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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3:1-12)

13장부터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 중심으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복음이 이방인과 각 나라로 전파되는 과정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이 변화의 중심인물인 바울 사도의 본격적인 활동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에서 시작한다. 성령께서 안디옥교회의 선지자와 교사들에게 임하셔서 바울과 바나바를 안수하고 파송한다. 그리고 여기에 훗날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는 요한이라는 마가가 동행한다. 이것이 바울을 1차 선교 여행의 시작이다.

 

바울은 가장 먼저 살라미라는 곳에 이르게 되고 거기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자 그 지역의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이 이 말씀을 듣고자 했는데 이를 방해하는 자가 있었다. 그 지역의 박수, 곧 마술사 혹은 무당인 거짓 선지자 유대인 바예수라는 자였다.

 

바예수는 총독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 듣는 걸 방해했다. 이에 성령이 충만한 바울이 이 거짓 선지자를 책망하니 거짓 선지자가 얼마 동안 소경이 되고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었다. 성경의 문맥으로 보면 총독이 바예수를 보고 믿었다는 것에서 바예수 주변에 기상이변처럼 안개나 어두움이 생겨났다기보다, 바예수가 혼돈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바예수의 모습과 상태는 성경이 말하는 어두움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다. 더 상세히 말한다면 바예수는 어두움에 새로 진입한 게 아니라 사도 바울로 인해 그가 어두운 존재인 게 드러났다고 하는 게 바른 관점이다. 이어 묘사된 바예수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즉 아직 구원이 없는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거짓 선지자 바예수의 어두움은 자아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부인하고 억제하는 모든 사람의 상태

 

또 다른 관점에서 바예수의 행동은 타인에게 행한 행동이 아니라 자아 안에서의 갈등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이렇게 볼 때 자기 이야기가 된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한 성경이 자기 이야기가 된다는 건 자신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이야기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 사람 자아 안에서 복음에 대해 저항하고 방해하는 생각 역시 바예수의 모습이다. 어쩌면 이 관점이 더 중요하다.

 

한편 거짓 선지자 바예수는 어둡게 되어 보지 못하게 되자 자신을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했다고 했다. 두루 구했다는 건 인도할 사람을 쉽게 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바예수가 총독 서기오 바울이 복음 듣는 걸 방해한 행위가 우리 각 사람 자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행위의 예표인 걸 생각하면 사람이 자기 길을 인도하는 이를 두루 찾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인생의 길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

 

실제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길을 찾는다. 그리고 그 길을 인도하는 사람과 책과 명언과 이치를 찾는다. 문제는 이게 평생의 일임에도 잘 찾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런 상황을 지혜 있는 사람은 이상하게 여긴다. 자신의 길이 바른지 돌아보게 된다. 이런 출발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결국 인생에서 자기를 인도할 사람과 가치를 찾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다. 인생을 창조한 하나님만이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유일한 대안을 버리고 다른 길을 찾는 건 노력은 가상하나 다 헛짓에 불과하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바예수라는 거짓 선지자가 자기 길을 인도하는 사람을 찾지 못하는 걸 보고 하나님을 믿었다. 이런 순종과 과감한 선택이 있어야 구원을 얻고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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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5)

야고보의 죽음과 동시에 헤롯은 유월절에 베드로를 죽이려고 베드로에게 쇠사슬을 채우고 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베드로를 구원(옥에서 꺼냈다.)했다. 하나님의 사자가 밤에 옥에 갇힌 베드로에게 와서 띠를 띠고 신을 신고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고 했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자를 따라 두 차례 파수꾼을 지나 무사히 옥에서 나왔다.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성도들이 모인 곳에 찾아갔으나 사람들이 쉽게 믿지 않을 정도의 일이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에 비해 약해 보이는 기적 같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인 건 마찬가지다.

 

세상의 가치는 복음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한다. 특히 자기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적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하나님 혹은 신에게 기적적인 요구를 많이 한다. 그러나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다. 목적과 부합되지 않는 일을 우리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한다. 기적도 마찬가지다. 기적을 일으키는 주체이신 하나님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필요할 때 기적을 일으키신다.

