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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69)

스데반은 교회가 공정한 구제를 위해 선출한 일곱 집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유명세는 행정을 잘 펼쳐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기 때문이다. 집사의 직분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전하는 데 있음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스데반의 순교를 이야기해 보자. 스데반의 순교 이유는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스데반은 정말로 하나님을 모독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행 6:11)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진 스데반은 기사와 표적을 사람들에게 행하였다. 또 공회에서 온 자들과 변론하게 되었는데, 아무도 스데반을 당하지 못함을 인해 거짓 증인을 세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공회에서 온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 스데반은 요즘 말로 '듣보잡'이었을 것인데, 모세와 하나님에 관한 변론에서 스데반을 당하지 못했다는데 적잖이 자존심도 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당할 방법은 없다. 이 시대 상황으로 바꾸면 목사가 평교인과 성경을 주제로 토론했다가 묵사발이 난 셈이다.

 

그런데 공회에 온 자들은 스데반의 말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다. 돌은 율법이므로 결국 그들의 법으로 스데반을 심판했다는 것인데,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명분이기도 하다.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사도들을 사람의 법으로 심판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율법적인 신앙에 매몰된 사람들이 복음을 대하는 일관된 태도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스데반과 변론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다. 단 하나의 차이는 이스라엘 역사 속 인물들과 자신의 역할 차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법을 따른다고 믿고 있었지만, 스데반은 자기와 사도를 죽이려는 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한 사람이라고 설교한 차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했다. 결국 스데반의 설교가 옳은 말이란 뜻이다. 스데반은 하나님을 모독한 게 아니라, 은혜와 권능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결론은 스데반의 순교로 마무리되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심판받아 마음에 찔린 사람의 손에 죽은 것이다. 이건 아주 불합리해 보이지만, 놀랍게도 이것이 복음이다. 물론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모두 육신의 목숨을 잃는 게 복음인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법이다. 더 의로운 사람이 죄인이 되는 법이 복음의 실체다.

 

의롭고 온전한 이가 죄인이 되는 게 복음의 실체

 

이제 우리는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사도들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공회에서 온 자들이 모욕당했다고 주장한 하나님은 모세와 다윗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건 자기들의 하나님이다. 그렇지 않다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찔릴 이유가 없다. 스데반의 설교 속 모세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하나님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양심에 찔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21, 20, 12)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제사장과 바리새인들만이 화를 낸 적이 있는데, 그와 같은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스데반이 모독한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다. 천한 나사렛에서 온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의 하나님, 가난과 독립을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보내는 하나님, 신학을 전공해야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이들이 믿는 하나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는 이들의 하나님을 스데반이 모독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스데반과 사도들을 죽였다. 그리고 오늘날은 진정한 하나님 아들을 믿겠다는 이들을 유혹하고 흐리고 있다.

 

순교는,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준다"라는 협박 앞에 신앙을 고백하고 택한 죽음이 전부가 아니다. 핵심은 어떤 예수를 부인하고, 어떤 예수를 믿는지다. 낮고 천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 믿음을 인하여 높아지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사람들 앞에서 고난받고, 그게 무슨 신앙이냐며 조롱당하는 게 순교다. 그리고 그 세계의 정점에 육신의 목숨도 그 믿음을 인하여 잃는 게 순교다. 스데반의 순교가 바로 이것이다.

 

순교의 핵심은 <어떤 신앙을 고백하고, 어떤 믿음으로 사느냐>다.

 

그렇다면 아마도 적지 않은 곳에서 오늘도 많은 순교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사회 속에서 "네가 옳다"며 자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순교는 늘 있다. 목숨을 던지며 신앙을 고백하는 순교에 숭고함이 미치지 못할 수는 있지만, 삶의 순간 순간을 그렇게 예수로 인하여 낮아지는 순교는 항상 있다. 이게 없다면 세상은 쓸모를 다한 것이다. 그땐 정말 지구가 종말을 맞을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게 하나도 나지 않는 지구는 하나님께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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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죄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설명했듯 주기도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사람을 통해 이루길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본성이 되기를 구하는 기도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나 그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이 모두 그 하나를 구하는 것이고, 그렇게 된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다. 결론은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즉 구원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구원 이전의 어떤 삶, 죄와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하는 삶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진다는 건 곧 죄가 사해지고 어둠이 사라지는 빛이 있는 삶이다.

 

'''하말티아'라고 발음하는 헬라어가 어원이다. 이 말은 '과녁을 벗어나다'는 뜻인데 자기 자리를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리는 위치가 아니라 정체성이다. 사람이란 존재에게 정해진 자기 정체성이 있는데 이 정체성을 벗어난 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다. 아담이 범죄하고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씀 속 <어디>도 사람의 자리, 사람의 정체성이다. "아담아 네가 지금 내가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안에 있느냐?"라는 말씀이다.

 

죄는 자기 존재 정체성의 자리를 떠난 것

 

간첩이란 존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간첩은 존재 자체가 죄다. 그가 선하게 행동하고,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에 늘 앞장설 뿐 아니라 기부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본다고 해도 죄인이다. 오히려 그가 간첩이란 사실이 드러나면 그의 선행에 혜택을 입은 모든 사람도 죄와 연루된 것으로 간주해 사법기관의 조사를 받게 된다. 이처럼 정체성이 죄를 정의하는 핵심적 요소다. 형법에 정의되는 죄도 결이 같다. 모든 형법의 기저에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가 깔려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한 정체성을 벗어난 행동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행동은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정체성이 지향하는 목표가 행동의 동기다.

