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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일용할 양식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6. 13. 05:16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기도 주기도문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가진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기도가 이루어진 실체다.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신 말씀도 궤를 같이한다. 언뜻 육신의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씀처럼 들리지만,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신 예수님이다. 이 양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다.

 

물론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육신의 양식은 절대적인 요소다. 성경은 이것이 불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면 육신의 양식에 관해 하나님께 의지하는데 이건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 앞서 먼저 구할 게 있다고 했다. 그건 바로 앞서 주기도문에서 사람인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다. 임하기를 간구하라는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의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1-33)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임했다는 건 곧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육신인 사람의 인생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먼저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인 말씀이 육신이 된 삶에 필요한 건 부족함 없이 공급하신다. 이동이란 목적으로 자동차를 산 사람이 항상 기름을 넣어 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그러므로 주기도문에서 구하라고 하신 일용할 양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양식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육신이 된(나라가 임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구하라고 하신 일용할 양식이 무엇인지 안다. 생명은 자기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임한 사람, 줄여서 거듭난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양식이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양식임을 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양식은 곧 그리스도의 양식이다. 이 양식이 어떤 것인지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여인을 만났을 때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게 그리스도의 양식>이라고.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1-34)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여인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걸 전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깨달은 여인이 마을로 사람을 부르러 갔다. 그사이 먹을 것을 사러 갔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육신의) 음식을 권했는데, 예수님은 <나의 양식>이 따로 있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누가 따로 음식을 가져다드렸는가?'라고 생각했다. 이때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따라서 주기도문을 통해 구하라고 하신 일용할 양식은 나에게 임한 나라의 의, 하늘의 뜻대로 사는 삶이다. 육신이 된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양식으로 먹는 것이다. 생명에 관한 것이며, 본성에 관한 것이다. 생명이 자기가 무엇을 먹어야 본능으로 알 듯,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땅과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본능에 따라 사는 게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다. 이게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삶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사람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무엇보다 이 양식,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뜻을 행하는 양식은 하나님 나라와 의가 이루어진 사람만의 양식이다. 이 양식은 육신의 양식을 먼저 구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남자가 출산의 고통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절대로 알 수 없고 먹을 수 없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땅인 사람에겐 오히려 하나님이 인생을 주신 뜻을 행하는 것 외의 양식은 없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 119:103)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매일 그렇게 살아야 하기에 일용할 양식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그것도 머리로 아닌 게 아니라, 출산한 여자가 남자를 안다고 말하듯 지가 몸으로 체휼하여 아는 것이다. 그렇게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다. 그런 삶, 그 양식을 구한다는 건 결국 그런 사람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주제인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에 속한다. 이렇듯 주기도문은 목적과 방향이 분명하고 순서 또한 명확하다.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건 결국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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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 – 핍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6. 9. 06:35 Writer : 김홍덕

(5:17-42)

가말리엘(: 하나님의 상급)의 변론을 옳게 여기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대제사장 무리는 사도들을 불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였다. 하나님의 일인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라는 가말리엘의 말을 진정으로 옳게 여겼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인데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보였다.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 하신 그대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회는 지속적인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사도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한 합당한 상황이라 여기고 채찍질을 당했음에도 기뻐하면서 공회, 곧 대제사장 무리들을 떠났다. 그러고는 언제 채찍질 당했냐는 듯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가르치고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입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행 5ㅣ41-42)

 

초대교회라고 하면 우리는 '성령 충만', '완전한 공동체'라는 것과 함께 핍박을 떠올릴 정도로 많은 핍박이 있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받은 핍박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했고, 사람들이 이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교회를 핍박하는 부류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게 정당했고, 그는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을 선지자의 한 명으로 본다는 이슬람도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 더 정확히는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자신이 핍박받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니 교회에 다니는 걸 반대하는 부모님의 관점을 핍박으로 보기도 하고, 집안일 등한시 한다며 교회 가는 걸 반대하는 가족의 잔소리를 또한 핍박으로 생각한다. 사랑의 교회(전광훈 목사)같이 아주 심각한 착각도 있는데 이건 언제 한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쟁점은 이것이다. '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가?' 그리고 내가 핍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들의 의견은 십자가를 진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작은 종교적 논쟁 하나를 가지고 모든 신앙의 갈등과 신앙 없는 이들이 교회와 기독교인을 대하는 태도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는 게 합당한지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이건 이단을 판단하는 원천적 기준일 뿐 아니라, 당연히 핍박을 정의하는 기준이다.

 

따라서 핍박을 논하려면, 오늘 나의 신앙이 십자가에 달린 천한 죄인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신앙을 가졌는가가 먼저고, 다음으로 상대가 낮고 천한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지를 봐야 한다.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저 다툼일 뿐 전혀 핍박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 신앙 역시 온전한 신앙이 아니므로, 누군가로 인해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건 환상이나 정신 승리일 뿐이다.

