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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1)

어떤 유대인이 바울과 바나바가 있는 안디옥에 와서 '모세의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구원이 없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가 저들과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자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결론을 얻기로 한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한국인들에게 성묘와 비슷한 정도의 관습인지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은 할례와 구원이 무관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할례는 유대인을 구분하는 증거다. 특히 할례는 문신처럼 몸에 직접 행하는 율법이다. 그래서 할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증거였다. 물론 그건 사람의 생각이었지만,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의 성격과 비중이 달라진다. 결국 이 논쟁의 핵심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느냐 혹은 구원받은 증거는 무엇이냐다. 그 증거를 몸에 행한 할례에서 찾고자 한다는 건 결국 사람의 외모가 구원의 기준이나 자격이 된다는 주장이다. 방언을 받아야 구원받은 것이라는 주장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 심지어 신약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는다. 그건 할례가 구원의 자격이나 기준이 된다는 생각이 어리석은 것임을 방증한다. '항상 기뻐해야 한다'와 같이 신약 성경의 구절들을 지켜야 한다(Have to)는 가르침과 그래야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실 것이란 기대 등은 모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주장의 후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할례의 근본 의미를 모르는 어두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할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할례는 표피를 벗겨내는 행위이자 의식이다. 그러니까 겉을 보지 않는 신앙의 증표다.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의식으로 표현한 게 할례다. 그런데 그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고 하는 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바보의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고 어두움에 있다고 하셨고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것이다.

 

이런 할례 논쟁은 베드로에 의해 마침표가 찍힌다. 단순하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라는 간결한 말 한마디가 할례에 관한 논쟁과 율법과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 모두를 탄핵한다. 그런데 그 전에 베드로가 한 말은 참 의미가 있다.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의 목에 두려 하느냐는 것이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5:9-10)

 

특히 베드로는 할례를 받아야 하는 주장, 곧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 일갈했다. 하나님이 아니라는데 반복적으로 '이거 아닙니까?'라고 질척거리는 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란 의미다. 게다가 베드로는 그들의 주장은 우리 조상이나 우리도 메지 못하는 멍에라고 말했다.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는 건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분명한 선언이다.

 

세상의 성공을 목적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 신앙에서 회개해야 한다.

 

오늘날은 유대인이 아니라면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하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진 건 또 아니다. 행위로 의로워져야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믿는 신앙이 팽배한데 그것이 바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 곧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는 신앙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신약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자기 본성이 아님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하라는 목사와 교회가 시키는 걸 억지로 하려고 노력했던 자신의 신앙이 바로 그 신앙이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이셨는데, 그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과 평안을 구하고, 대가로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드리는 건 명백히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는 신앙이다. (신약 성경도 예외가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성경을 지키는 자기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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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28)

권력자를 동원해 바울과 바나바를 추방한 비시디아 안디옥과 루스드라 이전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은 회심 전 바울 같은 열정으로 사도 바울을 좇아와 돌로 쳐서 죽이려 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내쳤지만 바울 사도는 죽지 않고 오히려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제자로 삼은 많은 제자에게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받는 환난을 생각해 본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지금도 교회에 다니는 게 여의치 않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기독교 집안이 아닌 환경에서 교회에 다니려고 할 때 받는 저항은 다분히 환난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신앙이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한 신앙이라면 그 환난의 가치는 상당히 절하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런 걸 약속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를 폄하할 수만은 없는데, 이는 그런 신앙의 여정은 복음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해서 온전한 복음으로 장성할 때 비로소 자신이 겪은 환난이 값진 상급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신앙을 전부로 알고 머문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구원조차 없는 헛수고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돌에 맞은 건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서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모독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돌판에 새기셨기 때문에 돌로 심판한다는 건 곧 율법으로 심판하는 것이다. 스데반을 죽일 때도 돌로 쳐서 죽인 것 역시 이유에서다. 그런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는 건 그들의 눈에 사도 바울은 율법을 아주 심각하게 어긴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가 돌에 맞은 이유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과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전했기 때문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한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찾아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바울은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지킨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과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은 세상의 가난도 해결하지 못하고 이방인의 손에 힘없이 죽임을 당한 예수가 전능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용납할 수 없고, 자기들이 목숨을 다해 지키는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 역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신성모독이자 유대인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낮고 천한 신분으로 십자가를 진 예수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 사람이 그걸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라고 하실 이유가 없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다. 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도리어 그 이유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을 핍박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현상은 현재형이다.

