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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 – 필요에 따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5. 28. 06:33 Writer : 김홍덕

(4:32-37)

우리가 널리 아는 대로 초대교회는 소유를 공유하다시피 했다. 핵심은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두니 사도들이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라는 것 안에 들어 있는데 바로 <필요>. 이 필요는 다양하고 후에 나오는 일곱 집사를 선출하게 된 이유에서 보듯이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도 사도들이 판단한 필요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필요는 교회가 간구하는 것, 또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 주제에서 알 수 있는 복음 전파다. 이것이 교회가 생각하는 가장 우선적인 <필요>.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교회에 가장 필요한 건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그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지출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지출이다. 교회가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을 위한 지출이 아니라면 그건 낭비다. 즉 교회의 필요는 곧 교회의 정체성이고, 교회가 어디에 지출하는지는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합당한 교회인지를 증명한다.

 

교회의 필요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신학을 전공한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기반으로 교회의 책무를 교육, 친교, 기도, 봉사 등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같은 교회의 책무나 특성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므로 나타나는 결과지 추구해야 하는 목표나 표상이 아니다. 추구한다는 건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고, 나타난다는 건 감추려고 해도 그저 나타나는 상황을 말하므로 방향성이 반대인 전혀 다른 모습이다.

 

교회의 지출은 교회의 정체성

 

교회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지출이 결정된다. 교회의 책무라는 걸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라면 그 노력을 위해 지출할 것이고,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교회라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지출할 것이다. 여기에는 복병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인데, 이는 <하나님의 예정하신>이라는 말 속에 답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하신 뜻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 이 하나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많은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자기가 생각하는 문제에 하나님은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는 사람의 문제는 단 하나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목적 안에 있느냐다. 그 외에 사람이 정의한 문제는 모두 자기가 가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이루지 못한 문제일 뿐이다. 사람이 모인 교회가 정의하는 문제 역시 그렇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과 연관된 하나님의 뜻은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교회에 바치고, 사도들은 그것을 필요에 따라 사용했다는 건 단지 가난을 구제하는 일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처럼 교회의 책무를 다한답시고 지출하는 것 역시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별개다. 심지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며 지출한다. 이런 모습이 그저 나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선행되어야 할 게 있고, 그 선행되어야 할 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사랑이 없으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소용없듯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초대교회를 동경하고 앙망한다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먼저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모습에 동경을 가지고 돌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먼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구하는 게 교회의 근본임을 상고해야 한다. 성경을 제대로 보고 있다면 모든 것에 앞서 항상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그 나라와 그 의가 먼저임을 알 수 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면 그렇게 바라고 앙망하는 성경대로 사는 삶, 초대교회의 모습은 저절로 따라온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라는 씨앗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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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 – 교회의 기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5. 26. 10:09 Writer : 김홍덕

(4:1-31)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치유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서 심문받게 되었는데 오히려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더 믿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나사렛 예수가 앉은뱅이를 치유했다는 설교는 그들을 놀라게 했다.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듯 추궁한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과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나름 종교 지도자들로 오늘날과 대조한다면 신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오히려 그들이 생각하기에 보통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에 놀랐다는 건 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할 부분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잡히고 풀려나는 동안 교회는 기도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자, 교회는 더 아름다워졌다. 교회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이번에는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교회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나?

교회가 기도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고쳤다는 이유만으로 잡힌 게 아니다. 핵심은 앞서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어떤 권세>로 능력을 행하느냐인데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고 했고, 이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그들의 신앙관, 그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요구하는 신앙관에 따르면 나사렛은 선한 게 나올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칭하려면 모든 율법을 지켜내고, 가난과 독립 같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것이 또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다.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인간이 구원을 얻을 유일한 이름이라고 전했고, 이를 인해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 명이 더 믿게 되었다. 이건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물론이고 유대교와 유대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 오히려 백성들의 신앙이 되고 있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진정한 교회는 이런 흐름을 바로 인식했다. 더욱 기도에 힘썼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붙잡혀 있으니 풀려나기를 기도한 것 같지만 본질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교회가 기도한 것은 예정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8)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따라오는 성령 충만

교회는 단지 베드로와 요한의 육신이 구속된 상태에서 풀려나기를 구한 게 아니다. 이 성경을 통해 우리는 교회가 육신의 문제 해결을 하나님께 간구한 게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래야 한다. 세상과 사회의 정치문제나 성도들 삶의 문제는 교회의 본질적 관심 대상이 아니다. 그런 문제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다 해결되는 종속된 문제다.

 

여기서 핵심적인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은 다른 게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은 육신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생각한다. 사람의 이런 생각은 확정적이고 고착되어 있다. 그래서 취직할 것인지, 대학원 갈 것인지,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저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걸 알고자 한다. 모두 육신의 문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런 걸 기도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건 무당 짓이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은 단지 하나다.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그 하나다. 그 목적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며, 표현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십자가를 지는 낮아짐이다. 하나님께 그런 성품이 있다는 걸 나타내시려는 게 사람을 향한 단 하나의 뜻이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를 바로 읽었다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들 성경을 자기중심적으로 읽어서 이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어둡다고 하신다.

 

앉은뱅이를 고치는 능력의 근원인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낮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이자 그리스도의 본성 이것이 사람인 나에게 이루어져야 하는 단 하나의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바로 이걸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게 바로 나의 정체성이며, 내 인생의 의미이자 목적이란 걸 믿는 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교회는 이걸 구하는 공동체다.