 

사람의 정체성은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이 정하는 것

 

사람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정했다. 하나님이 자기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뜻에 따라 사람을 창조했다. 따라서 피조물인 사람의 정체성(이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셨다.)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할 때 온전하고 선하며 의롭다. 반대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아닌 것을 표현하고 지향하면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죄를 선악과가 대변한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건 단순하게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불순종이 아니라 사람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 기준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는 다음에 나오는 <선악과>에서 더 자세히 알아본다.

 

정리해 보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있어 창조된 존재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고, 사람은 그 뜻대로 사는 게 자기 자리이자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의 의가 아닌 걸 의로움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표방(아담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야 할 빚이 있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죄다. 예수님께서 죄를 빚(debt)이라고 하신 이유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해야 할 빚진 존재

 

이는 비단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사용하는 물건도 다 그렇다. 자동차는 나를 이동할 수 있도록 기능을 발휘해야 할 빚이 있고, 전구는 밝음을 제공해야 할 빚이 있다. 이런 빚을 갚지 않는 건 죄다. 그리고 빚을 갚을 수 없는 죄의 상태는 고장 났다고 하고 아프고 죽었다고 한다. 또한 모든 존재의 수명 역시 이 목적을 이행할 때까지다. 사람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육신이 더 이상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데려가신다.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을 존재케 한 목적에 관해, 자기 정체성에 관해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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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

교회와 사도들에 대한 핍박은 더해졌지만, 예수의 도를 믿는 제자의 수는 늘어났다. 사도행전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이러한 핍박은 복음 확장의 계기가 되는데 그 시작이 집사의 임명이다. 언뜻 집사는 교회의 구제가 불공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의 보강처럼 보이지만, 정작 집사들의 행적을 보면 사도와 다를 바 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와 빌립 집사의 일이 바울 사도의 회개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교회에는 출신이 다른 성도들이 있었다. 이건 사람이 많아지면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이다. 성도들의 구제를 주관하던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에 바빴기 때문에 교회의 구제가 출신 별로 공정하지 않다는 불만이 쌓였고, 이 문제를 바로잡고자 집사를 선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은 이걸 행정과 사역의 분리처럼 보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교회의 행정 구조도 그렇다. 명목상이긴 하지만 교역자 그룹과 당회를 구성하는 장로들의 역할을 나눈 게 그렇다.

 

하지만 구제의 공평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이 말씀은 식량의 공정한 배분과 같은 육신의 필요에 대한 구제가 핵심이 아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일을 행정과 사역으로 나눌 때 효율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문제를 바로 보려면 교회의 필요, 교회가 행하는 구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이 관점에 해답을 해결하는 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이다. 교회의 정체성은 교회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에서 알 수 있다. 구하고 있다는 건 곧 필요고, 구제는 그 필요의 공정한 분배다. 구제를 육신의 먹거리, 입을 거리로 보면 본질을 볼 수 없다.

 

교회의 성도들이 가진 불만은 먹을 것, 입을 것에 관한 공평한 구제가 아니다.

 

당장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집사들은 쌀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데반은 순교했고, 빌립 집사는 다니며 이방인이라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교회가 필요했던 구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음지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성도들의 마음이다. 그래서 구제를 위해 집사를 선출하겠다는 사도들의 말에 온 교회가 기뻐했다고 한 것이다. 이를 기뻐한 교회는 사도들이 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던 그 교회다.

 

온전한 교회가 바라는 공평한 구제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

 

즉 사람들이 원한 구제는 영적 구제고, 이것이 공평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랐다는 건 출신에 무관하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구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간구대로 스데반을 통해 바울 사도가 회개하고, 그 바울 사도가 말 그대로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이른 흐름을 증명하는 한 사례가 바로 사마리아와 이디오피아 내시장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 집사의 일이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가 군대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을 찾게 되는 과정을 거쳐 복음은 전 세계로 전파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육신의 안목으로 읽지 않고 사도행전을 제대로 읽었다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성도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 교회의 필요를 위해 사도들 앞에 두었다는 말씀 속 필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일곱 집사를 선출하는 과정을 육신의 빈부 격차에서 발생하는 구제의 필요로 읽고, 설교하고, 믿는다는 건 성경을 육신의 안목으로 읽고 믿는다는 증거다. 교회의 정체성을 까맣게 모르는 것이며, 이걸 모른다는 건 성령이 없다는 뜻이다. 그건 곧 구원이나 거듭남이 없다는 의미이므로 깊이 돌아봐야 한다.

 

물론 우리의 삶에 육신의 필요는 절대적이다. 성경의 모든 걸 영적인 의미로만 보는 걸 경계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건 육신은 그 속에 있는 걸 표현하는 형식이란 것이다. 그건 역설적으로 속에 있는 것, 심령과 영혼이 온전하면 그 온전함대로 육신의 일도 형통하게 된다는 뜻이 된다. 당연히 이 형통함의 기준도 세상적 기준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사도행전을 처음 시작할 때 사도행전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기록한 성경이라고 설명했다. 너무 당연한 이 기준으로 일곱 집사의 선출 사유를 본다면 당연히 이 구제는 성령의 역사가 공평하기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성도들의 간절함이다. 그리고 이는 사도행전의 전개가 증명한다. 집사의 일을 전후로 성령의 역사가 유대와 예루살렘에만 머물지 않고 널리 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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