 

세상의 어떤 나라도 그 나라의 의를 성문화한 헌법에 반하는 사람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깨어질 때 깨어진 향유옥합에서 향기가 넘쳐나듯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드러났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고 그 본성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그러나 세상은 낮아지므로 이기고 영광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역시나 세상의 기준으로 이기기 위한 일보 후퇴의 개념이지 패배 자체를 이김으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사람들의 가치관은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인들 역시 그랬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이란 천한 동네에서 날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이게 옛날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은 오히려 더 교묘한데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사람의 이런 가치관이 모두가 높아지려고 힘쓰는데 낮아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영광이라고 말하는 걸 용납할 리 없다. 게다가 가족이나 친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게 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낮아지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는 게 세상의 논리지만 그 논리가 복음을 핍박하게 되고 거듭난 사람을 환난에 빠지게 한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건 이처럼 세상 가치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세상과 반대기 때문에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받는 고난이 모두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은 아니다. 앞서 한 번 설명했듯이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이기고 높아지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받는 고난은 그저 경쟁에서 비롯된 질투와 저항일 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고난은 아니다. 이걸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건 구원이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는 낮아지므로 이기고 영광을 얻는 의가 본성이 된 사람들의 나라다. 다만 이 본성과 의가 세상 가치에 역행하기 때문에 늘 고난받는다. 그러므로 세상과 반대로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 낮아진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고, 이김이며, 영광으로 추구하므로 받는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증거다. 바울 사도가 거하라고 한 <이 믿음>이 또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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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8)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믿었다. 그러나 역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므로 도망하여 루스드라와 더베라는 지방 인근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루스드라에서 본 앉은뱅이를 보니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걸 알아보고 그 앉은뱅이를 고쳐주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앉은뱅이가 일어서서 뛰어 걷는 것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자기들에게 오셨다고 소리치며 바울을 쓰스(제우스)라 칭하고 바나바를 허메(헤르메스 : 제우스의 전령이자 웅변의 신)이라 부르며 두 사람 앞에 제사를 지내려 하였다. 당연히 두 사람은 놀라고 사람들을 만류하였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 중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사람들이 있다. 좀 웃긴 표현으로 "영빨"있다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대했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해 보면 아닌 것 같은데,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가서 자신이 도모하거나 걱정하는 세상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묻고 헌금하고 오는 게 바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앉은뱅이의 육신이 회복된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 제우스라고 생각했다. 제우스는 사람이 조각한(설계하고 창조한) 신으로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신이다. 즉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보고 그 본질에 속하는 세상일과 육신과 삶을 주관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신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세상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우스라고 받든 것과 기도원에 있는 사람에게 세상과 육신의 일을 의지하는 건 같은 일이다.

 

영빨있다는 기도원에 가서 육신의 일을 의지하는 건 영빨있다는 사람을 제우스로 섬기고 제사하는 것

 

바울과 바나바는 이런 루스드라 사람들을 만류했다. 이때 바울 사도는 자신은 루스드라 사람들과 같은 존재라는 걸로 설득했다. 같은 성정을 가졌다는 게 같은 정체성을 가진 같은 존재라는 의미로 나에게 있는 은혜와 능력은 너에게도 있으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고 섬기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우선 바울 사도 역시 자기와 같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에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형제로서 서로 교제하는 사이가 되는 거지 어느 한 사람에게 경배와 제사를 드리는 관계가 아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우리 복음의 근간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분이라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다. 특히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과 창세기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말씀이 같은 의미라는 걸 알아야 복음을 바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할 형상 있는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형식이고 하나님의 내용인 셈이다. 이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고 정체성이다.

 

이런 관계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정의한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건, 형식인 우리 안에 우리의 존재 의미인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뜻이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다.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 역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재해서 주관하게 하시도록 순종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건 모든 인생에게 정한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섬기거나 경배하고 제사를 지낼 이유가 없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이건 제우스건 사람의 숭배를 받는 존재가 될 수는 없기에 극구 만류했다. 바울 사도가 루스드라 사람을 만류한 내면에 이런 이유가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이유는 앞서 우리 기독교 안에 이런 풍조가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해서고, 성령을 바로 알지 못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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