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9-40)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그리고 간수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여종의 주인은 상관들에게 바울과 실라를 송사했고,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를 채찍으로 때린 후 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밤에 옥터가 흔들리고 옥의 모든 문이 다 열리며 갇힌 사람들의 매인 것이 다 풀어졌다. 놀란 간수가 일어나서 상황을 보니 모든 죄인이 달아난 줄로 알고 스스로 자결하려 했는데, 사도 바울이 자신이 도망가지 않았으니 몸을 해하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에 멈추고는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인지 묻는다.

 

 

이 상황에는 땅이 진동하면서 감옥의 문이 어떻게 열렸는지, 죄수를 결박한 게 어떻게 풀렸는지가 우선 의문스럽긴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의 사건으로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을 구하였는지가 사실은 더 중요하고 궁금해해야 하는 지점이다. 물론 죄수를 지키는 간수로서는 죄수가 모두 탈옥한다면 신변을 보존하긴 어려웠겠지만, 어째서 바울과 실라가 달아나지도 않았는데 두려워 떨면서 구원을 구했는지가 성경을 보는 사람의 중요한 관점이어야 한다.

 

간수는 자기 신변에 위협이 될 만한 사건 앞에서 구원을 염려했다. 육신의 삶에 일어난 징조를 자기 영혼의 구원과 결부된 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과연 그 한순간의 일로 그렇게 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보는 게 옳다. 꿈도 잠재의식에서 비롯된다는 사람이 순간의 일로 자기 운명에 관한 태도 변화를 취하는 건 가식일 뿐이다. 간수는 평소에도 자기 구원에 관해 많은 고민이 많았던 사람인 게 분명하다.

 

사람은 갑자기 구원을 간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는 장면도 이와 비슷하다. 성경에 "나를 따라오너라" 하니 생업(그물)을 던져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영화처럼 그 한순간에 제자들 마음이 변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고,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인지 엄청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던 게 분명하다. 나를 따라오라는 한 마디는 잔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었다. 이는 우리 자신을 반추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평안하게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던 사람이 어느날 길을 가다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 외치는 소리에 교회에 나가지는 않는다.

 

정황상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집에 가는 건 위험한 일일 수 있다. 바울과 실라가 탈옥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결하려 했던 사람이 상부의 지시도 없이 죄수인 바울과 실라를 집에 데려가서 씻길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에게 세례를, 그것도 온 집이 세례받는다는 건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간수의 행동은 구원을 향한 대단한 결단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자기 구원에 관해 바울과 실라에게 묻고 구했을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바울과 실라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간수로서 죄수를 자기 집에 데려가 죄수의 죄에 동참할 결단을 할 정도로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구원을 사모해야 하는지를 이 간수가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구원이 아주 쉬운 것이라고 배웠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배운다. 거저 교회에 가서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최종적인 표현은 그게 맞는 말이지만, 죄가 뭔지, 십자가가 뭔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게 어떤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거저 믿는다는 말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건 하나님과 십자가를 크게 모독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고 믿는다는 건, 십자가가 인생의 올바른 진리이자 의로움이기에 나도 그렇게 살겠다는 순종의 고백이다.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건 종교적 노력이나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이건 생명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이 바뀐다는 건 삶의 가치관,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다. 높은 곳에 있는 영광이 있는 게 아니라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참된 영광이라는 걸 알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게 구원이다. 그러므로 나의 가치관이 과연 십자가의 가치관과 같은지를 돌아봐야 한다. 그게 아니면 구원은 없다.

 

무엇보다 사람이 삶의 가치관을 바꾸는 건 정말로 두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기 전 이런 두려움이 없었다면 정상이 아니다. 자기가 이때까지 의지하며 살아온 세상의 가치관, 높이 올라 영광을 얻고 평안을 얻는 걸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어딘지도 모르는 하나님이 지시할 땅 같은 구원을 향해 출발한다는 게 교회에 가서 교리문답에 답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결단이다. 이런 결단과 과정이 없었는데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건 말 그대로 환난이 그 앞에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간수도 갈릴리 지방에 퍼진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던 제자들처럼 빌립보 지방에 전해진 십자가의 도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은 구원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두려워했다. 어쩌면 바울과 실라가 탈옥했다는 사실보다, 다시 만날 수 없을까봐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들은 추측이라 차치하더라도 말 한마디에 자기 육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온 집이 세례를 받을 정도로 분명 그는 구원이 자기에게 없다는 걸 알고 두려워했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말씀에 순종함으로 극복하고 구원을 얻었다.

 

구원은 인생의 가치를 바꾸는 결단이 있어야 얻을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구원을 싸구려 취급하고 있다.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도가 원래 사람의 존재 목적이므로 사람에게 쉽다는 의미지 세상 가치관에 올인하여 살던 사람이 낮고 천한 십자가의 삷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게 쉽다는 건 아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보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구원은 이처럼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니 구원은 그저 교회에 가서, 또 나면서부터 다니는 습관에 따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얻는 게 아님을 깊이 새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은 줄로만 알고 산 한평생이 수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사모한다면 이 간수의 간절함과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구원은 그래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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