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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9)

교회가 성장하자 헤롯왕이 핍박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야고보 사도가 칼에 죽임을 당했다. 이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자 세상의 임금이 반응한 형태다. 그렇다면 헤롯으로 대표되는 세상은 복음을 왜 핍박하는 걸까? 그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복음은 세상의 가치에 반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380년 테우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사건을 기독교의 승리로 본다. 하지만 이건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로마는 복음을 핍박하는 게 정상이다. 로마는 높고 강한 것을 추구하고 복음은 낮아지는 걸 의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핍박받고 외면받는 복음이 더 온전한 복음이다. 핍박과 외면이라는 대응 자체가 복음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복음은 세상 가치에 역행하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숭상하고 번영시키며 그 기조에 편승해서 권력을 얻고 유지하려는 세력은 복음을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높은 가치를 추구한다. 다만 무엇이 높으냐는 차이가 있다. 승부나 결정을 위해 가위바위보를 한다. 통상적으로는 바위가 가위를 이긴다. 하지만 가위가 바위를 이기는 걸로 설정한 후 승자와 결정권을 가지게 한다고 문제가 되거나 틀린 건 아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은 다른 사람 위에 서고, 다른 사람을 부리고, 다른 사람보다 부유하고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을 높은 것으로 여기고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다. 낮고 천한 십자가로 갈수록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세상은 높아지는 걸 이긴 걸로 하고, 하나님은 낮아지는 걸 의로운 것으로 여기신다.

 

낮아지는 걸 의로 여기는 복음은 높아지는 걸 의로 여기는 세상이 볼 때 악한 의로움

 

문제는 하나님의 이런 기준은 세상이 볼 때 못마땅하다. 높아지려는 사람은 높아지는 걸 추구하는 사람이 많아야 자기 뜻을 이룰 수 있다. 높은 걸 추구하는 무리 위에서 높아질 수 있지 낮아지려는 사람 위에서 높아질 수는 없으므로 사람이 높아지는데 관심이 없어지면 높은 사람은 힘을 잃는다. 그들에게 이건 치명적이다. 헤롯이나 빌라도나 대제사장이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건 이렇게 그들에게 치명적인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권력으로 이들을 핍박했다.

 

그렇다면 현재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핍박이 헤롯이 야고보를 죽인 이유에서 비롯된 핍박과 같을까? 그렇지 않다. 지금 교회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세상의 핍박은 다른 의를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같이 경쟁하기 때문에 받는 핍박이다. 기독교인들도 모두 높은 곳을 추구하고 있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경쟁이 불공평하거나 기독교인들이 이기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주말에 특근을 계획했는데 한 기독교인이 교회에 간다고 자기는 나오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을 보자. 그렇게 되면 회사나 동료들은 기독교를 비난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헌법에 보장된 자기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 항변할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려는 걸 비난하는 걸 핍박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핍박은 주로 이런 식이다.

 

한 집안에 종교가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모두 종교를 신앙하는데, 모든 종교에는 믿음에 반하면 받는 징벌이 있다. 서로가 자기 종교가 아니면 높은 곳에 오를 수 없다는 징벌을 믿고 강요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가진다는 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모든 걸 무너뜨린다고 생각한다. 결국 높아지려는 욕심에 핍박하는 것이지만, 낮아지려고 해서가 아니라 높아지려는 욕심의 충돌로 인한 것일 뿐 야고보가 순교 당한 이유와는 거리가 먼 일이다. 한 마디로 현대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핍박이라 여기는 핍박은 핍박이 아니라, 같은 파이를 차지하려는 경쟁이고 시기일 뿐이다.

 

기독교인도 회사나 다른 종교를 믿는 가족도 모두 세상에서 높아지는 걸 추구한다. 기독교인도 교회에 와서 늘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긴 자가 되기를 하나님께 그리고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간구한다. 기독교인도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하는 부류일 뿐이다. 그런데 남들 일할 때 교회에 가서 세상의 성공을 간구하는 건 회사 동료가 볼 때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이다. 이기적인 사람을 비난하는 건 사회가 공감하는 일이지 핍박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착각에서 헤어 나와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핍박은 같이 높아지려는 세상과의 경쟁에서 비롯된 투쟁과 시길일 뿐이다.

 

사도행전, 아니 성경의 모든 말씀 속 성령은 사람이 낮아질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걸 알게 하시는 분이다.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낮고 천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십자가에서 깨진 예수님의 육신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므로 말씀의 본체다. 성령은 이걸 알게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것이 높아져야 의로운 세상에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이다.