 

놀라운 건 교회가 이것을 구했더니 성령이 충만해졌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성령의 충만을 구한다. 그러나 이 성경에서 보듯 성령은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그 자체다. 성령은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사람이 나사렛 예수를 믿게 하시는 분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바로 성령 충만

 

따라서 교회와 사람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사람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이름을 구할 때 응답하시고, 그렇게 사람이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 그것이 성령의 충만이다. 즉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의 삶이고, 결과지 성령 충만 그 자체를 목적으로 구하는 대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한 그 뜻을 주기도문의 의도대로 구하면 성령은 그저 충만해진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이 본성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 이상으로 충만할 수는 없다.

 

교회는 많은 것들을 구한다. 심지어 사회 참여를 사명으로 여기고 정당을 만들기까지 한다. 또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무료로 급식한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하는 교회가 더 발전하고 동참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한다. 사람들이 동경하는 일들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사례가 많아지기를 바라고, 얼마 간의 성공을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전한다.

 

오늘날 교회가 기도하고 힘쓰는 모든 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사람을 향해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앞에 열거한 오늘날 교회의 기도와 간절함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에겐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이 모여 계획하고, 예산을 편성하고, 당번을 정해가며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된다는 걸 이어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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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26)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건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향유 옥합 사건이 예수님이 어떤 그리스도인지를 선언하는 사건이었듯, 사도행전에 나오는 놀라운 기적들이 어떤 능력으로 행해지는지를 정의하는 사건이 바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일이다.

 

이 일로 믿는 사람의 수가 남자만 오천 명이 늘어났지만, 반대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율법 신앙을 가진 이들에겐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어 핍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이런 핍박은 교회가 일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촉매가 되고, 더 나아가 교회의 성도들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앉은뱅이가 성전으로 들어가 기뻐하게 되는 일은 영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큰 전환의 사건이다.

 

부활의 도를 싫어하는 사람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어떤 사람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성공한 간증을 하면,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며 그 일을 공유하고 자랑한다. 같은 이치라면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고친 일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또 제사장과 장로는 이 일을 기뻐하고,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을 심히 경계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핍박했다. 그들의 이런 태세는 그들의 하나님과 앉은뱅이를 고친 하나님이 다르다는 걸 입증한다.

 

제사장과 장로들이 믿는 하나님과 앉은뱅이를 치유한 하나님은 다르다.

 

바리새인들(바리새인, 제사장, 장로 등)은 부활의 도를 싫어했다. 이는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느냐는 과학적 이유 때문에 싫어한 게 아니다. 부활의 도는 곧 십자가의 도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부활의 도와 십자가의 도를 싫어한다는 건 나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안다는 의미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데 싫어하긴 쉽지 않다.

 

이는 대제사장의 심문에 답하는 베드로의 답변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쳤을 때 유대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게 아니냐고 했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걸 뒤엎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을 두고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물은 것처럼 앉은뱅이를 고친 일을 두고도 똑같이 물었다. "누구의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는가?"라고.

 

유대인들의 이런 반응은 믿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앉은뱅이를 고친 능력이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베드로의 설교와는 달리 유대인들은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고 가난을 구제할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다. 이건 동이 서에서 먼 것만큼 다른 차이다. 이 두 하나님은 절대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더더욱 그렇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복음 전파의 의미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성공을 싫어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는 걸 용인할 수 없었다. 자기들과 다른 신앙을 가진다는 걸 질투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 되기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런 발상의 싹부터 잘라야 하는 게 그들의 신앙이고 믿음이다. 이게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만의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늘도 사람들은 십자가를 진 죄인 예수를 믿는 믿음을 용인하지 않는다.

 

복음이 전해진다는 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가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와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의 생각을 극복하는 것

 

제사장과 바리새인 장로 등이 모여서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겁박한 것은 사도행전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암시한다. 더 나아가 복음이 전해지는 법을 알려준다.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은 결국 가난을 해결하는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극복하고 이기는 과정이다. 복음이 싸우고자 하지는 않지만, 가난과 질병을 초인적 능력으로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사람의 믿음은 끊임없이 나사렛 예수를 핍박한다. 복음 전도는 결국 이 투쟁이다.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이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각 사람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지를 보여준다.

 

제사장과 바리새인이 베드로와 요한을 겁박하는 일은 오늘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고, 온전한 복음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어떤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가난을 해결하고 육신의 병을 기적적으로 고치는 예수를 앙망했다. 사람은 이 예수, 성경이 거짓 그리스도라 말하는 이 예수를 쉽게 벗어나질 못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바라는 마음이 부자로 만드는 축복을 주는 거짓 예수를 믿게 한다. 여기서 벗어나는 게 곧 구원이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예수,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친 능력의 예수는 나사렛 예수라는 걸 한 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이걸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게 거듭남이다. 그냥 사는데 모든 순간, 선택과 결정을 본능적으로 낮아지는 걸 택하는 사람이 되는 게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이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가진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늘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반추가 바로 경건이고 묵상이다.

 

건축자가 볼 때 유용하지 않아 보여서 버리는 돌처럼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는 예수님은 믿을 가치가 없어 보인다. 신앙인들은 가난이나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을 경계한다. 예를 들어 헌금 떼먹으면 경제적으로 망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렇고, 주일날 일하면 벌 받는다는 생각이 그렇다. 그런데 이 보편화된 믿음이 바로 나사렛 예수를 배척하는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부인한다고 그 믿음에서 떠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말씀하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앉은뱅이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는 능력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나온다. 가난을 이기게 하는 게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걸 믿는 믿음이 오히려 세상을 이기게 한다. 그 이김이 필요하다면 육신과 세상 일에 기적을 더한다. 어차피 세상과 사람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여기에 필요하다면 바다도 가르시는 게 하나님이다. 바다를 가르는 걸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는 건 거꾸로 된 믿음, 아니 거짓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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