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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예수님의 시험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7. 12:33 Writer : 김홍덕

(2)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첫 번째 시험을 성공 못 한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곳(성전 꼭대기)으로 데려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여기서 뛰어내려도 천사가 너를 받들 것"이라며 시험한다. 역시 평범한 육신의 능력 이상을 보여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시험이다.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6)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마귀가 가자는 대로 따라갔을까?' 이유는 그리스도는 항상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언제라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시험을 당한다. 이건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숙명이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몸소 이런 운명을 보이셨다. 말씀을 선포하려 하니 마귀가 시험하고, 십자가에 달리니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당했다.

 

그리스도는 마귀가 예수님에게 그랬듯,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보통의 사람과 다른 능력을 보이라고 하고, 인간이 가진 한계 이상의 능력을 보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을 향한 마귀의 끝없는 시험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죽는 게 정상인 육신을 가진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시중을 들 것이니 무사하리라는 마귀의 시험은 이렇게 우리 일상에 남아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의 한계를 넘는 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두 번째 시험의 본질

 

마귀가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란 시험을 하는 건 하나님 아들에 대한 기준의 차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람은 육신을 연약하고 부족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 상태로는 하나님 아들이라 할 수 없고 돌로 떡을 만들고, 추락해도 다치지 않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 아들이라고 시험한다. 육신에 관해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지는 건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결과다.

 

하지만 하나님은 행위로 성경을 지킬 수 없고 추락하면 다치거나 죽는 육신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사람은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건 사람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고 하나님은 처음 창조한 사람을 보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고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사람의 육신이면 하나님의 뜻이 임하여 하나님 아들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신다.

 

마귀의 시험에 빠진 사람의 생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 믿는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교회 다닌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게 아니냐?", "신학은 했느냐?", "직분은 뭐냐?", "성경은 몇 번 읽었느냐?", "십일조는 하느냐?"는 말들은 모두 교리라는 가면을 덮어쓴 교묘한 마귀의 시험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이런 요구는 언뜻 신앙의 성장을 인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아들이라면 남들과 달리 성경을 지키고, 능력을 보이라는 마귀의 시험이다.

 

일반적인 사람의 능력 이상을 할 수 있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시험

 

예수님은 이 시험을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시므로 물리친다. 마귀가 시험하는 상황 속에서 마귀의 구체적인 시험에 답하시지는 않고 거저 시험하지 말라는 말로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을 부족하다고 우기는 건 그 자체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뿌리를 둔 각양의 유혹과 그럴듯한 말은 모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건 마귀의 의도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시험은 실체를 알면 이길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람이 육신의 능력 이상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시험은 단지 사람을 시험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분명한 선언으로 이 시험을 이기셨다. 우리 역시 그렇게 이 시험을 이긴다는 의미다.

 

육신을 가진 사람의 한계와 능력 이상을 보이는 게 하나님 아들이란 생각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이 우리가 받는 시험이자 주기도문에 나오는 시험이다. 주기도문은 하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로 결국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구하는 기도다. 이 간구에 이어 시험에 들지 않기를 함께 구하라고 하셨다는 건 당연히 그리스도로서 받는 시험을 이기기를 구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건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걸 알면 이 시험은 이긴다. 예수님께서 "네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다는 말씀만으로 이 시험을 이기신 게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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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8)

베드로는 고넬료의 청을 수용하여 수일을 고넬료의 집에 머무르다 돌아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건 할례자, 곧 유대인들의 비난이었다. 비난의 이유는 이방인과 함께 먹고 마시고 유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같이 먹는다는 건 의를 같이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공산당원과 먹었다면 공산주의를 인정한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했다. 비난하는 상황은 당시 유대인들의 가치관을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알았을 때 모두 순종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1:17)

 

베드로는 자기 일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고넬료의 집에 가기까지의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했고, 무엇보다 고넬료의 집에서의 설교를 이야기한다. 그가 고넬료의 집에서 한 설교는 거의 자기 경험에 바탕을 둔 설교였다.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라는 말이 이를 대표한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행 11:15)

 

베드로는 자기 안에 있는 경험과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같다는 걸 알았다. 자기가 경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베드로의 말을 들은 유대의 형제들도 베드로가 자기 경험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할 때 수긍했다. 그들도 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이 성령을 받았는데, 그 모습이 자신들이 성령 받을 때와 같았다고 베드로가 전했더니 이방인과 먹고 마시는 건 안 된다던 사람들이 믿었다. 같은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간증대로 하나님의 성령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한 하나님께서 같은 성령으로 임하신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정한 하나의 목적을 가진 존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사람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성령을 알기에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임한 성령이 하나님의 성령이란 걸 알았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유대인들 역시 베드로의 말에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다는 걸 인정했다.