 

반대로 세상은 언제나 높은 곳을 추구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 어이없게도 낮고 천한 신분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얻으려 한다. 그러면서 같은 걸 놓고 경쟁하는 세상이 자기를 마치 핍박한다고 말한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걸 아는 건 단순히 핍박의 정의를 깨닫는 게 아니라 성경 전부를 아는 것이다.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는 등 복음을 핍박한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핍박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개념이다. 야고보는 높아지려는 세상이 사람이 낮아지는 걸 용납할 수 없기에 죽임을 당했다. 복음은 낮아질수록 더 가치 있고,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분이시기에 육신을 낮고 천한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은 세상이 정말로 감당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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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예수님의 시험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10. 08:27 Writer : 김홍덕

(3) 세상의 모든 영광을 구하라

금식 후 예수님이 마귀에게 받으신 세 번째 시험은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줄 테니 자기에게 절하라는 것이었다. 마귀를 경배한다면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는 의미인데, 이게 생뚱맞은 소리 같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8-9)

 

놀라운 건 예수님께서는 이 시험을 이기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 오늘날 신앙인들은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 예수님과 달리 마귀의 시험에 완전히 굴복한 것이다. 언제나 예수 이름으로 세상 영광을 구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험을 이겨낸다고 믿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아주 흔하게 이렇게 말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잘 살고 성공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라고. 듣기에는 너무 그럴싸한 말이지만 이런 가치관이 바로 금식 이후에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번째 시험이란 걸 알지 못한다. 한편으론 그걸 안다면 그렇게 말하진 않을 것이긴 하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믿음은 마귀의 시험에 패배한 것

 

세상 영광에 대한 사람의 열망은 말 그대로 무궁하고 무한하다. 교회 다니기 전에는 자기 힘으로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우상에게 의지하다가 예수님의 구원을 믿는다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하나님께 세상의 영광을 구한다. 더욱이 세상에서 자기가 영광을 얻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라며 하나님의 영광을 참칭한다. 믿는 신이나 대상이 바뀌긴 했지만, 믿는 목적은 같다. (사람이 종교를 바꿀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이렇게 사람들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는커녕 그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라는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랬더니 천사들이 예수님을 수종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0)

 

하나님을 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의지해서 세상 영광을 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뜻에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이셨다. 바로 세상에서 높아지는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지고, 사람이 주장하는 주장에 나의 수고, 나의 육신을 내주는 사람, 종과 같이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뜻을 내 삶의 목적과 의미로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데 있지 않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영광을 얻는 게 은혜라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말 그대로 저주의 아이콘일 뿐 어떤 관점에서도 영광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영화롭게 되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더 나아가 아직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걸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제자들마저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에 있지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데 있지 않다. 십자가를 지므로 만국과 세상 영광을 얻어야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시험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건 십자가를 진다는 것, 십자가에 영광이 있다.

 

십자가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단 하나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섬기라고 하심으로 시험을 이기신 것을 상기한다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므로 세상의 영광을 얻어야 하나님 아들이라는 시험을 이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진다는 게 어떻게 시험을 이기게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는 식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마귀의 시험도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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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30)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자 이어 교회가 세워졌다. 이방인의 첫 교회는 안디옥교회다. 처음에는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아 복음을 전했는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몇몇 사람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왔고, 이를 들은 예루살렘교회에서 바나바를 파송하여 교회를 세웠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인이 참여한 최초의 교회다. 지구촌 전체에 전해진 복음과 기독교의 출발점인 교회라 할 수 있다. 바울 사도도 늘 안디옥교회를 자기 뿌리처럼 생각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객관적 사실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우리는 이때부터 생겨난 <그리스도인>의 의미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적인 용어로 정착했다. 영어로는 Christan인데 이는 a christ를 의미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 언어에는 없지만 서양 언어에는 정관사와 부정관사라는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The Applea apple이 있는데, a apple은 사람이 먹는 사과 과일 즉 실물을 의미하고, The가 붙으면 실물이 아니라 사과라는 과일의 정체성, DNA를 의미한다. 이런 문화에서 비롯된 Christan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 사람을 의미한다. 즉 그 사람을 보니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한 알의 사과를 보면서 사과(The Apple)를 알 듯이.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로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사람을 보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람이 교회 다니더니 부자가 되었다는 인식을 주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아니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사람을 보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

 

안디옥교회에 모인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그렇게 생겨났다면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고, 그 예수님이 보이신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걸 순종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교회에 다니면 병도 낫고 사업이 잘된다는 인식을 좇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낮아지는 십자가가 아닌 높은 걸 추구하는 사람인데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면 안 되는 것이다. 어 괴상한 건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자기 인생의 목적이란 걸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이 시대 속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변질되고 왜곡되었으며 도용당한 상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기를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한다. 자기 교회에 오면 성공한 사람이 많다는 말로 사람을 현혹한다. 그런 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세상에서 실패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과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표현하는 존재다. 삶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낮고 낮은 예수를 표현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에서 높아지는 걸 추구하지 않는다. 예수 믿어 성공하면 사람들이 우러러보면서 예수를 믿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린, 세상에서 실패한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고, 자신도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이기려 하지 않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런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그런 그리스도인처럼 자신도 살게 된다. 높은 곳을 추구하는 가치관으로 사니 아닐 것 같지만 성령이 그렇게 하신다. 그게 성령의 일이고, 그렇게 낮아지는 삶이 본성이 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며, 이런 삶을 살기 바라며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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