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2

(9:32-35)

베드로가 사방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성도들이 있는 룻다라는 곳에서 중풍으로 누운 지 8년이 된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난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너의 자리를 정돈하라고 하니 즉시 일어났고 이로 인해 그 지역에 사는 사람 모두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이므로 양립성이 있다.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이 같아야 한다. 서로의 생명 정체성이 같아야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유전자가 전혀 다른 동물 혹은 식물끼리의 교배로는 생식이 일어나지 않는 게 대표적이다. 성경에 일어나는 기적들이 참 놀라운데 어느 하나도 예외 없이 이 양립성이 존재한다. 병을 고치는 게 대표적이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병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종속된 치유다.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칠 때 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치신다"라는 말 역시 당연히 그렇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고쳐지는 병을 고쳤다는 뜻이다.

 

물론 애니아는 육신으로도 중풍으로 누워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육신의 질병이 예수 그리스도가 고치신 질병의 본질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게 육신의 질병을 고치러 오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중풍병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의 한 단면이다. 이렇게 보는 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는 올바른 시각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육신의 질병도 고치시지만 본질은 보지 않고 예수님께 기도하면 질병을 고쳐주신다는 것만 강조하는 건 바른 시각이 아니다.

 

이 블로그와 몇 권의 책에서 늘 성경 속 중풍은 단지 육신의 병이 아니라 정신이 육신을 지배하는 중풍의 특성으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정신이 육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중풍병자를 고치신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지 못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걸 설명하시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성경의 모든 질병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상태를 대변한다. 이를 예수님께서 고치시므로 결국 우리 육신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 수렴하도록 하는 게 예수님과 성령의 치유다.

 

많은 사람이 왜 지금은 사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데, 이걸 알면 예수님의 치유, 사도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낫게 했는지가 보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고 체험하게 된다. 이 체험이 없다는 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곧 우리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시는 사도행전의 기적을 체험하지 않고, '왜 지금은 그런 기적이 없느냐?'라는 질문을 주고받는다는 건 명백히 구원이 없는 증거다.

 

사도행전의 기적이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고 질문하는 사람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은 구원이 없는 사람이다.

 

정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는 건 육신이 아니다. 육신은 비유자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낫게 하시는 건 사람의 정체성이다. 죄가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는 의미의 단어인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결국 본질은 구원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픈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사는 육신이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은 상태는 정신이 육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중풍과 같다. 육신은 병이지만, 영혼으로 보면 사망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잊으면 안 된다.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다. 세상의 법과 기준으로 볼 때 전혀 경쟁력이 없고, 수용할 수 없는 죄인인 예수님이 인생의 정체성을 낫게 하시는 분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념 속 예수님이 아니다. 그런 예수는 육신의 병을 낫게 하는 게 목적인 무당의 한 부류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했다. 자리, 곧 정체성이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그 정체성의 자리를 물으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리를 바로 정리하는 것, 곧 인생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바로 잡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고, 우리의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는 게 바로 이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힘든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라고 말한다.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어려움을 겪고 나면 신앙이 더 성장하게 되고, 그렇게 신앙이 성장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신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생각은 시험을 이겨내고 받는 복 대부분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에 중심을 두고 있다. 더 부자가 되거나, 병이 낫거나, 자녀가 잘되거나, 시험 합격과 승진이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목적인 셈이다. 세상에서 이기고 높이 올라가는 게 의롭다는 생각이 그 뿌리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의로운 일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이겨 높이 올라가는 걸 구하는 자체도 웃기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주시려고 사람을 시험한다고 생각하는 건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답답한 이야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게 오늘날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이 말하는 복을 받을 자격을 검증하기 위해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시험밖에 주시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봉한다. 세상에서 이기고 올라가는 복을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희망으로 이 말씀을 해석한다. 하지만 그 말씀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바라시므로 세상에서 높아지는 데 실패할 정도로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건 사람의 한계와 목적을 아시므로 그 목적 안에서 사람을 경영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목적하는 바가 있어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의 시험은 모두 그 목적에 수렴한다. 냉장고가 라면을 끓여 주길 바라지 않듯이 하나님도 사람을 향한 목적 안에서만 사람을 대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사람의 존재 목적 안에 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도 사람의 정체성과 연관된 사안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경영은 창조 목적 위에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걸 위해 필요하다면 시험을 하신다. 이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는 필요와 이유다. 그런 이유와 필요에서 보면, 사람은 애초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신다는 말씀의 본질이다.

