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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25)

예루살렘에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사마리아인에게 안수하니 성령을 받았다고 했다. 이런 전개는 우리에게 세례와 성령강림이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당연히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게 한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건 구원의 문제이므로 생각 이상으로 신앙의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

 

핵심은 '성령'이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까지 갈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과정에서 보듯이 성령강림은 너무너무 중요하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예수님)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까지 말한 베드로가 성령이 오시니 오히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전하는 변화를 보면 성령강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고 성령이 오시는 게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면 신학이라는 학문의 존재 정당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성령을 받았다면 성경은 공부하지 않아도 자기의 삶, 자기의 이야기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성경은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니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성경이다.

 

세례는 성령강림의 전단계이자 필수적인 단계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물에 들어가거나 안수를 받는 행위 자체를 한정하는 게 아니다. 세례가 가진 본질, "나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라는 고백이다. 이 고백을 진심으로 한다면 그는 굳이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진정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세례는 물(율법과 말씀)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의 퍼포먼스지 본질은 아니다. 이걸 부인하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다. 세례라는 행위가 있어야 온전한 구원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자기 신앙을 증명한다.

 

세례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

 

그러므로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인 세례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절대적 조건이다. 성령으로 잉태되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는 사람이다. 행위를 실천하기 위해 의지나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 되어 그 본성대로 사는, 아니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자기 의지가 있다면 굳이 성령이 필요 없고, 질그릇과 같은 우리 한 개체 안에 삶을 이끄는 복수의 가치관이 있을 수 없다.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 성령은 임하시지 않는다. 설사 그가 기도하여 암을 치유한다고 해도 그건 그를 위한 성령의 강림은 아니다. 이건 분명하다.

 

우리의 신앙은 세례로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고 세례와 성령강림이 멀리 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고백한 사람은 쉽게 성령을 받는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의로워질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은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된다. 사마리아인들도 마술사 시몬이 부러워할 정도로 빌립 집사의 말씀을 사모했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 많은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으면 만나겠다고 하신 약속을 볼 수 있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고백한 사람, 행동으로는 성경을 모두 지켜낼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한 사람, 그래서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다 알게 된다고 하셨는데 자신은 모르기에 아직 성령이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으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 만남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어떤 기적도 일으키실 것이라 확신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건 이런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강림이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강림은 필수적이다. 자신이 성령을 받았는지는 앞서 자주 언급했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는지, 자신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닌지 돌아보면 된다. 이걸 솔직하게 인정하는 게 양심이다. 양심에 화인 맞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건, 이런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로는 구원을, 성령을 받을 수 없기에 하신 말씀이다. 나에게 성령이 필요한지 정말로 깊이 생각해 볼 때다.

 

성령이 강림한다는 것, 성령을 받는다는 건 곧 그리스로라는 생명이 잉태되고 거듭나는 것이다. 그건 곧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고, 말씀이 육신이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존재가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삶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렇게 꿰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 진정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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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5)

빌립 집사가 전한 복음을 듣고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8:12) 이런 소식은 예루살렘에 전해졌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가서 세례받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니 성령이 임하였다. 이런 능력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사마리아 성에 사는 마술사 시몬이다. 시몬도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니 성령이 임하는 걸 보고, 놀랍게도 돈을 주고 그 능력을 사려고 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크게 책망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과 함께 망할 것이라 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사해 주실지도 모르나, 시몬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였다고 책망했다. 이에 시몬은 베드로의 책망이 자신에게 임하지 말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걸 회개로 볼 것인지, 또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회개를 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마술사 시몬이 돈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려했다고 해서 거저 돈에만 집중해 이 사건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돈으로 사는 사례와 같은 범주에 넣는다. 물론 그렇게 분류하고 교훈을 삼는 건 잘못된 건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돈이든 무엇이든 대가를 치르고 성령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선물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와 능력은 모두 선물인데 이를 얻기 위해 돈이든 노력이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을 악독한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일갈했다.

