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4

(21:1-16)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사도를 향해 제자들과 여러 성도들이 바울 사도를 만류한다. 두로에 머무는 동안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께서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을 것을 예언하신다며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했고, 가이사랴에서는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의 딸도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한다. 심지어 빌립 집사의 딸은 바울의 띠를 가지고 자기 수족을 매는 퍼포먼스를 행하면서까지 바울 사도의 운명을 예언했지만 바울 사도는 굽힘 없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면 성령께서 운명을 알려 주시는데도 굳이 예루살렘으로 가려 하는지, 또 바울 사도는 어떤 잘못을 했기에 고난을 받게 되는지가 의문스럽다. 만류하는 이들이 자기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무당이거나 잡신에 접한 예언을 하는 것도 아님에도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렇지만 의외로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행을 이끄는 분은 성령이시다. 사도 바울의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건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가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건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행은 성령의 예언을 거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거역하는 게 아니다 순종하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

 

예루살렘에 간다는 건 고난을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한다는 것임을 바울 사도도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에게 닥칠 이 위협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신앙과 다른 믿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를 죽이려는 시대적 상황이 만든 위협이 아니다. 이건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운명이다. 마치 결혼한다는 건 자기 인생이 축소되고 아이를 위한 헌신과 가족으로 살아가는 헌신만 요구하는 삶으로 던져지는 걸 알면서도 결혼하는 사람의 본능과 같은 것이다.

 

앞서 우리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성령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시는 분이라는 걸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셨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로서 사는 삶을 초대하신 것이다. 그건 우리도 십자가를 지는 운명으로 거듭나기를 청하신 것이고, 그게 바로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고난이 예견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건 성령이 충만하고 그 성령을 전하는 사도 바울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바울의 위대함을 찬양만 할 게 아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 그리고 많은 사도들이 불 보듯 뻔한 고난에도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고난에 순종했다는 건 그들이 전한 복음을 믿는 우리 역시 같은 순종을 살아야 한다는, 아니 그렇게 살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어쩌면 이 운명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운명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의 십자가나 사도들의 순교에 비할 바는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자기 십자가가 있고, 우리는 그 십자가라도 바로 지고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대로 살아가야 한다. Have to는 의지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고난을 감수하면 나의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지려고 노력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고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건 노력으로 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거듭난 삶을 산다면 나름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산다. 그게 어떤 이들에게는 육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엄청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육신의 목숨을 던져 헌신하는 일은 신앙의 세계뿐 아니라 모든 세계와 영역에서 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엄청난 일이다. 우리가 사도들에 대한 존경을 깊이 간직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비록 우리가 그런 엄청난 고난에 참여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나름의 십자가와 고난이 다 있다. 이 고난은 성령이 인도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모든 사람을 고난,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인도하신다.

 

성령이 담금질하듯이 우리를 고난에 이끄시는 건 아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지극히 고난에 속한다.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준다는 건 누구나 하기 싫은 일인데 이 일을 본능으로 행하게 되는 존재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성령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길로 인도하신다.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고난이 있음에도 거역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물론 이건 굳이 작심하지 않아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자기 운명이 그렇다는 걸 살면서 알게 된다. 한국에서 남자로 나면 군에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여자로 난 사람은 엄청난 고통에도 출산을 하게 된다는 걸 할게 되는 것과 같다.

 

역설적으로 자기 삶에 고난,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있을 거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주 어리거나 그리스도로 거듭난 상태가 아니다.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고난 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20:13-38)

바울 사도는 전 선교 여행 기간을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머물렀던 에베소를 떠나면서 전한 고별 설교에서 자신이 떠나면 이리와 같은 사람들이 와서 어그러진 말로 유혹할 것임을 알고 있다며 경고했다. 그때는 자신이 전한 은혜의 말씀이 성도들을 튼튼하게 세워 그런 유혹을 이기게 할 것이므로 이를 잘 명심해 주기를 권면했다.

 

대응하는 방법으로 적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교회를 바로 정의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거리에서 보는 교회가 사도행전에서 또 많은 서신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의 정통성을 가졌는지부터 살펴보자.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고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구하고, 예수 믿었더니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걸 은혜로 알아 간증하는 곳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인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상식이 있다면 우리가 아는 교회는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교회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교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염려한 일은 지금 우리가 아는 교회에 일어나지 않는다. 즉 이리와 같은 사람들이 와서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정통 교단의 교회에 신천지가 침투하는 사건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신천지나 정통 교단이나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건 같다. 세상에서 평안과 복락을 얻고 성공하는 삶을 살고 그런 복락이 사후 세계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분명히 십자가를 지신, 낮고 천해진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바울 사도가 염려한 그대로의 모습인 오늘날 교회

 

오히려 지금의 교회는 바울 사도의 염려대로 이미 침략당한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미혹하는 이들이 들어오면 자신이 전한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같은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은혜의 말씀으로 맞서라고 했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아니라는 것과 오늘날 교회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과 이론이 이리처럼 교회를 노리는 존재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 이리들과 같은 조직이 되었다. 이미 이리에게 먹힌 상태이므로 바울 사도의 경고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건 회개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20:13-38)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30~50Km 정도 떨어진 밀레노스에서 3차 전도 여행을 마친다. 이때 사도 바울은 사람을 에베소에 보내서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고 고별 설교를 전한다.

