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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예수님의 시험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8. 29. 17:46 Writer : 김홍덕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

 

40일 금식을 마친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마귀는 가장 먼저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는 시험을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유혹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금식으로 굶주린 예수님의 약점을 노린 것처럼 보인다. 많은 기독교인의 생각도 그렇다. 하지만, 앞서 <양식>에서 설명했듯이 우선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이 시험은 육신의 배고픔을 이용한 시험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란 능력은 육신의 빵을 만드는 능력이 아니다.

 

이 시험의 핵심은 돌이나 떡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말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조롱 역시 같았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거기서 내려 와 보라고.

 

지나가든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마27:39-40)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모두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시험과 유혹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십자가를 지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우리의 시험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시험을 지금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하나님 아들에 대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으로 자신을 볼 때 하나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고 스스로 심판한다. 하나님 아들이라면 화를 내지도 않고, 항상 좋은 말만 하고, 욕심이나 음란한 생각도 없어야 한다는 게 사람이 가진 하나님 아들의 기준이다. 사람은 그 기준으로 통과할 수 없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은 하나님 아들에 대한 사람의 기준과 연결되어 있다. 돌은 율법이고, 먹는다는 건 사람이 소화한다는 의미인데, 결국 율법을 다 지켜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는 게 마귀의 계략이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가진 기준 때문에 마귀의 시험에 늘 패배한다.

 

사람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더 많은 돈이 있었으면 바라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이런 부끄러움은 아담에게서 비롯됐다. 놀랍게도 아담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건 선악과, 곧 선과 악에 대한 기준으로 스스로 가지면서부터였다. 사람이 가진 기준으로 자신을 보니 부끄러웠고, 율법의 나무인 무화과 잎으로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다. 즉 돌로 떡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성경을, 율법을 행위로 지켜서 선한 존재인 하나님 아들이 되려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마귀는 이 마음을 공략하고, 사람은 늘 패한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시험을 물리쳤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가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의 육신이 된, 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다. 이건 창조 목적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이 육신, 곧 삶이 되었다는 뜻인데, 예수님은 사람은 이렇게 사는 존재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이 살았다고 하려면 이런 존재여야 한다. 성경이 세상 사람을 가리켜 살아 있음에도 어두움과 사망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심이 여기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게 아니면 산 게 아니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으로 여길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 주의할 게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의로워지려는 노력과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은 전혀 다르다. 겉으로 표현되는 행동은 비슷할 수 있지만, 존재가 다르기에 모든 게 다르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도 모두 기도했지만 전혀 다른 것처럼.

 

이 차이, 이 간격에 마귀의 시험이 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즉 율법을 지켜내야 하지 않느냐?"며 사람을 시험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뜻과 목적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을 기록한 게 성경인데,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지 않느냐며 시험한다. 그리고 마귀의 이 시험은 오히려 "예수님과 우리는 다르니 성경을 지키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라는 기독교인들의 겸손한 신앙이 되어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단 하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그 안에서 왜 시험에 들지 말기를 기도하라고 하셨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건 사람은 누구나 시험에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험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하나님께 그 시험을 이기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받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나므로 이 시험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의 능력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마귀에게 시험받고 스스로가 심판받는 쟁점이 바로 우리 육신을 인함이란 걸 알 수 있다. 이 육신 그대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없으니, 성경을 육신의 행위로 지켜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유혹과 사람의 생각이 돌로 떡을 만들어야 하나님 아들이라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마귀의 시험이다.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핵심 쟁점인 셈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을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하셨다. 이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좋다는 게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 육신 그대로는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으므로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야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의 말씀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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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6-43)

