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3:42-52)
말씀을 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와서 말씀을 전해 줄 것을 사도 바울에게 청했다. 그리고 그 다음 안식일에는 성의 거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모였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를 시기하고 나서서 바울 사도를 변박하고자 했지만, 사도 바울을 이기지 못했다.
이 일은 몇 가지 각도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으로 의로워진다는 믿음을 중심으로 한 역학관계다. 예루살렘이나 타지에 있는 유대인은 모두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 굽히지 않았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후에 향한 이고니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설교하고 전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충돌이었고, 끊이지 않는 저항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있다. 오히려 더 교묘하게.
유대인들의 저항은 일시적이지 않았다. 어쨌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는 사도 바울의 선교 일생에 끊임없는 도전과 저항이었다. 그리고 율법주의는 영지주의와 함께 지금까지도 복음을 왜곡하는 두 거짓 선지자이다. 이 둘은 외형상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점에서 뿌리가 같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는 영지주의와 함께 이단을 이끄는 쌍두마차
율법주의는 우리 육신이 부정하니 행위를 의롭게 해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영지주의는 육신은 구원의 대상도 아니고 어차피 안 되니 의미 없다는 주장이다. 결국 육신을 부정한 것으로 단정한 상태에서의 다른 해법일 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뿌리는 같다. 이것이 문제인 핵심적인 이유는 하나님은 다른 관점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사도 바울이, 영지주의는 베드로와 요한 등 예수님의 제자들이 끊임없이 경계하고 계몽했다. 여기서는 율법주의를 중점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영지주의나 율법주의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잘 이해했으면 한다.)
예로부터 사람은 언제나 의로워지려고 애쓴다. 그건 자신이 의롭지 않다는(부정하다는) 자책이 있다는 증거다. 그 죄책감은 아담에서 비롯되었다. 선악과를 먹고서 자기가 벗었다는 걸 부끄럽게 여긴 아담의 모습이 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리고 부끄러워 숨은 대상이 하나님이다.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다는 걸 안 것이다. 그래서 의로워지려고 한다. 다만 그 방법이 문제다. 사람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감추었고, 하나님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해결했다.
사람은 행동이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기준 역시 행동이다. 국가와 사회의 법도 아주 특수한 사안을 제외하면 행위 기준이다. 그래서 행위를 의롭게 하면 의로워진다고 생각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감춘 행위가 사람의 이런 속성을 대변한다. 하지만 행동은 내면이 드러난 것일 뿐 자아의 본체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을 상고해야 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행위나 외모를 보시지 않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 행위는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하나님의 별스러운 게 아니다. 이건 정말로 사람을 보는 지혜다. 사람의 행동은 정체성과 의식 그리고 무엇을 의로운 것으로 생각하는지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게 악하면 행위와 무관하게 악하다. 착하게 살아가는 간첩과 같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신다. 그래서 "어디에 있느냐?",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어디'라는 건 장소가 아니라 정체성이고, 누구라고 하느냐를 물으시는 건 어떤 관계인지를 물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정체성을 회복했는지가 모든 기준이다. 그 자리를 떠나면 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죄>라고 한다. (죄의 원어 '하말티어'가 '자리를 벗어났다'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행위를 의롭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 따라서 행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규정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 반대로 존재가 의로워지면 그의 모든 행위는 의롭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갈 2:16)이나, 사랑이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는 말씀은 모두 존재가 바뀌면 의롭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나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라는 걸 믿는 것'이고, 사랑이란 '하나님과 의미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을 알았다면 우리는 율법이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삶을 버리고 존재가 바뀌는 거듭남을 사모해야 한다. 다만 사람들은 AD 연대를 살고 있고, 신약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관계로 자신이 율법과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과 거리가 멀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게 문제다. 늘 강조했듯이 예수님의 말씀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순간 율법이 된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기뻐하라고 하니 기뻐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율법이 된다. 항상 기뻐하려면 존재 자체가 기쁜 존재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노력으로 <항상>이라는 말씀을 지킬 방법은 사람에게 없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정체성을 보시는지 여기서도 알아채야 한다. 율법, 노력하는 것으로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걸 바로 깨달을 때 비로소 의로워지는 길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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