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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 있다는 것과 하늘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걸 이야기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거룩한 이름으로 여기는 게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나의 삶이 되는 것임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임도 이야기했다. 이어서 우리는 이 모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듯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말씀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관계는 하늘이 정하고 변하는 대로 땅이 순종하는 관계다. 하늘이 봄이 되면 땅에 꽃이 피고, 하늘에 비가 내리면 사람은 우산을 쓴다. 사람이 우산을 쓰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관계가 아니다. 누가 그렇게 주장하면 비웃음을 살 것이다.

 

누군가 우산을 쓰면 비가 온다고 말하면 웃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늘에 호소하면 하늘이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호소하면 하늘이 바뀔 것이라고 믿고 억지를 부린다. 그건 분명 사람이 우산을 쓰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는 것과 같은 논리 구조인데도 아무도 그것을 가지고 웃지 않고, 오히려 그걸 신앙이라 말하고 더 간절히 그렇게 믿을수록 믿음이 좋다고 말한다.

 

땅은 사람이다. 흙으로 빚어진 사람은 땅이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며 창조 이유와 목적이다. 따라서 언제나 하늘의 뜻이 땅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호소가 하늘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도 이 구조 안에 속한 약속이지, 사람이 자기 존재 목적이 아닌 육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흙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이다.

 

사람은 하늘이 사람의 정체성을 정하는 주체로 인식하고 있기에 하늘은 하나님이다. 사람의 정체성,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는 하나님이 정한다. 따라서 하늘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이루어져 있다. 남은 건 그 뜻이 땅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신 건, 하나님이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기를 구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은 이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가지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땅인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과 같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

 

예수님은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러 오신 분이다. 사람에게 하늘의 뜻인 창조한 목적을 알리러 이 땅에 오셨다. 사람이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한 뜻에 순종하여 그 뜻대로 사는 존재가 되는 본을 보이러 오셨다. 그게 사람에게 구원이다. 존재인 사람은 존재 목적을 회복하는 게 바로 구원이다. 사람들은 육신으로 살며 겪는 각양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로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리러 오셨다. 존재가 목적을 회복하면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된다.

 

사실 사람이 겪는 모든 문제의 출발은 사람이 자기 자리를 떠나서 발생한다. 자기 자리를 떠난 상태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를 벗어나나 상태에서의 삶은 모든 게 문제이고 죄다. 망치로 두부를 자르려는 시도처럼 자기 존재 목적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에 저항과 문제를 겪는다. 그게 사람이 말하는 인생의 고난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자리를 벗어난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사람의 자리를 보이시러 오셨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 회복하면 모든 게 평안해진다는 걸 알리러 오신 분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람의 자리, 사람의 모습은 바로 십자가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베푸신 사람의 구원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는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신 방법은 몸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되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이시는 방법이었다. 바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래서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니 밑에 있는 사람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말하고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미운 오리 새끼가 하늘 나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인 걸 알고 날아오르게 되는 것처럼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리시니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한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표상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처럼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오셨고 모든 사람에게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게 바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이것을 구하라고 하셨다. 하늘의 뜻이 땅, 곧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심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그 기도의 실체이고, 사람은 그 기도를 통해 존재의 목적을 회복하는 구원을 얻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실체

 

여기서 우리는 왜 하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하늘에는 있지만 땅인 나에게는 나의 존재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평생을 살며 자기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 자기 존재의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핸드폰을 사는 사람이 핸드폰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듯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우리의 존재 목적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진 우리를 향한 뜻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구원이고, 주기도문의 목적이고, 우리가 기도해야 할 유일한 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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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16)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서 심문을 받았고,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했으며, 성도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데 필요를 충당했다. 이 사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의 필요를 자기 기준으로 계산하다 심판을 받아 죽는 일도 있었다. 교회와 사도들과 성도들의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를 계속 보여 주었다.

 

특히 사도들의 능력은 병 고치는 것으로 많이 나타났다. 하지만 능력에 관해 더 본질적인 사람의 견해는 교회와 성도들을 칭찬했다는 것이다. 능력으로 병이 낫는 것도 분명 놀라운 일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 건 성도들의 삶이었다. 사람은 칭찬할 만한 일을 동경하고 자기도 동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의 능력이 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삶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사람이 스스로 믿음을 가지기를 소망하도록 하는 능력이 복음을 온전하게 전한다. 성경이 말하는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 속의 '강권'은 사람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 이상의 강권은 없다.

