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삶이 세상에서 평안과 복락을 누리며 순탄한 삶을 사는 것이면 좋겠지만,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적어도 세상이 가진 기준에서의 평안은 아닌 듯하다. 물론 세부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빌레몬이나 루디아와 같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평안하고 괜찮은 삶을 산 듯한 사람들도 있고, 야곱이나 우리가 주로 이야기하고 있는 다윗도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 어려움 없는 세월을 살기도 했다. 그래서 인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언젠가는 세상에서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이 회복되고 축복을 약속 받은 후에 다시 어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더욱이 그 중에는 우리가 생각할 때 ‘죄’라고 생각하는 다윗의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 일도 많다. 우리 삶의 하나의 모형이라 할 수 있는 다윗이 이런 일들을 겪었다는 건 우리가 무심히 간과할 일이 아닌 건 분명하다. 물론 교회에 다니는 걸 천국을 보장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관점조차 무의미할지 모른다.
다윗은 우선 밧세바라는 하나님과 나라와 자기에게 충성하는 부하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하는 죄를 범한다. 이 행위로만 보면 하나님께서 큰 벌을 내리셔야 할 것 같다. 다윗의 이 행위를 제사를 자기 맘대로 드린 사울과 사회적 기준으로 비교해보면 많은 경우 사울보다 나쁜 행위로 인식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달랐다. 간음하여 잉태된 아들이 죽는 벌을 받기는 했지만 이 일로 하나님이 다윗을 버리시진 않았다.

우리는 다윗이라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결론을 알고서 성경을 본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지금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는 그 시점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울과 비교해서 ‘이게 맞나?’라는 의문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마냥 ‘다윗이니까’라는 식으로 이 일을 조명하면 곤란하다. 믿기 어렵겠지만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은 죄의 행위보다, 죄를 범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더 선행되는 심판의 기준이라는 걸 보여준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려 한다.
하나님은 죄라는 행위보다 그 행위를 누가 범하였는지를 먼저 보신다.
조금 성격이 다르긴 한데 모세가 이방인인 구스 여인을 취한 일이 있었다. (민 12장) 이때 모세의 형과 누나인 아론과 미리암이 이방인을 취했다고 책망했다가 오히려 하나님께 벌을 받아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고,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하므로 치유되는 사건이 있었다. ‘하나님 잘 믿는 지도자면 법을 어기도 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모세에 대한 처분도 다윗의 일과 유사하다. 죄의 행위 보다 누구의 행위인지가 선행 기준인 셈이다. 행위보단 존재가 우선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것과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건 사건의 성격은 조금 다르다. 다윗은 간음이고 모세는 당시 시대적 관점에서 정상적 혼인이다. 다만 상대가 이방인이었다는 게 문제인데 에스라 시대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혼인한다는 소식을 들은 에스라가 옷을 찢고 애통해 한 것을 보면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벌을 받기는 했지만 다윗이나 모세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다윗과 모세의 일은 소위 말하는 ‘있는 사람’의 일탈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당장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많은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여 타락했고, 악한 왕의 대명사인 아합의 경우 이세벨이라는 시돈 여인과 결혼해서 이스라엘 전체에 바알을 전파하여 마치 국교인 것처럼 만들기도 했다. 당연히 이들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모세나 다윗은 이런 일로 영적인 타락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이건 그들이 자기 잘못을 잘 통제한 결과가 아니다. 그들의 정체성 곧 본성이자 속사람이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의 행동은 자기 본성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사람을 보신다.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평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온전하고 제대로 된 기준인 속사람의 정체성이 있는데 겉으로 나타난 행위를 가지고 사람을 심판하는 게 오히려 공정하지 않다.
다만 다윗의 행동은 본성이 아니라 행위, 좀 쉽게 말해서 겉사람인 육신에 의한 범죄다. 하지만 그의 본성과 정체성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므로 그는 벌을 받았지만 버림을 받지는 않았다. 이를 비유하면 아들과 종이 친해서 같이 놀다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는데 마루에 같이 누워있다가 아버지를 보면 종은 아파 죽을 지경이 아니라면 일어나야 한다. 물론 아들도 일어나는 게 예의지만 그대로 있다고 해서 꾸중을 듣기는 하겠지만 호적을 파 버리지는 않는다.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들이라는 유전자가 바뀌는 건 아닌 것과 같다. 이게 거듭남의 위력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기준은 사람의 정체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의 당사자가 어떤 존재, 어떤 사람,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보신다. 이게 유일한 평가 대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행위를 본다.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지를 본다. 그래서 지금도 어떤 잘못된 행동을 한 후에는 회개 기도를 한다. ‘행여 그 일로 하나님이 나를 버리면 어떻하나?’ 라는 염려로.
