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2

(15:12-35)

예루살렘교회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베드로의 말에 야고보 사도가 화답하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인에게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용납하기로 하고, 이를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실라와 유다(바사바)를 통해 서신으로 안디옥 교회에 전하였니 성도들은 큰 위로를 얻게 되었다. 굳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걸 보증한 것이다.

 

성경의 이런 흐름과 바울 사도가 전한 행위나 율법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많은 이들에게 행위는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래서 초창기 교회, 심지어 성경을 정하는 과정에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행위는 버릴 게 아니다. 정말로 생명의 법을 안다면 행위를 버릴 수 없고, 행함이 없다면 죽은 생명이란 걸 이해하게 된다. 행위는 살아있어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위를, 몸 쓰는 걸 귀찮아한다. 돈과 권력이 좋은 건 자기 몸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자기 몸을 드리는 것이다. 여기서도 세상과 복음의 가치관 차이가 드러난다. 몸을 움직이기 귀찮은 이유는 억지로 하기 때문이다. 하기 싫은데 돈이나 다른 이유 때문에 억지로 하는 삶은 사람을 허무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떻게든 몸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추구한다.

 

그러나 본능에 따른 행동은 다르다. 본능 때문에 하는 건 자기가 아무리 귀찮게 여겨도 결국은 하게 되어 있다. 화장실 가는 게 제아무리 귀찮아도 다 가게 되어 있는 걸 생각하면 본능과 행동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구원을 거듭남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자기 본성이 되면, 그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된다. 그래서 육신이 되는 말씀을 생명이라 한다.

 

성경은 바로 이 생명을 가진 사람이 사는 삶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 일기나 자서전 같이 읽힌다. 자기의 생각과 행동과 삶과 가치가 성경에 고스란히 있기 때문이다. 그건 역설적으로 자기 생각과 삶과 가치가 성경과 다르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는 상태나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이 상태다. 그러니까 구원이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는 건 신앙생활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증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로는 오늘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성경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형식도 예루살렘에서 온 서신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의 성도들에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도 행동을 요구한 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굳이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만 하면 성경이 자기 안에 완성된다. 예수님께서도 성경이 자기를 가리켜 한 말씀이라고 하셨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당연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물(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말씀이 육신이 된다. 그래야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로 살면 성경 말씀이 나의 이야기가 되어 늘 위로가 된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15:1-11)

어떤 유대인이 바울과 바나바가 있는 안디옥에 와서 '모세의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구원이 없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가 저들과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자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결론을 얻기로 한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한국인들에게 성묘와 비슷한 정도의 관습인지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은 할례와 구원이 무관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할례는 유대인을 구분하는 증거다. 특히 할례는 문신처럼 몸에 직접 행하는 율법이다. 그래서 할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증거였다. 물론 그건 사람의 생각이었지만,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의 성격과 비중이 달라진다. 결국 이 논쟁의 핵심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느냐 혹은 구원받은 증거는 무엇이냐다. 그 증거를 몸에 행한 할례에서 찾고자 한다는 건 결국 사람의 외모가 구원의 기준이나 자격이 된다는 주장이다. 방언을 받아야 구원받은 것이라는 주장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 심지어 신약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는다. 그건 할례가 구원의 자격이나 기준이 된다는 생각이 어리석은 것임을 방증한다. '항상 기뻐해야 한다'와 같이 신약 성경의 구절들을 지켜야 한다(Have to)는 가르침과 그래야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실 것이란 기대 등은 모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주장의 후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할례의 근본 의미를 모르는 어두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할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할례는 표피를 벗겨내는 행위이자 의식이다. 그러니까 겉을 보지 않는 신앙의 증표다.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의식으로 표현한 게 할례다. 그런데 그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고 하는 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바보의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고 어두움에 있다고 하셨고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것이다.

 

이런 할례 논쟁은 베드로에 의해 마침표가 찍힌다. 단순하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라는 간결한 말 한마디가 할례에 관한 논쟁과 율법과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 모두를 탄핵한다. 그런데 그 전에 베드로가 한 말은 참 의미가 있다.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의 목에 두려 하느냐는 것이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5:9-10)

 

특히 베드로는 할례를 받아야 하는 주장, 곧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 일갈했다. 하나님이 아니라는데 반복적으로 '이거 아닙니까?'라고 질척거리는 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란 의미다. 게다가 베드로는 그들의 주장은 우리 조상이나 우리도 메지 못하는 멍에라고 말했다.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는 건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분명한 선언이다.

