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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5)

사도행전 919절 이하에서는 회심한 사울이 즉시로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이심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사울은 갈라디아서 1(17, 18)에서 자신이 아라비아에 3년간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기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다메석의 회심은 AD 34년 경이고, 사도행전 919절에서 사울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시점은 AD 37년 경이라 말한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그 사이에 아라비아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울이 다메섹의 회심과 복음 전파 사이에는 3년의 묵상이 있었다는 걸 이야기한다. (사도행전의 순서로 보면 13장이 되어서야 이름이 바울로 바뀌지만 우리의 익숙함을 위해 그냥 사도 바울이라고 한다.)

 

오늘 여기서 사도 바울의 회심과 아라비아에서의 3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온전한 복음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쉽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오면 짐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거저 주는 은혜라는 말의 영향 때문인지 교회에 다니는 복음과 구원을 아주 쉽게 여기지만, 사실 복음의 과정은,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걸 "나는 예수 믿는다"라는 말 한마디로 모두 쉽게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고, 믿는 건 큰 오류다. 그리고 이 큰 오류가 현재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면 복음이 어려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분명 복음은 쉽고 가벼운 것이다. 하지만 복음에 이르는 건 어렵다. 쉬운 복음에 이르려면 사람이 자기 마음을 돌이켜야 하는데, 이게 정말 어렵다. 그래서 복음은 어렵다. 바울 사도의 여정은 사람이 자기 마음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건 오늘 우리에게 "나에게도 그런 과정이 있었는가?" 반문하게 한다.

 

바울은 복음에 이르기 전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자기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사람을 잡아 가두고 때리며 핍박하면서까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온전한 믿음이라는 걸 믿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니 자기의 모든 가치관은 어두움 그 자체라는 게 드러났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체험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서신 전반에는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건 자기 안에 그 흔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복음을 쉽게 생각한다. 성경을 행위로 지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는다. 어려운 건 타협한다. 신학이 이를 돕는다. 십일조를 하려면 세전 금액으로 해야 한다. 어느날 대접받은 식사의 10%도 다 적립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십일조다. 세후 금액으로 십일조를 낸다는 건 하나님보다 이 땅의 나라에 더 굴복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해 보면 이 말씀이 행위로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이미 신학과 기독교 신앙은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는 탈출구를 마련해 두었다. 하나님을 믿는 게 너무 쉬워져 버렸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빈도 부사는 자기들 맘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게 신앙이라는 말이 그 쓰레기통의 뚜껑이 되었다. 노력이란 이르지 못한 이들의 행위인데도 자기들이 노력하는 자들이란 걸 부인하면서 신앙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양두구육인 셈이다.

 

신앙의 세계가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예수 믿는 걸 아주 쉬운 일로 여긴다. 세례 문답 시간에 대답 몇 번이면 구원받은 줄로 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구원은 없다. 자기 안에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과 체험과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은 건 오직 예수 믿음으로 얻게 될 복락뿐이다. 숨기고 있지만 육신의 노력으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의 복락은 당연히 육신의 복락이다. 이런 신앙에 구원은 없다.

 

바울 사도는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에 정말로 죽을 힘을 다했다. 그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해도 앞장 섰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니 자기의 모든 안목은 어두운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 그의 서신 전반에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그렇게 강조한 이유다. 그런 그가 아라비아에서 보낸 3년은 보지 않아도 자기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그에게 이제 성경은 온전한 복음이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능통했다. 단지 그는 그걸 자기 육신의 노력으로 지키려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그가 아는 성경은 모두 복음이 되었다. 자기가 아는 모든 성경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고백이 있는 사람의 삶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복음이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자기 능력껏 성경을 행위로 지켜보려 했던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말씀이 복음의 능력이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정말로 성령이 오시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의 삶 전체가 복음의 능력이 되었다. 바울도 그랬다. 오늘 우리도 그럴 것이다. 신학이 제시한 타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릴 적부터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신앙적 경험과 성경 지식은 복음의 능력이 된다. 이걸 다른 말로 성령의 충만과 능력이라고 한다.

 

다시 한번 예수 믿는 건 쉽지 않다는 걸 분명히 한다. 자기 육신의 모든 걸 다해 성경을 지켜보려고 노력하는 삶을 쉽다고 말할 게 아니라면 분명 그 과정은 어렵다. 이는 출애굽의 광야 생활과 같고 사도 바울이 사울로 살던 시절과 같다. 이 과정이 없으면 쉬운 복음에 이르지 못한다. 구원과 복음 안에서 장성하는 건 그냥 쉽다는 말을 믿는 것 만으로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이걸 분명히 알고 자기 신앙을 돌아봐야 한다. 이게 우리가 사도 바울의 삶을 따라가며 배워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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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6 – 사울의 회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8. 9. 15:39 Writer : 김홍덕

(9:1-25)

집사 빌립의 일들은 사도행전의 전환을 시사한다. 예루살렘과 유대인에게 주로 머물던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즉 전 세계로 전해지는 전환의 분기점에 빌립 집사가 있다. 사마리아와 에디오피아 내시장의 일로 시작된 복음의 전환은 사울(사도 바울)의 회개와 고넬료 집에 초대된 베드로의 일 등을 거치면서 점차 온 세계로 복음이 전해진다. 그 이후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행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는 베드로에서 사도 바울로의 세대교체가 아니라 복음의 중심 무대가 전환됨을 의미한다.

