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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힘든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이라고 말한다.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어려움을 겪고 나면 신앙이 더 성장하게 되고, 그렇게 신앙이 성장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신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생각은 시험을 이겨내고 받는 복 대부분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에 중심을 두고 있다. 더 부자가 되거나, 병이 낫거나, 자녀가 잘되거나, 시험 합격과 승진이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목적인 셈이다. 세상에서 이기고 높이 올라가는 게 의롭다는 생각이 그 뿌리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의로운 일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이겨 높이 올라가는 걸 구하는 자체도 웃기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주시려고 사람을 시험한다고 생각하는 건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답답한 이야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게 오늘날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이 말하는 복을 받을 자격을 검증하기 위해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시험밖에 주시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봉한다. 세상에서 이기고 올라가는 복을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희망으로 이 말씀을 해석한다. 하지만 그 말씀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바라시므로 세상에서 높아지는 데 실패할 정도로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건 사람의 한계와 목적을 아시므로 그 목적 안에서 사람을 경영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목적하는 바가 있어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의 시험은 모두 그 목적에 수렴한다. 냉장고가 라면을 끓여 주길 바라지 않듯이 하나님도 사람을 향한 목적 안에서만 사람을 대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사람의 존재 목적 안에 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도 사람의 정체성과 연관된 사안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경영은 창조 목적 위에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걸 위해 필요하다면 시험을 하신다. 이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는 필요와 이유다. 그런 이유와 필요에서 보면, 사람은 애초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신다는 말씀의 본질이다.

 

주기도문의 시험도 그렇다. 핵심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걸 방해하는 모든 게 시험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 목적을 방해하는 유혹은 모두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이 시험의 실체는 예수님께서 직접 보이셨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금식 후에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는데, 이 시험이 곧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당하는 시험, 그 자체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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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8 – 사도의 자격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8. 14. 09:25 Writer : 김홍덕

(9:26-31)

회심한 사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의심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대제사장에게 끌고 가기 위한 기만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사울은 더욱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증명했고, 다메섹에 있는 많은 유대인이 그에게 설득됐다.

 

이런 사울의 변화는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했고 분노한 유대인들은 사울을 잡아 죽이려 하므로 밤에 광주리를 타고 성에서 도망가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사울은 기존의 제자들과 사귀기를 원했지만, 제자들은 두려워했다. 이때 이를 중재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다. 바나바는 마가로 인해 바울과 다투기 전까지 늘 함께 복음을 전한 사람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사울, 곧 사도 바울이 전한 내용이다. 그건 역시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은 이게 하나의 성문(成文)이 되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물론 그 의미를 알고 당연하게 여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이건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었다. 더욱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며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는데 앞장선 사울이 이걸 전한다는 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은 건 예수님의 신분과 행실 때문이었다.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먹고 마시며, 성전을 뒤집어 놓고 기존의 율법들을 무시하는 말로 사람을 현혹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들에겐 그리스도다운 구석인 정말로 "1"도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그들 눈에 예수님은 악질 신성모독범일 뿐이었다.

 

그런 예수님을 그들이 잡아 가두거나 죽이지 못한 건 백성들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겼기 때문이다.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대하는 백성들의 태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은 이스라엘의 독립이나, 가난과 질병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밝히시니 백성들마저 예수님에 대해 지지를 철회했고, 이에 힘을 얻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게 예수님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었다.

 

그런데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하는 건 용납될 수 없었다. 지금이야 그냥 사이비종교 취급하면 되겠지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즉 신성모독이나 반역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는 죄였다.

 

예수님의 사도가 된다는 건 여러 가지 자격 기준이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가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12 제자에 속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말하곤 한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격이 곧 사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의 자격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전하는 사람이 곧 사도다. 사울(사도 바울)이 사도로 인정받는 건 어떤 다른 자격을 인함이 아니라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전했기 때문이다.

 

사도의 자격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전하는 것

 

오늘날은 목사들이 사도의 자리를 대신하려 한다. 자칭타칭으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자격은 시험과 학력에 있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전하는 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황금 마차를 타는 예수라는 것이다. 강단에 서서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기준으로 죄인인 예수를 전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원하는 성공을 담보하는 예수를 전하고 있다. 그런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사도가 아니다.