 

핍박의 정의는 낮고 천한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주장이 낮고 천한 죄인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말라고 강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낮고 천한 예수가 어떤 예수인지를 상고해야 한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께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게 맞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런 신앙을 가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가능성이 하나도 없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님께 세상에서 높아지는 걸 간구하는 게 이미 정상이 아니다. 당연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수가 없다. 높아지기를 간구하는 예수를 믿고, 그걸 설교하고 가르치는 교회에 간다고 손해를 입는 건 핍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징벌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핍박의 정의를 바로 잡자는 게 본질이 아니다. 결국은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지를 돌아보자는 이야기다. 사도들도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에게 어떻게 하느냐와 무관하게 그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전하는 그 하나를 기준으로 살았다. 이 믿음과 복음이 신앙의 뿌리이자 전부고, 이것이 핍박의 이유기도 하고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이유이자 근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예수 믿는 걸 두려워한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가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를 믿으면 자신도 낮고 천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핍박하는 사람들은 이 상식적인 논거를 알고 있다. 어쩌면 이들이 예수를 더 정확히 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를 믿어서 세상에서 낮아지거나 높아지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낮고 천한 신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인데, 그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거나 말거나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신 게 바로 이것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으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이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건 돈이나 권력과 같이 세상이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굳어 있는 어떤 기준들이 하나님 아들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믿는 것이다. 즉 육신의 형편이 어떻든 하나님 아들이 되고, 복음을 전하고 말할 수 있다는 걸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믿음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다. '그래도 예수 믿는다면 잘 살아야 사람들이 그걸 보고 예수 믿지!'라는 일상적인 말이나, '설교하려면 신학교는 나와야지', '강대상에 오르려면 강도사는 되어야지'라는 말들을 선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이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게 불편한 사람들이다. 가난해서 씻지 않은 발로 교회를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하고, 강도사나 목사가 아닌데 강대상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걸 반대하는 사람이다. 즉 예수를 핍박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게 바로 핍박이다. 이 핍박은 세상 기준으로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처럼 낮고 천해지는 걸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대로 되지 않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진 예수는 그리스도여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 예수 믿을수록 잘 산다고 말하고 싶고, 자격이 있어야 강대상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어 전하시고자 한 복음은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 사람이 자기 인생을 살기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목적대로 사는 존재로서의 사람은 그 삶이 평안하다. 이건 가난이나 부유함이나 신학 수학의 유무와 별개의 문제다. 존재가 존재로서 존재하는 목적을 아는 근원적인 안식과 복의 문제다. 이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존재로서의 목적을 아는 온전한 존재로 삶을 산다. 이게 모든 복의 시작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저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렘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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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42)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믿는 사람이 불어나며 사람들이 교회를 칭찬하자 대제사장 및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앞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풀어주면서 다시는 너희의 교를 전하지 말라고 나름의 경고를 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사도들로 인해 병든 사람이 치유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이 늘어나자,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 사도들을 잡아 투옥했다.

 

그런데 사도들을 투옥한 일은 일반적인 상황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자가 능력으로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빼내어 성전에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였다. 이런 신비한 일을 보면서도 제사장과 무리들은 다시 사도를 잡아 가두려 했지만, 백성들이 사도와 교회를 따르는 연고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게다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그들을 진노하게 만들기 충분했고, 결국 어떻게 사도들을 죽일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고 사도 바울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흥분한 제사장 무리에게 간단한 논리로 사도들 핍박하는 걸 저지한다. 그 간단한 논리는 사실 너무 단순하다. 복음이 하나님의 일인데 핍박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고, 복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면 스스로 소멸할 거라는 논리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믿음이 얼마나 상식적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눈앞에 보이는 일을 바라보는 당연히 가말리엘 같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경영이라고 믿는 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한 뿌리다. 이걸 부인하거나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건 모순을 넘어 거짓된 신앙이다. 내 앞에 펼쳐지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건 정의가 아니라 불신이다. 잘못된 게 있다면 그건 세상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정의 개념이다. 성경은 이걸 선악과라 한다. 하나님께서 실수도 없이 경영하시는 세상이 모순이라고 투쟁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는 악이고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배 드릴 때 대표 기도하는 사람이 간혹 하나님께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아 달라고 간구하는 걸 들을 수 있다. 사실 '간혹'이 아니라 아주 자주 듣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런 기도 전후에 고백하는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서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고, 또 하나님을 실수도 하지 않는다며 찬양도 늘 부른다는 것이다. 실수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나님께 바로 잡아달라 기도하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논리임에도 어느새 그게 거룩함이 되어 있다. 말 그대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형태 그 자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 범위를 넓혀 성경(의 일부)을 기반으로 한 종교들의 믿음은 이처럼 모순적인 게 많다. 당장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았으므로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믿으면서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건 완전한 모순임에도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매일 회개해야 하는 사람, 그것도 불안해서 앞으로 지을 죄까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죄가 없어야 가는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성경의 근간을 부정하면서 성경대로 살려고 한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베드로와 사도들의 기적을 보고 그들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제사장 무리들을 비난하고 타산지석을 삼으려 한다. 이걸 도무지 어떻게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이성을 가진 사람의 고유한 영역이다. 사람이 가진 역량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사람이 문자를 알기 때문에 성경이 기록되었고, 말을 할 수 있어 복음이 전파된다. 같은 맥락에서 상식과 이성과 논리가 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이건 믿음이 아닌 논리나 상식으로 하나님을 믿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성이 없고 논리가 없다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이성과 논리로 하나님이 인정되지 않는데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걸 믿는다면 세상이 온전하다고 믿어야 한다는 논리 없이 하나님의 경영을 믿을 수는 없다.

 

가말리엘의 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믿자는 설득이 아니다. 사도들의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거라면 핍박하면 안 될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면 스스로 망할 거라는 게 얼마나 상식적이고, 논리적인가? 전능하시고 실수도 없으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할 게 아니라고 판단하는 상식을 회복하자는 게 믿음이 아닌 상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자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오늘 평범해 보이는 가말리엘의 사고 방식으로 우리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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