 

기적적으로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헤롯의 핍박으로 옥에 갇혔었다. 헤롯이 핍박한 이유는 낮아지는 걸 의로 여기는 복음인 십자가를 진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사람들이 믿는 건 높은 것을 추구하는 의를 가진 세상 임금인 헤롯이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의에 반한다. 비단 헤롯뿐 아니라 누구라도 세상에서 높아지는 걸 의로 삼고 살아가는 건 하나님의 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옥에서 꺼내셨다. 하나님의 당연한 일이 사람에게 기적이 된 것일 뿐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베드로는 그런 핍박에 갇혀 있을 수 없기에 하나님이 기적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에게 창조한 목적을 알리시기 위해 일하신다. 그게 때로 사람에게 기적이 된다.

 

기적은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만 일어난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벗어난 기적은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또한 괜히 사람을 굴복시키기 위해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모든 경영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는 걸 지향한다. 이 경영과 목적을 위해 필요하면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모든 사람을 죽이실 수도 있다. 어차피 하나님이 창조주고 소유주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피조물인 사람이 인권을 운운한다는 건 우스운 이야기다. 어쨌든 기적은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는 존재가 되는데 필요한 경우에 일어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성령의 역사로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건 반드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저 병을 낫게 하거나, 갑자기 부자가 되게 하시는 성령은 없다. 사도행전의 모든 기적과 역사가 이와 같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분명해진다. 바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높은 자리를 추구하던 사람이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걸 믿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이 일으키시는 기적이다. 이게 신앙 안에서 당연한 말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늘 언급하듯이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고 그 성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위하겠다는 신앙 세계 안에는 이런 믿음이나 생각 혹은 가치나 기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에 대해 바로 이해해야 한다. 이 이해는 단지 기적이라는 하나의 명제를 이해하는 게 아니다. 십자가의 도, 낮아지는 도와 세상 가치 기준으로 낮고 천한 자리가 바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뼈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머리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이건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생명이 바뀌고 본성이 바뀌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정말로 이렇게 정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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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 이후에 받으신 시험은 말씀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네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시험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역시 끊임없이 시험을 받는다. 이렇게 끊임없이 지속된 시험은 십자가에서 끝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저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사람의 고백이 나왔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가정이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이 되어 모든 시험을 이긴다.

 

"네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시험은 십자가를 지므로 완전히 이긴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시험의 마침표인 십자가는 쉽지 않다. 엄청난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는 걸 밝히셨을 때, 세상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제자들조차 혼돈에 빠졌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므로 자기 죄가 사해지는 혜택을 중심으로 보기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건 정해진 당연함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며 세상에서 영광 얻기를 구하는 자신을 투영해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실패 그 자체인 죄인 그것도 사형수가 된다는 게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게 여기고 은혜라고 말한다. 이런 건 사실 십자가를 욕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으로 십자가를 진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마귀의 시험은 그리스도(메시아)라면 가난과 질병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문제와 로마의 속국인 상태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바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그리스도를 향한 본질적 시험이다. 그러나 금식 후 받은 시험에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게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게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셨듯, 오히려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아들과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대한 세상과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친다. 십자가가 모든 시험에서 이김을 얻게 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란 시험과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라는 생각은 같은 DNA

 

그렇다면 십자가는 어떻게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해 유혹하는 시험을 이기게 할까? 그건 그리스도는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인 하나님의 형상이자,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해 낮아지므로 영광스러워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셨는데, 그 뜻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신의 삶으로) 표현하는 본능을 가진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다. 십자가는 그 본능에 이끌려 간 낮고 천한 자리다. 따라서 십자가는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게 드러나는 자리다.

 

십자가는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게 드러나는 자리

 

마귀의 모든 시험을 진정한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시며 물리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유혹과 시험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물리쳤다. 십자가에 달리시니 사람이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 아들은 십자가를 지는 존재임을 보이시므로 마귀와 세상의 모든 시험, '하나님 아들이라면?'이라는 논쟁과 시험을 종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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