 

굳이 당시의 상황을 대입하지 않아도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 그래서 죄인이 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당한 예수를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구원이 어디서부터 어디로 구원을 받는 것인지도 명확해야 하고, 예수의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어떻게 앞서 말한 구원을 얻게 하는지 모든 게 명확해야 한다. 이 모든 게 분명하고 밝을 때 비로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자기도 명확하게 모르는 걸 남에게 인생을 걸고 믿으라고 전하는 건 사기지 전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 안에 십자가를 진 죄인 예수, 사람과 세상의 기준으로는 실패자요 죄인인 예수가 세상의 곤고함에서 성공으로 구원하는 예수가 아니라 내 존재의 정체성을 밝히는 구주라는 걸 믿고 그걸 전한다면, 신학을 하지 않아도, 가운을 입고 강대상에 서지 않아도 사도다.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사도다. 사도 바울이 사도로 인정받은 것 역시 그랬다. 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전하니 그가 사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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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5)

사도행전 919절 이하에서는 회심한 사울이 즉시로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이심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사울은 갈라디아서 1(17, 18)에서 자신이 아라비아에 3년간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기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다메석의 회심은 AD 34년 경이고, 사도행전 919절에서 사울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시점은 AD 37년 경이라 말한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그 사이에 아라비아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울이 다메섹의 회심과 복음 전파 사이에는 3년의 묵상이 있었다는 걸 이야기한다. (사도행전의 순서로 보면 13장이 되어서야 이름이 바울로 바뀌지만 우리의 익숙함을 위해 그냥 사도 바울이라고 한다.)

 

오늘 여기서 사도 바울의 회심과 아라비아에서의 3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온전한 복음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쉽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오면 짐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거저 주는 은혜라는 말의 영향 때문인지 교회에 다니는 복음과 구원을 아주 쉽게 여기지만, 사실 복음의 과정은,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걸 "나는 예수 믿는다"라는 말 한마디로 모두 쉽게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고, 믿는 건 큰 오류다. 그리고 이 큰 오류가 현재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면 복음이 어려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분명 복음은 쉽고 가벼운 것이다. 하지만 복음에 이르는 건 어렵다. 쉬운 복음에 이르려면 사람이 자기 마음을 돌이켜야 하는데, 이게 정말 어렵다. 그래서 복음은 어렵다. 바울 사도의 여정은 사람이 자기 마음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건 오늘 우리에게 "나에게도 그런 과정이 있었는가?" 반문하게 한다.

 

바울은 복음에 이르기 전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자기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사람을 잡아 가두고 때리며 핍박하면서까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온전한 믿음이라는 걸 믿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니 자기의 모든 가치관은 어두움 그 자체라는 게 드러났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체험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서신 전반에는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건 자기 안에 그 흔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복음을 쉽게 생각한다. 성경을 행위로 지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는다. 어려운 건 타협한다. 신학이 이를 돕는다. 십일조를 하려면 세전 금액으로 해야 한다. 어느날 대접받은 식사의 10%도 다 적립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십일조다. 세후 금액으로 십일조를 낸다는 건 하나님보다 이 땅의 나라에 더 굴복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해 보면 이 말씀이 행위로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이미 신학과 기독교 신앙은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는 탈출구를 마련해 두었다. 하나님을 믿는 게 너무 쉬워져 버렸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빈도 부사는 자기들 맘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게 신앙이라는 말이 그 쓰레기통의 뚜껑이 되었다. 노력이란 이르지 못한 이들의 행위인데도 자기들이 노력하는 자들이란 걸 부인하면서 신앙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양두구육인 셈이다.

 

신앙의 세계가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예수 믿는 걸 아주 쉬운 일로 여긴다. 세례 문답 시간에 대답 몇 번이면 구원받은 줄로 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구원은 없다. 자기 안에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과 체험과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은 건 오직 예수 믿음으로 얻게 될 복락뿐이다. 숨기고 있지만 육신의 노력으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의 복락은 당연히 육신의 복락이다. 이런 신앙에 구원은 없다.

 

바울 사도는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에 정말로 죽을 힘을 다했다. 그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해도 앞장 섰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니 자기의 모든 안목은 어두운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 그의 서신 전반에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그렇게 강조한 이유다. 그런 그가 아라비아에서 보낸 3년은 보지 않아도 자기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그에게 이제 성경은 온전한 복음이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능통했다. 단지 그는 그걸 자기 육신의 노력으로 지키려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그가 아는 성경은 모두 복음이 되었다. 자기가 아는 모든 성경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고백이 있는 사람의 삶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복음이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자기 능력껏 성경을 행위로 지켜보려 했던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말씀이 복음의 능력이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정말로 성령이 오시니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의 삶 전체가 복음의 능력이 되었다. 바울도 그랬다. 오늘 우리도 그럴 것이다. 신학이 제시한 타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릴 적부터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신앙적 경험과 성경 지식은 복음의 능력이 된다. 이걸 다른 말로 성령의 충만과 능력이라고 한다.

 

다시 한번 예수 믿는 건 쉽지 않다는 걸 분명히 한다. 자기 육신의 모든 걸 다해 성경을 지켜보려고 노력하는 삶을 쉽다고 말할 게 아니라면 분명 그 과정은 어렵다. 이는 출애굽의 광야 생활과 같고 사도 바울이 사울로 살던 시절과 같다. 이 과정이 없으면 쉬운 복음에 이르지 못한다. 구원과 복음 안에서 장성하는 건 그냥 쉽다는 말을 믿는 것 만으로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이걸 분명히 알고 자기 신앙을 돌아봐야 한다. 이게 우리가 사도 바울의 삶을 따라가며 배워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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