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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8 – 예수를 빙자한 사람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12. 05:41 Writer : 김홍덕

(19:8-20)

성령 세례를 전하고 또 얼마의 사람에게 세례를 베푼 후 바울 사도는 에베소의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다. 하지만 모두가 순종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 훼방했고, 바울 사도는 이를 피하여 두란노 서원에서 강연을 이어갔다.

 

이런 바울 사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많은 능력을 행하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아픈 사람에게 바울의 손수건만 얹어도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날 정도였다. 그러자 어떤 마술하는 이들이 악귀 들린 자를 대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명한다'라고 할 정도였다. 복음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탐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유대의 한 제사장인 스게와라는 사람의 아들 일곱도 예수를 빙자한 마술하는 이들처럼 행했다가 오히려 악귀들에게 요즘 말로 역관광 당하는 일도 생겼다. 이 일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빙자하는 일의 두려움을 알게 했고, 오히려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마술하는 이들이 은 오만의 값어치가 있는 자기들의 마술책을 스스로 불살랐다. 예수를 빙자하기도 했던 이들이 온전한 믿음을 얻게 된 것이다.

 

악귀가 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행 19:16-16)

 

우리는 여기서 마술사나 제사장의 아들이 왜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했는지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카네기가 말하기를 '죽은 개를 발로 차는 사람은 없다'라고 했는데, 빙자할 가치가 없다면 굳이 쪽팔리게 남의 것을 흉내 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이유는 복음 자체가 아니라 복음의 능력, 즉 열매를 탐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건 복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복음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탐했기 때문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걸 믿는다는 건 곧 구원이요, 믿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그리스도로 살게 된다는 걸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이다. 낮은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고 예수 이름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낮아지는 법을 전했는데 오히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고 앙망하는 능력, 세상의 기준으로 아주 높은 가치를 가진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자 이 놀라운 능력에 대한 욕심과 동경이 생겨 이를 도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의 본질은 모르겠고 그저 열매이자 나타나는 능력만 탐한 것이다. 이는 내용 없이 형식을 탐하는 것으로 사랑 없이 간음하는 창녀의 모습이며, 속은 썩었는데 겉만 화려한 회칠한 무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도적질이 통할 리가 없다. 스게와라는 제사장의 아들들이 오히려 악귀에게 되치기 당한 건 당연하다. 사람들은 복음의 본질은 외면한 채 능력과 열매만 취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허술한 분이 아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는 일은 의외로 만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과 다르게 예수를 믿는다면 그게 바로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낮아져서 서로를 섬기는 마음을 표현하시고자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이 뜻을 바로 알도록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게 하셨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그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세상에서 이기고 높은 자가 되려하니 이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것이다.

 

오히려 예수를 믿어 높은 자리에 올라 그 권세와 재력으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발을 씻기는 섬김이 아니라 적선하듯이 복음을 전할 궁리만 하고 있다. 결국 목적은 섬김이 아니라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의 지위와 권력과 재력을 가지는 게 목적이다. 이 목적이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을 주신 목적과 다르니 예수 이름을 빙지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능력은 또 자기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이름을 믿으니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건 소위 말하는 정신 승리일 뿐 그렇게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주여, 주여' 부른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하셨고, 심지어 악귀들도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너는 누구냐?'며 역관광을 한다.

 

낮고 천한 자리인 십자가에서 나오는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복음은 낮고 천한 십자가의 자리에서 능력이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비밀을 알고 보니 그건 낮아지는 것임을 아는 게 복음이며, 복음을 이렇게 바로 알 때 능력이 나온다. 에베소의 마술사들이 비싼 마술책을 불사를 정도로 놀란 복음의 실체가 이것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믿었더니, 세상이 가지지 못한 능력이 나오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복음이고 예수 이름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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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 19:7)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여기에 예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 외에 구원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말씀에 의해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사람들,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지는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는데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오해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신념을 가지고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안 해도 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 역시 십자가를 지는 일은 선택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예외적 상황이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지 않아도 되는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그리스도인데, 그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와 목적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표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낮아지고 네가 옳다고 시인하므로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겸손한 마음이다. 이 마음이 육신이 된 존재가 그리스도기 때문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를 심판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어 있다.

