체성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만족의 동산인 에덴동산에 있을 수 없었다. 실제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자신이 부끄럽다는 건 자기 존재가 만족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를 부끄럽게 여기고 벗어나 하나님처럼 되려는 의도, 이것이 바로 죄의 근원인 <>이다. 그러니까 악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가 자기 정체성을 벗어난 것이다.

 

악의 실체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하나님! 나의 정체성이 회복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주기도문 내용이 모두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려면 당연히 지금 내가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벗어나 있다는 인식과 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가 자리를 벗어났다는 걸 모르는데 자리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벗어났다는 걸 인식하거나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죄를 시인하고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건 모두 거짓말이다. 시인해야 하는 건 하나님 정한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8-9)

 

따라서 우리를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단순히 악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나를 제어해 주시길 기도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나 있는 게 악이고, 자신이 그 악에 속해 있다는 걸 시인하는 고백이 선행되어야 하는 기도다. 이를 위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시고, 하나님의 의가 나를 다스려 주시기를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의 한계(자리)를 넘은 능력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시험을 이겨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하라고 하신대고 구하면(주기도문대로 기도하면)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면 시험은 쉽게 이긴다. 모든 건 하늘의 뜻, 곧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면 사람은 자기 존재 정체성 안에 거한다. 바울 사도는 이를 <그리스도 안>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선하다. 결국 하늘의 뜻,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시험도 이기고 선에 거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걸 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악에서 벗어난다는 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이는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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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3:1-12)

13장부터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 중심으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복음이 이방인과 각 나라로 전파되는 과정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이 변화의 중심인물인 바울 사도의 본격적인 활동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에서 시작한다. 성령께서 안디옥교회의 선지자와 교사들에게 임하셔서 바울과 바나바를 안수하고 파송한다. 그리고 여기에 훗날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는 요한이라는 마가가 동행한다. 이것이 바울을 1차 선교 여행의 시작이다.

 

바울은 가장 먼저 살라미라는 곳에 이르게 되고 거기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자 그 지역의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이 이 말씀을 듣고자 했는데 이를 방해하는 자가 있었다. 그 지역의 박수, 곧 마술사 혹은 무당인 거짓 선지자 유대인 바예수라는 자였다.

 

바예수는 총독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 듣는 걸 방해했다. 이에 성령이 충만한 바울이 이 거짓 선지자를 책망하니 거짓 선지자가 얼마 동안 소경이 되고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었다. 성경의 문맥으로 보면 총독이 바예수를 보고 믿었다는 것에서 바예수 주변에 기상이변처럼 안개나 어두움이 생겨났다기보다, 바예수가 혼돈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바예수의 모습과 상태는 성경이 말하는 어두움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다. 더 상세히 말한다면 바예수는 어두움에 새로 진입한 게 아니라 사도 바울로 인해 그가 어두운 존재인 게 드러났다고 하는 게 바른 관점이다. 이어 묘사된 바예수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즉 아직 구원이 없는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거짓 선지자 바예수의 어두움은 자아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부인하고 억제하는 모든 사람의 상태

 

또 다른 관점에서 바예수의 행동은 타인에게 행한 행동이 아니라 자아 안에서의 갈등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이렇게 볼 때 자기 이야기가 된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한 성경이 자기 이야기가 된다는 건 자신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이야기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 사람 자아 안에서 복음에 대해 저항하고 방해하는 생각 역시 바예수의 모습이다. 어쩌면 이 관점이 더 중요하다.

 

한편 거짓 선지자 바예수는 어둡게 되어 보지 못하게 되자 자신을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했다고 했다. 두루 구했다는 건 인도할 사람을 쉽게 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바예수가 총독 서기오 바울이 복음 듣는 걸 방해한 행위가 우리 각 사람 자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행위의 예표인 걸 생각하면 사람이 자기 길을 인도하는 이를 두루 찾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인생의 길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

 

실제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길을 찾는다. 그리고 그 길을 인도하는 사람과 책과 명언과 이치를 찾는다. 문제는 이게 평생의 일임에도 잘 찾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런 상황을 지혜 있는 사람은 이상하게 여긴다. 자신의 길이 바른지 돌아보게 된다. 이런 출발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결국 인생에서 자기를 인도할 사람과 가치를 찾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다. 인생을 창조한 하나님만이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유일한 대안을 버리고 다른 길을 찾는 건 노력은 가상하나 다 헛짓에 불과하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바예수라는 거짓 선지자가 자기 길을 인도하는 사람을 찾지 못하는 걸 보고 하나님을 믿었다. 이런 순종과 과감한 선택이 있어야 구원을 얻고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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