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가라 하는 여제자 다비다는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인데, 그런 그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그를 씻겨 다락에 누이고 베드로가 가까이 있다는 말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불렀고 도착한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이런 정황으로 볼 다비다는 신실한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역의 모든 과부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베드로가 왔을 때 그가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이며 그를 기념할 정도로 선행과 구제가 일상인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성경을 삶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병들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건 어쩌면 사람이 체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이 단지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일어나진 않는다. 하나님께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믿는 건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다. 주목해야 하는 건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나와 상관이 없으면 하나님께 어떤 능력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성경이 어떤 책이냐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이나 북한의 법령집(그런 게 있다면)이나 나와 상관없다는 건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그 뜻의 기본 주제를 알 필요가 있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는 주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살리겠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면 그게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다.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이 곧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도르가와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는 모두 성경의 이 주제를 설명하는 사건이다. 성경의 이 기적들을 그렇게 믿지 않으면, "이 시대는 왜 시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며 질문하고 학문적인 연구를 하는 꼴값을 떨게 된다. 그런 의문과 학습은 자기에게 구원이 없다는 걸 떠벌리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나의 구원이 다비다나 나사로와 같은 경험이란 걸 생각하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것
성경 속에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몇몇 일들은 형식적으로 보면 부활이지만 본질은 거듭남과 구원을 설명한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 다시 죽었고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영원한 예수님의 부활과 다르다. 그래서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부활을 설명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우리 모든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믿는다면 자신 역시 도르가와 같이 죽었다고 살아난 사람이라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은 왜 초대교회 같은 기적이 없느냐는 소리를 하고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도르가라 하는 여제자 다비다는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인데, 그런 그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그를 씻겨 다락에 누이고 베드로가 가까이 있다는 말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불렀고 도착한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이런 정황으로 볼 다비다는 신실한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역의 모든 과부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베드로가 왔을 때 그가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이며 그를 기념할 정도로 선행과 구제가 일상인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성경을 삶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병들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건 어쩌면 사람이 체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이 단지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일어나진 않는다. 하나님께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믿는 건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다. 주목해야 하는 건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나와 상관이 없으면 하나님께 어떤 능력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성경이 어떤 책이냐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이나 북한의 법령집(그런 게 있다면)이나 나와 상관없다는 건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그 뜻의 기본 주제를 알 필요가 있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는 주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살리겠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면 그게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다.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이 곧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도르가와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는 모두 성경의 이 주제를 설명하는 사건이다. 성경의 이 기적들을 그렇게 믿지 않으면, "이 시대는 왜 시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며 질문하고 학문적인 연구를 하는 꼴값을 떨게 된다. 그런 의문과 학습은 자기에게 구원이 없다는 걸 떠벌리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나의 구원이 다비다나 나사로와 같은 경험이란 걸 생각하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것
성경 속에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몇몇 일들은 형식적으로 보면 부활이지만 본질은 거듭남과 구원을 설명한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 다시 죽었고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영원한 예수님의 부활과 다르다. 그래서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부활을 설명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우리 모든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믿는다면 자신 역시 도르가와 같이 죽었다고 살아난 사람이라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은 왜 초대교회 같은 기적이 없느냐는 소리를 하고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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