도르가라 하는 여제자 다비다는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인데, 그런 그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그를 씻겨 다락에 누이고 베드로가 가까이 있다는 말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불렀고 도착한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이런 정황으로 볼 다비다는 신실한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역의 모든 과부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베드로가 왔을 때 그가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이며 그를 기념할 정도로 선행과 구제가 일상인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성경을 삶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병들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건 어쩌면 사람이 체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이 단지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일어나진 않는다. 하나님께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믿는 건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다. 주목해야 하는 건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나와 상관이 없으면 하나님께 어떤 능력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성경이 어떤 책이냐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이나 북한의 법령집(그런 게 있다면)이나 나와 상관없다는 건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그 뜻의 기본 주제를 알 필요가 있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는 주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살리겠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면 그게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다.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이 곧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도르가와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는 모두 성경의 이 주제를 설명하는 사건이다. 성경의 이 기적들을 그렇게 믿지 않으면, "이 시대는 왜 시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며 질문하고 학문적인 연구를 하는 꼴값을 떨게 된다. 그런 의문과 학습은 자기에게 구원이 없다는 걸 떠벌리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나의 구원이 다비다나 나사로와 같은 경험이란 걸 생각하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것

 

성경 속에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몇몇 일들은 형식적으로 보면 부활이지만 본질은 거듭남과 구원을 설명한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 다시 죽었고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영원한 예수님의 부활과 다르다. 그래서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부활을 설명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우리 모든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믿는다면 자신 역시 도르가와 같이 죽었다고 살아난 사람이라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은 왜 초대교회 같은 기적이 없느냐는 소리를 하고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도르가라 하는 여제자 다비다는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인데, 그런 그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그를 씻겨 다락에 누이고 베드로가 가까이 있다는 말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불렀고 도착한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이런 정황으로 볼 다비다는 신실한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역의 모든 과부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베드로가 왔을 때 그가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이며 그를 기념할 정도로 선행과 구제가 일상인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성경을 삶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병들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건 어쩌면 사람이 체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이 단지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일어나진 않는다. 하나님께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믿는 건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다. 주목해야 하는 건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나와 상관이 없으면 하나님께 어떤 능력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성경이 어떤 책이냐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이나 북한의 법령집(그런 게 있다면)이나 나와 상관없다는 건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그 뜻의 기본 주제를 알 필요가 있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는 주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살리겠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면 그게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다.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이 곧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도르가와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는 모두 성경의 이 주제를 설명하는 사건이다. 성경의 이 기적들을 그렇게 믿지 않으면, "이 시대는 왜 시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며 질문하고 학문적인 연구를 하는 꼴값을 떨게 된다. 그런 의문과 학습은 자기에게 구원이 없다는 걸 떠벌리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나의 구원이 다비다나 나사로와 같은 경험이란 걸 생각하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것

 

성경 속에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몇몇 일들은 형식적으로 보면 부활이지만 본질은 거듭남과 구원을 설명한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 다시 죽었고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영원한 예수님의 부활과 다르다. 그래서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부활을 설명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우리 모든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믿는다면 자신 역시 도르가와 같이 죽었다고 살아난 사람이라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은 왜 초대교회 같은 기적이 없느냐는 소리를 하고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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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빠지지 않기를 간구하라고 하신 시험은 하나님의 시험이 아니라 마귀의 시험이다. 여기에는 마귀, 사탄, 귀신이라는 존재의 정의도 필요하다.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한 것도 마귀다. 마귀의 일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을 훼방하는 모든 요소고, 마귀의 시험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없다는 유혹이다.

 

마귀의 일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걸 방해하는 것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40일 금식을 하셨다. 그리고 금식을 마쳤을 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다. 그 시험은 세 가지인데 사실은 한 가지다. "육신을 가진 네가 어떻게 그리스도냐?"라는 것 하나다. 예수님께 요구한 세 가지 시험은 모두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요구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람 이상의 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게 마귀 시험의 실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유혹이 사탄의 시험

 

본질은 같지만 다르게 보이는 마귀의 시험이 있다. 그건 <십자가를 지는 것>을 훼방하는 것인데, 이것은 실로 교묘하고 정교하다. 베드로만 봐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멋진 고백 뒤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 없다고 만류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책망을 들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생각은 마귀의 생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건 사탄의 생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므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분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고 믿겠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거듭나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믿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설교는 모두 마귀의 생각과 마귀의 시험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가 건져짐을 받고, 빠지지 않아야 하는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고, 보통 사람 이상의 역량을 보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를 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제 이 마귀의 시험이자 우리가 빠지면 안 되는 시험을 이야기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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