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넬료라는 이방인 백부장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하며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임하셔서 베드로가 있는 곳을 알려주시며 청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꿈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을 알리셨다. 이는 꿈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꿈속에서 율법으로 먹지 못하는 것을 보이시고 '잡아 먹으라' 하셨는데 베드로가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깨니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와서 베드로를 인도했다. (행 10:9-16) 율법으로 먹지 못하는 음식이 바로 이방인인 고넬료였다.
이 고넬료의 일은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이방인을 넘어 온 세상으로 전해진다는 걸 보여준다. 하나님은 자신이 외모가 아니라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는 걸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복음을 누림에 있어 외모로 인한 차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적지 않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 '저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라며 생각한다. 분명 생각하는 사람의 어떠함이 있을 것이다. 강직한 무신론자거나, 아주 흉악한 범죄자거나,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남의 형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으므로 우리는 거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다 알아서 하신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앞서 열거한 완곡한 사람들, 범죄자나 무신론자와 같은 사람들을 우리가 인식하는 기준은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외모다. 사람의 행동과 말 그리고 사고하는 방식이다. 그걸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복음을 전하는 대상은 제한적으로 된다. 이런 현상은 비단 복음만이 아니라 사람 관계의 법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런 걸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본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창조한 목적으로 가늠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핸드폰 공장에서 핸드폰을 만들 땐 자기 설계 목적으로 평가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의 목적이다. 그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다.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대로 살아가는 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이 기준으로 판단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그것 아닌 사람의 어떠함,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형식이자 도구인 사람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을 보는 기준은 당연히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께서는 <외모>라는 걸 중요하게 언급하시는 건 외모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의 어떠함, 신분이나 행동을 보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가진 그런 기준의 대상들을 <외모>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흔히 신분이나 명예나 돈 그리고 행동 양식 등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요소들,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외모다.
베드로는 율법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가 율법주의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직 복음이 이방에게 전파되는 걸 보지 못하고 있었던 베드로에겐 복음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걸 일반화된 용어로 표현하면 혈통이 된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혈통, 그것이 복음의 대상이 되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기에 베드로에게 그 생각을 알려 주셨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머무르면서 복음을 전했더니 결국 성령이 임하시는 걸 보게 된다. 하나님의 경륜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사실 이 외모는 복음 전반에 있어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외모를 보고 판단한다는 건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외모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가치관이 대단히 생소한 것 같지만, 사실 기독교 안에는 만연한 가치관이다. 쉽게 설명하면, 사람의 형편이 나아지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판단하고, 불행한 일을 겪거나 경제나 건강 상황이 악화라도 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거나 잘못을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은 신앙 전반에 아주 깊고 다양하게 침식되어 있다. 목사가 아니면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것도 목사 자격이라는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며, 행여 누가 40일 금식이라도 했다고 하거나 방언을 받은 사람을 신앙 좋은 사람처럼 대하는 것도 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그가 가진 가치관으로 분간하므로 복음을 전하는 대상 역시 외모로 판단하게 된다. 범죄자나 고집 센 사람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편향적인 생각이 그 세계의 생각이다.
고넬료의 일은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이 만민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유대인에게 한정했다면, 오늘 우리가 복음을 이렇게 나눈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 되었을 건 자명하다. 나타난 일로만 봐도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더 나아가 단순하게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진 게 아니라 성령이 강림하셨다.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건 곧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곧 이방인의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일이 시작되었다. 성령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믿음이 그 사람의 육신 곧 삶이 되도록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다. 그 성령이 임하셨다는 건 그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목적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걸 알리는 사건이 바로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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