 

바울 사도의 고별 설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은 고난이 따르며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늘 침략받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평안과 기쁨을 주는 구원을 얻었는데 오히려 고난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의아함을 낳는다.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 바울 사도 자신은 고난을 받았는데, 고난의 고통이 기쁨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을 풀어가는 시작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인지를 믿는 믿음이 이런 의문을 해소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아니라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 29:11)

 

주목할 것은 성령이다. 성령께서 바울 사도에게 여러 가지로 고난이 있을 것임을 알려 주셨다는 것이다. 고난과 곤란은 어쩌면 졸지에 당하는 게 어쩌면 나을 수도 있다. 당하기 전까지 적어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바울 사도에게 고난이 있을 것임을 먼저 알려 주셨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는 분이 성령

 

그러나 이는 성령께서 고난이 있을 것임을 따로 이야기했다기보다 성령의 직임을 인함이다. 성령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시는 분이다. 성령은 우리가 십자가를 질 것임을 알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살게 될 것이라는 건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림과 세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며, 십자가를 진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고난이다. 바울 사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자고 권면하기까지 했다. 성령은 고난 당한다는 이벤트를 알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게 하나님 아들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신다. 바울 역시 이 관점에서 말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그렇다고 십자가를 진다는 게 고난만 있는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고난의 본질이다. 존재에게 있어 고난은 무엇이냐를 아는 게 중요하다. 존재는 존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목적에서 벗어나면 고난보다 더한 무쓸모의 존재가 된다.

 

게다가 사람은 유일하게 자기가 존재한다는 걸 인식할 뿐 아니라 스스로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탐구하는 유일한 존재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대상에게 직접 창조 목적이 있다는 것과 그 내용을 알려 주신 존재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가장 큰 재앙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이건 고난 수준이 아니라 재앙이다.

 

존재의 목적을 모르는 건 고난의 차원이 아니라 재앙 그 자체

 

따뜻한 게 아무리 좋아도 시원함을 선사하는 아이스크림에는 재앙이다. 또 몸이 상하지 않고 보존되는 게 아무리 복이라고 해도 자동차 브레이크 패드가 자기 몸이 상하지 않는다면 자기뿐 아니라 운전자의 생명을 해치는 위험이 된다. 흔히 자주 비유하는 초도 마찬가지다. 아이스크림이나 브레이크 패드 그리고 초는 다 존재하는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평안과 복락을 떠나야 한다.

 

존재에겐 일반적인 복락이나 평안보다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이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가치다.

 

이처럼 존재에게는 존재 목적이 가장 중요하다. 존재 목적보다 일반적인 복락과 평안을 추구하면 안 된다. 성경은 그런 자세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이걸 간과하면 안 된다. 복락과 평안은 내가 존재하는 목적을 이룬 다음의 이슈지 그게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적을 벗어나 일반적인 평안과 복락은 오히려 재앙이 된다. 이건 순서가 바뀌면 안 되는 일이다.

 

존재는 존재 목적과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고 고난을 정의할 수 없어 …

 

그런데 사람은 이런 목적과 별개로 고난을 생각한다. 우선 육신의 평안과 복락이라는 상대적 개념을 기준으로 고난을 정의한다. 정작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고 그 목적대로 사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고난에 대한 개념이 잘못된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고난받은 예수님께 받은 복음으로 살겠다면 육신의 평안과 복락을 간구하게 된다. 무엇이 기쁨이고 평안인지 모르는 건 너무 당연한 이치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고난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 사람에겐 가장 선행되고 중요한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평안과 복락은 그다음 과제이자 문제다. 바울 사도가 부유함에도 궁핍함에도 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다시 성령의 정체성으로 돌아가 보자. 성령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시는 분이다. 십자가를 지는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심으로 우리도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자체로 십자가를 지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로 확정된다. 그렇다면 고난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셈이다.

 

그리스도로 살아가면서 겪는 가장 큰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고난이나 힘겨움은 없다. 역설적으로 이 고난이 없다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돌아가면서부터 고난을 받을 것임을 알면서도 삶을 후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아는 일로 받는 고난은 모르며 살아가는 곤고한 인생에 비할 바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