 

세상의 성공을 목적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 신앙에서 회개해야 한다.

 

오늘날은 유대인이 아니라면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하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진 건 또 아니다. 행위로 의로워져야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믿는 신앙이 팽배한데 그것이 바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 곧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는 신앙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신약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자기 본성이 아님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하라는 목사와 교회가 시키는 걸 억지로 하려고 노력했던 자신의 신앙이 바로 그 신앙이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이셨는데, 그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과 평안을 구하고, 대가로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드리는 건 명백히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는 신앙이다. (신약 성경도 예외가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성경을 지키는 자기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시도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14:19-28)

권력자를 동원해 바울과 바나바를 추방한 비시디아 안디옥과 루스드라 이전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은 회심 전 바울 같은 열정으로 사도 바울을 좇아와 돌로 쳐서 죽이려 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내쳤지만 바울 사도는 죽지 않고 오히려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제자로 삼은 많은 제자에게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받는 환난을 생각해 본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지금도 교회에 다니는 게 여의치 않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기독교 집안이 아닌 환경에서 교회에 다니려고 할 때 받는 저항은 다분히 환난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신앙이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한 신앙이라면 그 환난의 가치는 상당히 절하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런 걸 약속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를 폄하할 수만은 없는데, 이는 그런 신앙의 여정은 복음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해서 온전한 복음으로 장성할 때 비로소 자신이 겪은 환난이 값진 상급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신앙을 전부로 알고 머문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구원조차 없는 헛수고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돌에 맞은 건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서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모독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돌판에 새기셨기 때문에 돌로 심판한다는 건 곧 율법으로 심판하는 것이다. 스데반을 죽일 때도 돌로 쳐서 죽인 것 역시 이유에서다. 그런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는 건 그들의 눈에 사도 바울은 율법을 아주 심각하게 어긴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가 돌에 맞은 이유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과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전했기 때문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한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찾아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바울은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지킨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과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은 세상의 가난도 해결하지 못하고 이방인의 손에 힘없이 죽임을 당한 예수가 전능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용납할 수 없고, 자기들이 목숨을 다해 지키는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 역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신성모독이자 유대인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낮고 천한 신분으로 십자가를 진 예수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 사람이 그걸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라고 하실 이유가 없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다. 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도리어 그 이유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을 핍박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현상은 현재형이다.

 

세상의 어떤 나라도 그 나라의 의를 성문화한 헌법에 반하는 사람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깨어질 때 깨어진 향유옥합에서 향기가 넘쳐나듯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드러났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고 그 본성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그러나 세상은 낮아지므로 이기고 영광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역시나 세상의 기준으로 이기기 위한 일보 후퇴의 개념이지 패배 자체를 이김으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사람들의 가치관은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인들 역시 그랬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이란 천한 동네에서 날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이게 옛날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은 오히려 더 교묘한데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사람의 이런 가치관이 모두가 높아지려고 힘쓰는데 낮아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영광이라고 말하는 걸 용납할 리 없다. 게다가 가족이나 친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게 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낮아지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는 게 세상의 논리지만 그 논리가 복음을 핍박하게 되고 거듭난 사람을 환난에 빠지게 한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건 이처럼 세상 가치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세상과 반대기 때문에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받는 고난이 모두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은 아니다. 앞서 한 번 설명했듯이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이기고 높아지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받는 고난은 그저 경쟁에서 비롯된 질투와 저항일 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고난은 아니다. 이걸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건 구원이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는 낮아지므로 이기고 영광을 얻는 의가 본성이 된 사람들의 나라다. 다만 이 본성과 의가 세상 가치에 역행하기 때문에 늘 고난받는다. 그러므로 세상과 반대로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 낮아진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고, 이김이며, 영광으로 추구하므로 받는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증거다. 바울 사도가 거하라고 한 <이 믿음>이 또한 이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