 

베드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자기 안에 거하시는 복음을 전했다. 학습한 걸 전하거나 성령을 설명한 게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걸 믿지 못했던 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전하는 사람이 된 건 오직 성령강림 때문이었다. 베드로 안에 있는 성령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는 영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는 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서로의 경험을 공감한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집에 있던 이방인 그리고 유대의 형제들 모두가 한 성령을 받았다는 건 그들 모두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성령은 그 일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성령강림,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면 당연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건 대부분 믿고 있겠지만, 정작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간과한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건 세상에서 실패했다는 의미다. 세상 기준에 의해 실패자, 죄인으로 심판받았다는 의미다. 그렇다는 건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을 간구한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고 기만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런 믿음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세상의 성공을 간구하는 신앙의 대상인 예수를 믿는다는 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게 아니다.

 

물론 그 거짓 영을 받은 이들도 서로 공감한다. 마치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임하는 성령에 공감하고, 베드로의 말을 들은 유대의 형제들이 공감했던 것처럼 세상에서 성공한 간증을 들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망해가던 사업이 갑자기 흥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라 공감한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성령을 체휼한 경험과 공감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알게 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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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8)

고넬료라는 이방인 백부장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하며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임하셔서 베드로가 있는 곳을 알려주시며 청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꿈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을 알리셨다. 이는 꿈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꿈속에서 율법으로 먹지 못하는 것을 보이시고 '잡아 먹으라' 하셨는데 베드로가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깨니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와서 베드로를 인도했다. (10:9-16) 율법으로 먹지 못하는 음식이 바로 이방인인 고넬료였다.

 

이 고넬료의 일은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이방인을 넘어 온 세상으로 전해진다는 걸 보여준다. 하나님은 자신이 외모가 아니라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는 걸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복음을 누림에 있어 외모로 인한 차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적지 않게 복음을 전함에 있어 '저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라며 생각한다. 분명 생각하는 사람의 어떠함이 있을 것이다. 강직한 무신론자거나, 아주 흉악한 범죄자거나,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남의 형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으므로 우리는 거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다 알아서 하신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앞서 열거한 완곡한 사람들, 범죄자나 무신론자와 같은 사람들을 우리가 인식하는 기준은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외모다. 사람의 행동과 말 그리고 사고하는 방식이다. 그걸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복음을 전하는 대상은 제한적으로 된다. 이런 현상은 비단 복음만이 아니라 사람 관계의 법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런 걸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본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창조한 목적으로 가늠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핸드폰 공장에서 핸드폰을 만들 땐 자기 설계 목적으로 평가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의 목적이다. 그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다.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대로 살아가는 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이 기준으로 판단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그것 아닌 사람의 어떠함,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형식이자 도구인 사람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을 보는 기준은 당연히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께서는 <외모>라는 걸 중요하게 언급하시는 건 외모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의 어떠함, 신분이나 행동을 보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가진 그런 기준의 대상들을 <외모>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흔히 신분이나 명예나 돈 그리고 행동 양식 등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요소들,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외모다.

 

베드로는 율법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가 율법주의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직 복음이 이방에게 전파되는 걸 보지 못하고 있었던 베드로에겐 복음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걸 일반화된 용어로 표현하면 혈통이 된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혈통, 그것이 복음의 대상이 되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기에 베드로에게 그 생각을 알려 주셨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머무르면서 복음을 전했더니 결국 성령이 임하시는 걸 보게 된다. 하나님의 경륜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사실 이 외모는 복음 전반에 있어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외모를 보고 판단한다는 건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외모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가치관이 대단히 생소한 것 같지만, 사실 기독교 안에는 만연한 가치관이다. 쉽게 설명하면, 사람의 형편이 나아지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판단하고, 불행한 일을 겪거나 경제나 건강 상황이 악화라도 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거나 잘못을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은 신앙 전반에 아주 깊고 다양하게 침식되어 있다. 목사가 아니면 설교를 할 수 없다는 것도 목사 자격이라는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며, 행여 누가 40일 금식이라도 했다고 하거나 방언을 받은 사람을 신앙 좋은 사람처럼 대하는 것도 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그가 가진 가치관으로 분간하므로 복음을 전하는 대상 역시 외모로 판단하게 된다. 범죄자나 고집 센 사람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편향적인 생각이 그 세계의 생각이다.

 

고넬료의 일은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이 만민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유대인에게 한정했다면, 오늘 우리가 복음을 이렇게 나눈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 되었을 건 자명하다. 나타난 일로만 봐도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더 나아가 단순하게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진 게 아니라 성령이 강림하셨다.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건 곧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곧 이방인의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일이 시작되었다. 성령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믿음이 그 사람의 육신 곧 삶이 되도록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다. 그 성령이 임하셨다는 건 그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목적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걸 알리는 사건이 바로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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