 

이런 전개에 있어 아무래도 가장 핵심적인 사람은 사울 즉 사도 바울이다. 그는 스데반의 순교를 마땅히 여겨 증인이 되었던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찾아 핍박하는 선봉에 서 있던 사람이다. 그는 정치와 경제 문학 등 모든 분야가 신앙과 연계된 당시의 최고 신학자 가말리엘의 제자였을 뿐 아니라, 로마 시민권이라는 당대 최고의 신분과 함께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복음의 도를 믿는 사람을 잡아 오려고 다메섹 여러 회당에 공문을 청하려고 다메섹에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다. 그 장면은 기적적이다. 대낮에 밝은 빛이 비취고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 사울에게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고,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사울은 누구인지를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답하신다.

 

이후에 사울은 눈을 떴으나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므로 다시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나니아가 예수님께 사울은 핍박하는 자라는 것을 말씀드렸으나 주께서는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택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 안수하므로 사울이 보게 된다. 이 아나니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아나니아가 아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눈이 밝아져야 할 텐데 오히려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사울(사도 바울)이 겪은 큰 재앙적 경험이 그것인데 우리는 이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두워진 건 하나님과 예수님과 복음에 관한 안목이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니 사울의 안목이 소경이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반석 같은 사울의 믿음과 안목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 그 자체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사울의 눈이 보지 못하게 된 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울의 믿음이 어두운 것이라는 게 드러난 일

 

사람들은 자기 하나님을 믿는다. 사울도 그랬다. 그런데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두움이었다는 걸 느끼고 실감한다. 이런 상황을 사울이 육신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런 과정은 예수 믿는 과정에서 필수적이다. 한 번도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실질적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면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안다고 믿었다. 사울도 그 사람 중 하나다. 그런 확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그건 어두움이다. 제자들도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자기 확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 그중 상당수가 자기도 한때 잘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의 가장 천한 자리로 가는 게 하나님 아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으니 세상에서 성공하고 영화롭게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다면 그가 만난 어두움은 환상이다. 그런 사람은 어두움을 넘어 암울한 상태다.

 

이런 경우 늘 생각나는 말이 있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이 한 말인데,

 

사람이 곤경에 빠지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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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40)

사도행전 8장에는 당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장과 빌립 집사의 만남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꼽으라면 당연히 내시장의 말,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접할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지를 설명하는 말이다.

 

이방인 에디오피아의 국가 재산을 관리하는 내시장이 어떤 이유로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는 건 분명하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간절함과는 달리 성경을 바로 알지는 못한 상태였다. 앞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례는 받았으나 성령을 받지 못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려면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이건 아주 중요한 법칙이다. 우선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하시기 위해 아들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보내셨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었다. 여기서 바로 알았다는 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성품이다. 낮아지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날 수 있다는 법칙도 녹아 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 법은 지금도 똑같이 낮아지는 본성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는 사람을 통해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낮아진다는 건 사장 밑에 사원이 있는 구조와는 다르다. 의에 관해 더 옳은 의를 가졌지만 옳지 않은 의를 가진 이의 주장에 이끌려 자기 수고를 내어 주는 낮아짐이다. 수학에 대해서 이미 깨우친 선생이 학생의 어리석은 질문에 수고스럽게 답을 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죄인이 되신 것이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신 낮아짐이다. 이런 낮아진 사람과의 만남이 복음을 깨닫게 한다.

 

앞서 수학이 그랬듯이 복음도 마찬가지다. 먼저 깨달은 사람은 끊임없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복음을 알 수 없다. 누가 보자고 하면 가서 만나는 수고를 해야 하고,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복음을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책을 쓰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바울 사도의 많은 편지가 오늘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것도 같은 수고의 산물이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런 블로그나 글도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특별한 이득도 없는데, 알 수 없는 책임감에 이끌려 글을 쓰고, 때로 연락이 오면 만나러 먼 길을 가기도 하는 이런 수고로 인해 복음이 전해진다.

 

어쨌든 복음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이 수고한 사람을 위한 산물과 사람이 만나는 만남에서 전해진다. 보리수 나무 아래서 스스로 깨달아지는 진리가 아니다. 그럴 값이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필요 없이 하늘에서 사람을 변화시키면 그만인 일이다.

 

그런데도 친히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몸으로 생활하는 불편을 입고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신 건, 복음은 그렇게만 전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육신의 목적을 깨닫는 게 복음인데, 육신의 초월한 기적으로 복음 깨닫는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육신의 만남, 육신의 수고가 수반되지 않은 체 전해지는 복음은 온전하지 않다. 에디오피아 내시장은 그걸 보여준다.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의 목적을 알게 되는 게 복음인데, 육신을 거치지 않고, 육신의 수고 없이 전해지는 건 온전하지 않다.

 

다시 한번 복음은 사람을 통해 전해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 둔다. 이건 성경 전반에 걸쳐 아주 중요한 정의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데 있어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게 육신의 삶을 바라보는 안목이다. 육신을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보느냐 아니냐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끝일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지사다. 거듭남이 이것이다.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에디오피아 내시장은 스스로 알 수 없다는 걸 고백하고 빌립 집사를 자기 마차에 타게 했다. 자기 세계로 영접한 것이다.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이사야서가 아니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책이라는 걸 들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믿고 영접했다. 가는 길에 물이 보이자,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세례를 청하였다. 지금까지 자기의 믿음, 사람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든 성경을 지키고 이해하려 했던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성경의 말씀대로 자기 죄를 시인한 것이다. 세례는 말씀을 지켜내고 이해하려는 노력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 스스로 고백하는 예식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기보다 기적을 만나기를 원하고, 기적적인 일을 간증하면서 그게 하나님의 능력이고 구원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복음은 사람과의 만남 없이 전해지지 않는다. 누군가 당신을 위해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한다면 에디오피아 내시장이 자기 마차에 빌립 집사를 청한 것과 같이 자기 안으로 청하여,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들어야 한다. 그런 들음이 없이 믿음은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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