 

십자가를 지신 이 유일한 이유가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질 수 없다. 부모가 더 큰 힘과 능력에도 아이에게 굴복하는 본성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절대적 권능에도 어리석은 주장 앞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는 본능을 가진 생명이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의 본능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었다. 이 놀라운 비밀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는데 그리스도의 본성과 정체성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해서 표현하고자 한 하나님의 성품

 

예수님께서 육신을 내어주신 건 우리도 육신을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으니 잔말 말고 너도 하라는 식의 말씀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단지 그리스도로 사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육신을 내어준다는 게 차비를 대신 내듯 대신 죽어주는 걸 한정하는 게 아니다.

 

사람의 관계에서 네가 옳으면 나는 육신으로 수고하게 된다. 군대를 생각하면 쉽다. 부부간에 다툼이 없으려면 누군가가 먼저 육신으로 수고하면 된다. 아내를 위해 남편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면 아내가 더 옳은 위치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남편이 그저 음식물 쓰레기를 보면 당연히 치우면 된다고 생각하고서 치우면 적어도 이런 일로 다투지는 않는다. 그리고 서로가 이런 마음으로 살면 싸우는 게 더 힘든 일이 된다. 이런 놀라운 낮아짐이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구원이란 이런 삶이 본성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로 거듭남이다.

 

상대를 옳게 여기고 나를 낮추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게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 세례이자 거듭남이다.

 

성령 강림, 성령 세례는 사람이 이런 삶을 사는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노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본성이 그런 사람이 되게 한다. 이게 십자가를 지는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을 성령 세례를 받은 신앙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사도행전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 세례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게 하는 세례 곧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만 세상에서 이기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과 믿음이나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 그리고 날마다 회개하는 신앙은 이 세계를 모른다. 다시 분명히 말하거니와 모른다. 그래서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하지 못한다.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성령 세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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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 19:7)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란 말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수학의 무정의 용어처럼 일상이 된 말이다. 그냥 상용구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라는 표현은 의미를 매우 깊이 새겨야 한다. 대충 넘어가면 안 된다. 예수님은 분명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지만 신앙하는 사람이 그 예수를 믿는지는 다른 이야기다. 세상의 가난을 해결하는 메시아가 예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분명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아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시험에 합격하고, 부유하고 평안하게 되며,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기를 기도하는 신앙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실패했다는 의미다. 그런 예수님께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구한다는 건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이지 신앙하는 게 아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고 증거다. 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는 걸 구하는 건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누가 졌던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는 귀신이나 사탄을 쫓아내는 퇴마의 상징도, 세상의 성공을 방해하는 걸림돌을 해결하는 능력의 부적도 아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패배자의 상징이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도무지 쓸모가 없어서 죽여 버려야 하는 존재를 달아 처형하는 형틀이 십자가다.

 

자신은 늘 교회에서나 집에서 또 생각나는 순간마다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바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는 건 어느 모로 보나 모순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라는 말이 그런 모순으로 회칠 된 채 기독교 신앙의 교리와 상용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이 어두움에 있다고 하는지 아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형태다. 자신이 이 신앙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면 구원은 없다. 심지어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착각마저 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의미도 모른 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학력이 낮은 사람이 내는 전문적인 의견을 신뢰하지 않는다. 한 세계의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게 확인되면 크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생과 세상에서 실패해서 남이 내 목숨을 빼앗는 처지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그렇게 쉽게 인생을 넘어 영혼의 구주로 믿는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를 정말로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런 사람이 교회 문턱을 넘어섰다는 그 하나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걸 신앙이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렇게 넘어선 교회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고 평안하기를 구하고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모순인데 그걸 신앙이라 말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고 살고 있다. 이 심각한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이건 성경이나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적 논리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모순적인 신앙은 여러 문제를 자아낸다. 앞서 말한 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을 구하는 근원적인 모순 외에도 구원받았다면서 항상 회개하고, 예수님을 형제라 또 하나님을 아버지라 말하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실토한다. 그저 노력할 뿐이라고 죄책감에 절은 실토를 신앙의 겸손으로 포장까지 하고 있다. 만 가지를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모든 걸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하신 말씀만 적용해도 오늘 또 회개하는 자신은 온전한 구원의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지만 그걸 알 정도면 오히려 자기 죄를 시인한 지경에 이른 사람이다.

 

성령 세례의 결정적인 증거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의 핵심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정체성은 이렇게 중요하지만, 그냥 뇌까리고만 있다. 오늘도 더 이상 낮고 천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모든 경건을 가장한 신앙들이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다. 자신이 이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모독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그것에서 구원이 시작된다. 그 구원이 시작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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