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 19절 이하에서는 회심한 사울이 즉시로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이심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사울은 갈라디아서 1장(17, 18절)에서 자신이 아라비아에 3년간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기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다메석의 회심은 AD 34년 경이고, 사도행전 9장 19절에서 사울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시점은 AD 37년 경이라 말한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그 사이에 아라비아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울이 다메섹의 회심과 복음 전파 사이에는 3년의 묵상이 있었다는 걸 이야기한다. (사도행전의 순서로 보면 13장이 되어서야 이름이 바울로 바뀌지만 우리의 익숙함을 위해 그냥 사도 바울이라고 한다.)
오늘 여기서 사도 바울의 회심과 아라비아에서의 3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온전한 복음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쉽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오면 짐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거저 주는 은혜라는 말의 영향 때문인지 교회에 다니는 복음과 구원을 아주 쉽게 여기지만, 사실 복음의 과정은,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걸 "나는 예수 믿는다"라는 말 한마디로 모두 쉽게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고, 믿는 건 큰 오류다. 그리고 이 큰 오류가 현재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면 복음이 어려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분명 복음은 쉽고 가벼운 것이다. 하지만 복음에 이르는 건 어렵다. 쉬운 복음에 이르려면 사람이 자기 마음을 돌이켜야 하는데, 이게 정말 어렵다. 그래서 복음은 어렵다. 바울 사도의 여정은 사람이 자기 마음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건 오늘 우리에게 "나에게도 그런 과정이 있었는가?" 반문하게 한다.
바울은 복음에 이르기 전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자기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사람을 잡아 가두고 때리며 핍박하면서까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온전한 믿음이라는 걸 믿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니 자기의 모든 가치관은 어두움 그 자체라는 게 드러났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체험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서신 전반에는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건 자기 안에 그 흔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복음을 쉽게 생각한다. 성경을 행위로 지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는다. 어려운 건 타협한다. 신학이 이를 돕는다. 십일조를 하려면 세전 금액으로 해야 한다. 어느날 대접받은 식사의 10%도 다 적립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십일조다. 세후 금액으로 십일조를 낸다는 건 하나님보다 이 땅의 나라에 더 굴복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해 보면 이 말씀이 행위로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이미 신학과 기독교 신앙은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는 탈출구를 마련해 두었다. 하나님을 믿는 게 너무 쉬워져 버렸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빈도 부사는 자기들 맘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게 신앙이라는 말이 그 쓰레기통의 뚜껑이 되었다. 노력이란 이르지 못한 이들의 행위인데도 자기들이 노력하는 자들이란 걸 부인하면서 신앙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양두구육인 셈이다.
신앙의 세계가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예수 믿는 걸 아주 쉬운 일로 여긴다. 세례 문답 시간에 대답 몇 번이면 구원받은 줄로 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구원은 없다. 자기 안에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과 체험과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은 건 오직 예수 믿음으로 얻게 될 복락뿐이다. 숨기고 있지만 육신의 노력으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의 복락은 당연히 육신의 복락이다. 이런 신앙에 구원은 없다.
바울 사도는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에 정말로 죽을 힘을 다했다. 그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해도 앞장 섰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니 자기의 모든 안목은 어두운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 그의 서신 전반에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그렇게 강조한 이유다. 그런 그가 아라비아에서 보낸 3년은 보지 않아도 자기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그에게 이제 성경은 온전한 복음이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능통했다. 단지 그는 그걸 자기 육신의 노력으로 지키려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그가 아는 성경은 모두 복음이 되었다. 자기가 아는 모든 성경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고백이 있는 사람의 삶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복음이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자기 능력껏 성경을 행위로 지켜보려 했던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말씀이 복음의 능력이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정말로 성령이 오시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의 삶 전체가 복음의 능력이 되었다. 바울도 그랬다. 오늘 우리도 그럴 것이다. 신학이 제시한 타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릴 적부터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신앙적 경험과 성경 지식은 복음의 능력이 된다. 이걸 다른 말로 성령의 충만과 능력이라고 한다.
다시 한번 예수 믿는 건 쉽지 않다는 걸 분명히 한다. 자기 육신의 모든 걸 다해 성경을 지켜보려고 노력하는 삶을 쉽다고 말할 게 아니라면 분명 그 과정은 어렵다. 이는 출애굽의 광야 생활과 같고 사도 바울이 사울로 살던 시절과 같다. 이 과정이 없으면 쉬운 복음에 이르지 못한다. 구원과 복음 안에서 장성하는 건 그냥 쉽다는 말을 믿는 것 만으로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이걸 분명히 알고 자기 신앙을 돌아봐야 한다. 이게 우리가 사도 바울의 삶을 따라가며 배워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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