 

교회의 능력은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싶도록 만드는 것

 

사도들의 능력으로 여러 가지 질병들이 나았다고 했다. 그중에서 특별히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이 나았다는 말씀을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 들린 걸 흔히 정신병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데, 성경은 그런 의미로 귀신 들린 자의 회복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귀신이 들렸다는 건 자기 머리, 자기 생각, 자기 의를 정체가 불명한 존재에게 빼앗긴 상태다. 사람이 자기 본질과 존재 목적을 망각한 상태를 총망라한 표현이다.

 

귀신 들렸다는 건 자기 정신과 존재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

 

사람들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존재를 귀신이라고 한다. 귀신은 정체불명의 존재다. 성경이 공중 권세 잡은 자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공중은 좌표나 공간의 거처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존재들을 총칭하는 말이 귀신인 셈이다. 이런 귀신에게 머리를 빼앗겼다는 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귀신 들린 상태를 고쳤다는 건 자기 존재 정체성을 회복했다는 말이며, 이는 교회가 간구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귀신 들렸다는 건 자기 존재 목적을 벗어난 가치관과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상태다. 기계를 고칠 때 용도와 목적에 맞지 않는 부품이 있으면 설사 그 부품에 정확한 규격이나 명칭이 있고 심지어 아주 비싼 것이어도 정체불명의 부품이 있어 고장 났다고 한다. 귀신 들린 게 무엇인지 설명하는 상황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걸 추구해도 모두 귀신 들린 삶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사랑은 의미 있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헌신과 애정인 만큼 하나님께서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의미 있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없이 목숨을 내어 주어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게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아닌 걸 추구하는 모든 삶은 귀신 들린 괴로운 삶

 

결론적으로 귀신은 더럽고 괴로움을 준다. 목적에 맞지 않는 부품은 거저 더러운 쓰레기와 같은 폐기물일 뿐이듯, 사람이 자기 존재 목적을 벗어나서 목적 기준으로 정체가 불명한 것을 추구하며 살면 재벌 회장으로 살거나, 국가 원수 혹은 거룩한 신부나 목사로 살아도 목적을 기준으로 소용없는 삶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을 '()'라고 뇌까린다. 그러니까 더럽고 괴롭게 하는 귀신 들린 삶에서 고침을 받는다는 건 인생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바꾸는 건 곧 거듭남이다. 존재에게 있어 목적이 바뀌는 건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이 되는 것과 같다. 자기 존재 목적이 아닌 정체불명의 귀신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던 인생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건 거듭남이다.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병 낫는 것에 비하면 생명이 바뀌는 건 비교도 안 되는 더 큰 기적이다. 성경의 진정한 기적은 사람의 거듭남인 이유다.

 

귀신 들린 데서 고침을 받는다는 건 곧 <거듭남>

 

또한 인생의 목적이 회복된 삶은 괴롭지 않다. 삶의 불편이 해소된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감기가 들면 거듭난 사람이라도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삶을 바라보고 용납하는 마음과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이다.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치유는 이것이다. 이렇게 귀한 걸 두고 고쳐도 어차피 죽는 육신에 임하는 기적에 매몰될 게 아니다. 무엇을 귀하게 볼 것인지를 아는 안목이 바로 밝음이다. 빛이 있으라고 하신 그 빛이 바로 이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이치를 넘는 기적이 아니라 거듭남이듯이,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의 기적 역시 과학과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행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임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모인 곳이 진정한 교회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을 위해 헌금이 모이는 곳이다. 이렇게 깔끔하게 연결된 성경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빛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적을 바라는 게 진정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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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은 아주 유명한 일화다. 아마도 많은 신앙인이 이 말씀에 대한 설교를 들었을 것이고, 주된 내용은 하나님께 드리는 데 인색하지 말라거나 아니면 헌금하기로 한 건 착복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드리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굳이 비꼰다면 그건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서 원하는 바를 얻겠다는 삯꾼들의 설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교회의 필요를 떠나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다. 즉 교회의 필요와 헌금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교회의 필요와 무관하게 드리는 헌금은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 자체로 성령을 속이는 일이다. 사람이 괜히 돈을 쓰지는 않으므로 교회의 필요가 아닌데 헌금한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예수님께서는 <장사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셨다.