이처럼 사람들은 대게 본성이 아니라 행위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성경이 행위로 의롭게 되려 한다. 말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자기 행위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깔끔한 모습과 경건한 행위로 예배를 드리려고 하며, 심지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심판하기도 하고, 자기 자녀가 그렇지 않으면 징계한다. 이런 관점으로 다윗을 보면 다윗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대하신 다는 게 보이지 않고, 죄를 지은 다음에 회개를 잘한 것으로만 보인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행위로 만나는 사람이므로 행위가 온전해야 한다. 만약 다윗이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면 간음하여 잉태한 아들이 아니라 다윗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의 조상인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존재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인 사람이다. 말로는 오직 믿음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죄를 인하여 지옥에 갈까 염려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우리에게 이걸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 축복의 약속을 받은 이후에 밧세바와 간음하는 등 오히려 죄와 실수를 많이 범한다. 집안에도 불미스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복 형제끼리 강간하고 죽이는 일뿐 아니라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은 다시 도망자가 되는 어이없는 일들이 계속 생긴다. 이런 다윗을 보면서 ‘예수 믿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행동하지?’라고 생각하거나 설교할 게 아니다. 그건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태도다.
만약 다윗의 범죄들을 연약한 육신의 죄와 실수에 대한 올바른 신앙적 대처와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그건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다. 다윗이 겪은 일들은 거듭난 사람, 구원받은 삶의 한 단면이다. 아니 어쩌면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받았다고 모든 행위가 성인군자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만사가 형통해지는 것도 아니다. 육신의 평안이 구원의 은혜라면 예수님과 순교한 사도들은 바보가 된다. 다윗의 일은 거듭난 사람의 삶에 일어나는 일과 거듭난 사람이 어떻게 손과 발을 씻어 내는지에 관한 말씀이다.
거듭난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과 그의 행동은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도화지 같은 것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거듭난 삶을 세상적으로 완전 무결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와 손과 발을 씻어야 하는 자를 구분해서 말씀하셨다. 목욕했다고 손과 발이 더러워지지 않는 건 아니다. 거듭난 사람도 말을 실수하고, 때로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만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구원은 이런 것조차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생각에 이르지 못하는 건 행위의 죄는 곧 심판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건 사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본성이다.
다윗의 여러 범죄들과 이에 대응하는 자세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은 그 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뻔뻔한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다면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육신의 아들을 호적에서 지워도 DNA가 바뀌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윗은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게 존재로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가장 든든한 반석이다.
다음으로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처분에 대해 순종했다. 벌까지 순종한다는 단순함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하나님과의 든든한 관계라는 기초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면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인정하고 징계를 순종할 수 없다. 다시 도망자가 되고, 자기 백성이 수 없이 죽는 일들이 자기의 멸망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밧세바가 낳은 첫 아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다. (이건 다음에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다윗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든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요즘 말로 쉽게 바꾸면 <구원의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의 확신은 행동으로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행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는 데 더 크게 돌이킨다. 다만 그 일로 내가 하나님 아들의 자리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거듭남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관점이 있다.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이 되는 것이다. 그건 내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걸 알게 되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도화지라는 것도 알게 되고, 나의 모든 삶의 행동들 역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육신으로 살면서 겪는 여러 어려움과 나의 행동으로 인한 죄(존재가 아닌 행위의 죄)들은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동기와 도화지가 된다. 다윗이 행위로 지은 죄들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 가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한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 드러난 것처럼.
여러 실수와 중대한 죄를 저지른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지 않은 것을 유심히 봐야 한다. 내가 범한 행위들로 인해 행여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는 신앙의 관점으로 이 사건을 조명하면 안 된다. 다윗의 여러 일들은 거듭난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나타나고, 육신으로 겪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씻어야 하는 손과 발(행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거시적 관점을 가지고 봐야 한다. 다만 이렇게 보려면, 이것에 동의하려면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안목으로는 그렇게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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