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장에는 당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장과 빌립 집사의 만남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꼽으라면 당연히 내시장의 말,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접할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지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방인 에디오피아의 국가 재산을 관리하는 내시장이 어떤 이유로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는 건 분명하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간절함과는 달리 성경을 바로 알지는 못한 상태였다. 앞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례는 받았으나 성령을 받지 못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려면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이건 아주 중요한 법칙이다. 우선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하시기 위해 아들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보내셨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었다. 여기서 바로 알았다는 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성품이다. 낮아지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날 수 있다는 법칙도 녹아 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 법은 지금도 똑같이 낮아지는 본성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는 사람을 통해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낮아진다는 건 사장 밑에 사원이 있는 구조와는 다르다. 의에 관해 더 옳은 의를 가졌지만 옳지 않은 의를 가진 이의 주장에 이끌려 자기 수고를 내어 주는 낮아짐이다. 수학에 대해서 이미 깨우친 선생이 학생의 어리석은 질문에 수고스럽게 답을 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죄인이 되신 것이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신 낮아짐이다. 이런 낮아진 사람과의 만남이 복음을 깨닫게 한다.
앞서 수학이 그랬듯이 복음도 마찬가지다. 먼저 깨달은 사람은 끊임없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복음을 알 수 없다. 누가 보자고 하면 가서 만나는 수고를 해야 하고,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복음을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책을 쓰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바울 사도의 많은 편지가 오늘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것도 같은 수고의 산물이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런 블로그나 글도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특별한 이득도 없는데, 알 수 없는 책임감에 이끌려 글을 쓰고, 때로 연락이 오면 만나러 먼 길을 가기도 하는 이런 수고로 인해 복음이 전해진다.
어쨌든 복음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이 수고한 사람을 위한 산물과 사람이 만나는 만남에서 전해진다. 보리수 나무 아래서 스스로 깨달아지는 진리가 아니다. 그럴 값이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필요 없이 하늘에서 사람을 변화시키면 그만인 일이다.
그런데도 친히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몸으로 생활하는 불편을 입고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신 건, 복음은 그렇게만 전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육신의 목적을 깨닫는 게 복음인데, 육신의 초월한 기적으로 복음 깨닫는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육신의 만남, 육신의 수고가 수반되지 않은 체 전해지는 복음은 온전하지 않다. 에디오피아 내시장은 그걸 보여준다.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의 목적을 알게 되는 게 복음인데, 육신을 거치지 않고, 육신의 수고 없이 전해지는 건 온전하지 않다.
다시 한번 복음은 사람을 통해 전해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 둔다. 이건 성경 전반에 걸쳐 아주 중요한 정의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데 있어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게 육신의 삶을 바라보는 안목이다. 육신을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보느냐 아니냐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끝일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지사다. 거듭남이 이것이다.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에디오피아 내시장은 스스로 알 수 없다는 걸 고백하고 빌립 집사를 자기 마차에 타게 했다. 자기 세계로 영접한 것이다.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이사야서가 아니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책이라는 걸 들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믿고 영접했다. 가는 길에 물이 보이자,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세례를 청하였다. 지금까지 자기의 믿음, 사람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든 성경을 지키고 이해하려 했던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성경의 말씀대로 자기 죄를 시인한 것이다. 세례는 말씀을 지켜내고 이해하려는 노력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 스스로 고백하는 예식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기보다 기적을 만나기를 원하고, 기적적인 일을 간증하면서 그게 하나님의 능력이고 구원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복음은 사람과의 만남 없이 전해지지 않는다. 누군가 당신을 위해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한다면 에디오피아 내시장이 자기 마차에 빌립 집사를 청한 것과 같이 자기 안으로 청하여,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들어야 한다. 그런 들음이 없이 믿음은 생기지 않는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27 – 사도 바울 같은 회심이 내게 있을까? (0) | 2024.08.13 |
---|---|
(사도행전) 26 – 사울의 회개 (0) | 2024.08.09 |
(사도행전) 24 – 세례 그리고 성령강림 (0) | 2024.07.16 |
(사도행전) 23 – 선물에 대가를 치르려 한 마술사 시몬 (0) | 2024.07.08 |
(사도행전) 22 -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복음 (0) | 2024.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