 

주기도문의 시험도 그렇다. 핵심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걸 방해하는 모든 게 시험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 목적을 방해하는 유혹은 모두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이 시험의 실체는 예수님께서 직접 보이셨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금식 후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는데, 이 시험이 곧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당하는 시험, 그 자체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사도행전) 28 – 사도의 자격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8. 14. 09:25 Writer : 김홍덕

(9:26-31)

회심한 사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의심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대제사장에게 끌고 가기 위한 기만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사울은 더욱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증명했고, 다메섹에 있는 많은 유대인이 그에게 설득됐다.

 

이런 사울의 변화는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했고 분노한 유대인들은 사울을 잡아 죽이려 하므로 밤에 광주리를 타고 성에서 도망가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사울은 기존의 제자들과 사귀기를 원했지만, 제자들은 두려워했다. 이때 이를 중재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다. 바나바는 마가로 인해 바울과 다투기 전까지 늘 함께 복음을 전한 사람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사울, 곧 사도 바울이 전한 내용이다. 그건 역시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은 이게 하나의 성문(成文)이 되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물론 그 의미를 알고 당연하게 여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이건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었다. 더욱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며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는데 앞장선 사울이 이걸 전한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은 건 예수님의 신분과 행실 때문이었다.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먹고 마시며, 성전을 뒤집어 놓고 기존의 율법들을 무시하는 말로 사람을 현혹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들에겐 그리스도다운 구석인 정말로 "1"도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그들 눈에 예수님은 악질 신성모독범일 뿐이었다.

 

그런 예수님을 그들이 잡아 가두거나 죽이지 못한 건 백성들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겼기 때문이다.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대하는 백성들의 태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은 이스라엘의 독립이나, 가난과 질병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밝히시니 백성들마저 예수님에 대해 지지를 철회했고, 이에 힘을 얻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게 예수님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었다.

 

그런데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하는 건 용납될 수 없었다. 지금이야 그냥 사이비종교 취급하면 되겠지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즉 신성모독이나 반역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는 죄였다.

 

예수님의 사도가 된다는 건 여러 가지 자격 기준이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가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12 제자에 속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말하곤 한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격이 곧 사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의 자격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전하는 사람이 곧 사도다. 사울(사도 바울)이 사도로 인정받는 건 어떤 다른 자격을 인함이 아니라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전했기 때문이다.

 

사도의 자격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전하는 것

 

오늘날은 목사들이 사도의 자리를 대신하려 한다. 자칭타칭으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자격은 시험과 학력에 있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전하는 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황금 마차를 타는 예수라는 것이다. 강단에 서서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기준으로 죄인인 예수를 전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원하는 성공을 담보하는 예수를 전하고 있다. 그런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사도가 아니다.

 

굳이 당시의 상황을 대입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 그래서 죄인이 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당한 예수를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구원이 어디서부터 어디로 구원을 받는 것인지도 명확해야 하고, 예수의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어떻게 앞서 말한 구원을 얻게 하는지 모든 게 명확해야 한다. 이 모든 게 분명하고 밝을 때 비로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자기도 명확하게 모르는 걸 남에게 인생을 걸고 믿으라고 전하는 건 사기지 전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 안에 십자가를 진 죄인 예수, 사람과 세상의 기준으로는 실패자요 죄인인 예수가 세상의 곤고함에서 성공으로 구원하는 예수가 아니라 내 존재의 정체성을 밝히는 구주라는 걸 믿고 그걸 전한다면, 신학을 하지 않아도, 가운을 입고 강대상에 서지 않아도 사도다.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사도다. 사도 바울이 사도로 인정받은 것 역시 그랬다. 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전하니 그가 사도인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