 

하나님의 선물을 대가를 치르고 얻으려 하는 건 악독한 마음

 

사람들은 늘 하나님께 은혜를 갚으려 한다. 헌금으로 또는 봉사나 선교로.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건 모두 선물이다. 선물은 내 공로 없이 얻는 것이다. 구원도 은혜도 능력도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게 선물이 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건 나의 공로나 노력으로 얻을 수도 없고, 대가를 치를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걸 알 때 비로소 선물이 선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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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

스데반의 순교는 복음 전파의 전환을 가져온다. 유대 공동체 안에 머물던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우선은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많은 성도가 흩어지면서 복음이 오히려 사방에 전파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빌립 집사 또 고넬료를 찾아간 베드로와 같이 집사와 사도들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이 나타난다.

 

이런 변화는 우리 각 사람의 개인적인 신앙 여정의 변화로도 이해할 수 있다. 유대 공동체라는 하나의 개체 안에 머물던 복음이 유대 밖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모양새는 한 개인 안에 머물던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과 같다. 한 사람 안에서 갈등하며 성장한 복음이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삶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는 마음이 생기게 만든다. 이게 바로 씨를 뿌리는 것이고, 진정한 의미의 전도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는 더 없는 천민이자 혈통이었다. 수가성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했을 때 그 여인이 사마리아인인 자기에게 어째서 말을 붙이느냐고 생각할 정도로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람들이었다. 이는 예전 앗수르에 의해 시행된 혼혈 정책 때문인데, 북이스라엘을 점령했던 앗수르가 혼혈 정책을 펼쳤고,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다.

 

그런데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다. 복음이란 게 원래 낮고 천한 곳에 먼저 전해진다. 복음의 법은 사람이 낮아지는 것인데, 이미 낮아진 사람은 그 측면에서 유리한 셈이다. 때로 우리는 인생이 난관을 겪으면서 진정한 복음을 만나기도 한다. 복음은 자기 힘이 넘치는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은혜가 아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믿는 건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단순한 정황 논리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마리아 성의 백성들은 먼저 빌립 집사의 말을 들었다. 오늘 우리에게 빌립 집사는 대단한 사람이지만, 당시에는 유명인이 아니다. 집사라는 것도 교회의 직분일 뿐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분명한 직분도 아니었다. 그런 빌립의 말을 들었다는 게 구원받는 관문이었다. 오늘날도 그렇다. 목사 전도사가 아닌 사람의 말을 듣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누군 줄 알고?

 

그런데 사마리아 백성들은 빌립 집사의 말을 들었다. 그랬더니 표적을 보았다. 무엇보다 빌립 집사의 말하는 것을 귀담아들었다. 좇았다는 건 자기 삶이 되기를 바라며 들었다는 의미다. 그랬더니 더러운 귀신이 크게 소리 지르며 떠나갔고,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았다. 당연하게도 사마리아 성은 이 일로 기쁨이 있었다.

 

늘 설명하는 것인데 다시 설명한다면, 귀신 들렸다는 건 자기 머리를 빼앗겼다는 것으로, 삶을 주관해야 하는 의식 아닌 게 삶을 지배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믿음의 본질 없이 행동으로 믿는 믿음이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고, 귀신처럼 정체가 불분명한 것을 믿는 신앙이다. 중풍 병자는 반대로 생각은 바른데 몸이 생각을 따라오지 않는 상태다. 앉은뱅이와 함께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의미한다. 귀신 들린 자, 중풍 병자, 앉은뱅이는 모두 온전치 못한 신앙을 의미하고, 이것이 나았다는 건 온전한 신앙으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신앙의 회복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듣고 자신도 그렇게 되려는 소망에서 비롯된다. 빌립이란 사람이 보기에 하찮게 보였을지라도 그가 전하는 말씀이 온전하므로 들었더니 자신들의 영혼도 온전하게 되고 기쁨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게 복음이다. 온전한 말씀을 듣고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면 자신의 신앙이 온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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