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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아멘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11. 15. 05:42 Writer : 김홍덕

주기도문은 어색한 예배의 마침을 장식하는 암송 구절이 아니다. 백 번 외워 죄를 사할 수 있다는 몰지각한 용도로 사용하는 기도문이 아니다. 주기도문은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구하는 기도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바로 정립하는 기도다. 그 깨달음이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난 죄에서 나의 자리를 회복하게 하고, 그 회복은 동시에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 이게 주기도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하는 자체가 곧 성취가 되는 기도라는 사실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내 존재의 정체성을 가진 창조주로 믿고, 나를 창조하신 목적을 구하라는 주기도문의 의도를 알 때만 할 수 있는 기도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구하면 주신다고 하심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기도를 마칠 때 붙이는 <아멘>은 진실로 그렇게 된다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간구 내용은 사람이 사람의 존재 목적을 구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내용이다. '아멘'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과 다른 자기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주문이 아니다. 간구하는 대상인 하나님과 사람의 정체성과 관계를 바로 알고 올바르게 인식한 하나님의 뜻에 맞는 내용을 간구할 때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지기에 '아멘'이라 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다. 따라서 당연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기도다. '아멘'이라 마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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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

성경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을 제외하면 모두 엘리야나 엘리사 그리고 예수님과 베드로와 바울처럼 다시 살아나는 데 작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의 부활과 다른 건 그렇게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 다시 죽었고 히스기야 왕처럼 새로 받은 삶이 큰 하나님의 역사를 남기는 삶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인 셈이다.

 

유두고는 말씀이 선포되는 장소의 창문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었다가 바울 사도가 살려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죽기 전에 있는 위치와 자세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 즉 전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걸 듣고 있었는데, 유두고는 자리가 부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창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완전히 속한 게 아니라 바깥과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위치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에 완전히 속하지 않았다.

 

또 하나 그는 졸고 있었다. 바울 사도의 강론이 밤늦게까지 길어진 것도 이유겠지만 적어도 말씀을 아주 경청하고 있었던 게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게 어중간하고 위험한 위치에서 졸면서 말씀을 듣다가 떨어져 죽은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졸면 해를 당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의도는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창문이나 문밖에서 구경하는 듯한 자세가 아니라 유두고는 적어도 그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어중간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건 유익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에 모호하지 않다. 어떤 의미인가 하면, 생명은 생명이거나 아니거나 하지 어중간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질이야 반물질이 있다고 해도 생명에 반생명의 개념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 말씀은 설명한 대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말씀으로 거듭난 생명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지,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식의 어중간한 상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나 존재가 아니다.

 

유두고는 이런 어중간한 신앙 포지셔닝에 대한 권면의 말씀이다. 다만 바울 사도가 그를 살려냈다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도 살리시고 사랑하신다는 걸 함께 말씀하시고 있다. 이는 바울 사도가 유두고를 살려냈을 때 많은 사람이 그로 인해 위로를 얻었다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행 20:12)

 

우리는 이 일에서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먼저 성령의 능력과 기적을 이야기할 때 설명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자 원하시는 존재인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일을 위해서 필요하시다면 죽은 사람도 살리신다는 것이다. 이는 거의 성경의 대원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모두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다음으로는 유두고의 위치와 태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분명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 밭에 가라지가 심긴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세상의 것도 관망하는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씀을 들을 때는 그것에 올인하는 자세로 들어야 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는 존재로서 내 존재의 정체성과 목적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또는 대충 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차지도 덥지도 않은 자세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죽은 유두고를 살리셨고, 사람들은 위로를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 그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유두고와 같이 어중간한 상태에 있다가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일로 큰 위로를 받는다. 유두고의 일은 하나님의 본심과 그 본심으로 구원받는 사람, 그리고 그 구원으로 인하여 위로받는 사람 모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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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41)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서는 가는 곳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과 우상 숭배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에베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은 지역이 아니라고는 해도 예수의 능력이 탐나 이름을 빙자했지만 진정한 능력을 깨닫고 귀한 마술책을 태워버린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지역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자기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크게 분노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라는 여신을 섬겼다. 아데미는 그리스 신화에 속한 신으로 제우스의 딸이자 자연과 생명의 신(로마 신화의 다이애나와 동격)이다. 아데미는 형상을 가진 우상으로 조각되었는데 주로 가슴이 여러 층인 여자의 형상이었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이 신을 섬기기 위해서 많은 것을 은으로 조각했었는지 은장식을 만드는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직원을 데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나름 규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상에 대해 바로 안다면 아데미라는 여신은 우상의 일종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우상은 풍요와 다산을 바라는 사람의 갈망이 만들어낸 존재기 때문이다. 결국 우상이란 사람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육신의 풍요와 평안과 성공을 기대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그 자체다. 따라서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건 굳이 우상 관련 사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삶의 몰락을 의미한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자체가 생계가 몰락하는 것

 

특히 이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불상이나 다른 우상을 섬기고 절하지 않으면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믿는 게 그것인데, 앞서 설명했듯 우상은 육신을 본질로 보고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바라는 마음이 형상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형상에 절하지 않아도 그런 마음으로 어떤 신을 섬긴다면 그 신은 유무형을 떠나 다 우상이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또 집이나 산에서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만 구하고 있다면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를 뿐 실상은 그들의 우상이다.

 

달리 생각할 거 없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 두려워하는지를 보면 된다.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면 사업이 망할 거 같다면 그 하나님은 우상이다. 에베소의 은장이들과 같은 입장이다. 하나님이 떠나면 시험에 떨어질 거 같다면 그 하나님도 우상이다. 건강이 악화되거나 회복되지 않을 거 같다면 그 하나님도 우상이다.

 

섬기지 않으면 육신의 생계가 영향을 받는다면 하나님이라 부른다고 해도 우상이다.

 

삶의 생계로 정의되는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관점은 분명하다. 우리의 필요를 다, 충분히 알고 계신다. 이는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분명하기에 그 목적 달성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당연히 아실 수밖에 없다. 자동차를 사는 사람은 기름을 넣어야 한다는 걸 당연히 여기는 것과 같다. 그걸 담보로 우리에게 믿음이나 섬김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걸 요구한다면 단 1의 예외도 없이 우상이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면 이것이 확실히 구분된다. 그러나 이게 구분이 되지 않거나 '그래도 사람이 먹고 살기는 해야지?'라는 변명을 버릴 수 없다면 그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상이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달리 검증할 거 없다. 이 신앙을 떠나면 경제적으로 힘들고 육신의 건강이 나빠질 것 같은가? 그러면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에베소의 아데미 여신과 관련된 소동이 이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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