 

이 사건은 단순히 헌금 횡령과 거짓말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아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드릴 것을 자기 맘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설교할 일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봐야 하는 핵심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다. 한 가지 자기들이 그 가치를 정했다는 건 분명하다. 밭을 판 돈에서 얼마를 감추었다는 건 계산이 수반되었다는 것이고, 가치를 계산한 결과 남은 돈이면 헌금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했다고 자기들이 판단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스스로 헌금의 가치를 결정했다.

 

이들의 생각과 대척점에는 교회의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한 마음으로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헌금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드린 헌금인 만큼 가치와 지출은 오롯이 하나님께서 맡기는 순종으로 드린 헌금이다. 반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의 기준으로 헌금의 가치를 정했다. 얼마를 감춘다는 건 헌금의 가치를 하나님께 맡긴 게 아니라 스스로 결정했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다양한 목적으로 헌금을 드리지만 성경이 말하는 헌금의 본질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데 사용하기 위한 재물로 드리는지는 의문이다. 사람들의 헌금은 다른 목적으로 주를 이룬다. 사람들이 헌금하는 목적을 대변하는 대표로 십일조가 있다. 십일조를 하면 재물을 쌓을 곳이 없다고 하시는 말씀에 의지해서 드리는 십일조의 목적은 단연코 재물이지 하나님의 의와 뜻 때문이 아니다. 십일조라는 마중물을 통해 부자가 되려는 게 본심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도 이랬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이런 마음을 <장사하는 것>이라고 크게 호통치셨다.

 

헌금의 본질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필요를 위하는 것

 

언뜻 몇 단계를 건너뛴 견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자기 가진 돈의 가치를 스스로 정했다는 건 헌금이 가져올 반대급부를 계산했기 때문이다. 간혹 사람들이 부자는 되고 싶은데 세전 수익의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 세후 수익의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 토론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스스로 부자가 되기 위해 어느 정도 헌금해야 하는지 계산하기 때문에 생기는 토론이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이 가진 헌금에 관한 기저에 깔린 생각을 대변하고 있고, 이들에게 일어난 재앙은 사람이 가진 헌금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사람이 헌금의 가치를 스스로 정하는 것, 헌금을 드려서 얻을 이익에 상응하는 헌금 수준을 정하는 건 이름만 헌금일 뿐 초대교회의 헌금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헌금이다. 반대급부를 염두에 두고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과 장사하겠다는 속셈이다. 그런데 헌금이라 하니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한 베드로 사도의 책망을 자기 이야기로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된다. 이건 단지 육신의 죽음에 한정된 말씀이 아니다.

 

사람들은 헌금의 반대급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헌금의 반대급부는 꼭 부자가 되는 것처럼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족이 아프지 않으려고, 또 사업이 망하지 않으려고 내는 건 무당에게 복채를 내는 것과 같은 것이지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를 위한 게 아니다. 이건 양심만 있으면 알 수 있는 일인데, 이 마저도 스스로 돌아보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양심에 화인 맞은 거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육신의 문제가 늘 희망적이길 바란다. 그 희망이 헌금을 왜곡하고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 기대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런 걸 기도하지 말라고 하면 두려워하거나 싫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먼저 구할 게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을 잊으면 안 된다. 헌금도 교회의 필요, 곧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게 먼저라는 뜻이다. 그리하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이 되면 모든 걸 충족해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거듭난 삶을 산다면 우리의 삶은 모두 하나님 것이 된다. 주인의 의도한 대로 구매한 자동차에 필요한 건 주인이 모두 채우듯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과 교회에 필요한 것, 그게 돈이든, 건강이든, 사업의 성공이든 필요하신 대로 이루신다. 우리가 그 필요를 규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걸 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신앙인 개인은 반대급부를 목적으로 헌금을 드리지 않는지 돌아보고,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필요를 위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은 단순하게 헌금을 착복하지 말고, 하나님 것을 기쁘게 드리라는 의미로만 좁게 보면 안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그 그런 결정을 한 이유를 보고, 나는 그렇지 않은지를 반추해 봐야 한다. 아울러 교회의 필요인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돌아보고, 교회는 그 뜻을 간구하고, 그 필요를 위해 헌금이 모이고 지출되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 얻는 올바른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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