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사방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성도들이 있는 룻다라는 곳에서 중풍으로 누운 지 8년이 된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난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너의 자리를 정돈하라고 하니 즉시 일어났고 이로 인해 그 지역에 사는 사람 모두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이므로 양립성이 있다.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이 같아야 한다. 서로의 생명 정체성이 같아야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유전자가 전혀 다른 동물 혹은 식물끼리의 교배로는 생식이 일어나지 않는 게 대표적이다. 성경에 일어나는 기적들이 참 놀라운데 어느 하나도 예외 없이 이 양립성이 존재한다. 병을 고치는 게 대표적이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병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종속된 치유다.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칠 때 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치신다"라는 말 역시 당연히 그렇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고쳐지는 병을 고쳤다는 뜻이다.

 

물론 애니아는 육신으로도 중풍으로 누워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육신의 질병이 예수 그리스도가 고치신 질병의 본질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게 육신의 질병을 고치러 오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중풍병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의 한 단면이다. 이렇게 보는 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는 올바른 시각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육신의 질병도 고치시지만 본질은 보지 않고 예수님께 기도하면 질병을 고쳐주신다는 것만 강조하는 건 바른 시각이 아니다.

 

이 블로그와 몇 권의 책에서 늘 성경 속 중풍은 단지 육신의 병이 아니라 정신이 육신을 지배하는 중풍의 특성으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정신이 육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중풍병자를 고치신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지 못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걸 설명하시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성경의 모든 질병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상태를 대변한다. 이를 예수님께서 고치시므로 결국 우리 육신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 수렴하도록 하는 게 예수님과 성령의 치유다.

 

많은 사람이 왜 지금은 사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데, 이걸 알면 예수님의 치유, 사도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낫게 했는지가 보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고 체험하게 된다. 이 체험이 없다는 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곧 우리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시는 사도행전의 기적을 체험하지 않고, '왜 지금은 그런 기적이 없느냐?'라는 질문을 주고받는다는 건 명백히 구원이 없는 증거다.

 

사도행전의 기적이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고 질문하는 사람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은 구원이 없는 사람이다.

 

정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는 건 육신이 아니다. 육신은 비유자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낫게 하시는 건 사람의 정체성이다. 죄가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는 의미의 단어인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결국 본질은 구원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픈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사는 육신이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은 상태는 정신이 육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중풍과 같다. 육신은 병이지만, 영혼으로 보면 사망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잊으면 안 된다.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다. 세상의 법과 기준으로 볼 때 전혀 경쟁력이 없고, 수용할 수 없는 죄인인 예수님이 인생의 정체성을 낫게 하시는 분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념 속 예수님이 아니다. 그런 예수는 육신의 병을 낫게 하는 게 목적인 무당의 한 부류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했다. 자리, 곧 정체성이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그 정체성의 자리를 물으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리를 바로 정리하는 것, 곧 인생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바로 잡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고, 우리의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는 게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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