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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6-43)

도르가라 하는 여제자 다비다는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인데, 그런 그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그를 씻겨 다락에 누이고 베드로가 가까이 있다는 말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불렀고 도착한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이런 정황으로 볼 다비다는 신실한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역의 모든 과부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베드로가 왔을 때 그가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이며 그를 기념할 정도로 선행과 구제가 일상인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성경을 삶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병들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건 어쩌면 사람이 체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이 단지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일어나진 않는다. 하나님께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믿는 건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다. 주목해야 하는 건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나와 상관이 없으면 하나님께 어떤 능력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성경이 어떤 책이냐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이나 북한의 법령집(그런 게 있다면)이나 나와 상관없다는 건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그 뜻의 기본 주제를 알 필요가 있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는 주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살리겠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면 그게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다.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이 곧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도르가와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는 모두 성경의 이 주제를 설명하는 사건이다. 성경의 이 기적들을 그렇게 믿지 않으면, "이 시대는 왜 시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며 질문하고 학문적인 연구를 하는 꼴값을 떨게 된다. 그런 의문과 학습은 자기에게 구원이 없다는 걸 떠벌리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나의 구원이 다비다나 나사로와 같은 경험이란 걸 생각하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것

 

성경 속에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몇몇 일들은 형식적으로 보면 부활이지만 본질은 거듭남과 구원을 설명한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 다시 죽었고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영원한 예수님의 부활과 다르다. 그래서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부활을 설명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우리 모든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믿는다면 자신 역시 도르가와 같이 죽었다고 살아난 사람이라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은 왜 초대교회 같은 기적이 없느냐는 소리를 하고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도르가라 하는 여제자 다비다는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인데, 그런 그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그를 씻겨 다락에 누이고 베드로가 가까이 있다는 말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불렀고 도착한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이런 정황으로 볼 다비다는 신실한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역의 모든 과부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베드로가 왔을 때 그가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이며 그를 기념할 정도로 선행과 구제가 일상인 사람이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성경을 삶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병들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도하니 살아났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건 어쩌면 사람이 체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이 단지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 일어나진 않는다. 하나님께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믿는 건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다. 주목해야 하는 건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나와 상관이 없으면 하나님께 어떤 능력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성경이 어떤 책이냐는 것이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가 중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이나 북한의 법령집(그런 게 있다면)이나 나와 상관없다는 건 같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그 뜻의 기본 주제를 알 필요가 있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사람에게 전하는 주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살리겠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면 그게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이다.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이 곧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도르가와 야이로의 딸 그리고 나사로는 모두 성경의 이 주제를 설명하는 사건이다. 성경의 이 기적들을 그렇게 믿지 않으면, "이 시대는 왜 시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며 질문하고 학문적인 연구를 하는 꼴값을 떨게 된다. 그런 의문과 학습은 자기에게 구원이 없다는 걸 떠벌리는 것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나의 구원이 다비다나 나사로와 같은 경험이란 걸 생각하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는 것

 

성경 속에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몇몇 일들은 형식적으로 보면 부활이지만 본질은 거듭남과 구원을 설명한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 다시 죽었고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영원한 예수님의 부활과 다르다. 그래서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부활을 설명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의 다시 살아남은 우리 모든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오늘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믿는다면 자신 역시 도르가와 같이 죽었다고 살아난 사람이라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은 왜 초대교회 같은 기적이 없느냐는 소리를 하고 있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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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빠지지 않기를 간구하라고 하신 시험은 하나님의 시험이 아니라 마귀의 시험이다. 여기에는 마귀, 사탄, 귀신이라는 존재의 정의도 필요하다.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한 것도 마귀다. 마귀의 일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을 훼방하는 모든 요소고, 마귀의 시험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없다는 유혹이다.

 

마귀의 일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걸 방해하는 것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40일 금식을 하셨다. 그리고 금식을 마쳤을 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다. 그 시험은 세 가지인데 사실은 한 가지다. "육신을 가진 네가 어떻게 그리스도냐?"라는 것 하나다. 예수님께 요구한 세 가지 시험은 모두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요구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람 이상의 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게 마귀 시험의 실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유혹이 사탄의 시험

 

본질은 같지만 다르게 보이는 마귀의 시험이 있다. 그건 <십자가를 지는 것>을 훼방하는 것인데, 이것은 실로 교묘하고 정교하다. 베드로만 봐도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멋진 고백 뒤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 없다고 만류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책망을 들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생각은 마귀의 생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건 사탄의 생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므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분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고 믿겠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거듭나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믿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설교는 모두 마귀의 생각과 마귀의 시험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가 건져짐을 받고, 빠지지 않아야 하는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고, 보통 사람 이상의 역량을 보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를 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제 이 마귀의 시험이자 우리가 빠지면 안 되는 시험을 이야기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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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2-35)

베드로가 사방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성도들이 있는 룻다라는 곳에서 중풍으로 누운 지 8년이 된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난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너의 자리를 정돈하라고 하니 즉시 일어났고 이로 인해 그 지역에 사는 사람 모두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이므로 양립성이 있다.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이 같아야 한다. 서로의 생명 정체성이 같아야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유전자가 전혀 다른 동물 혹은 식물끼리의 교배로는 생식이 일어나지 않는 게 대표적이다. 성경에 일어나는 기적들이 참 놀라운데 어느 하나도 예외 없이 이 양립성이 존재한다. 병을 고치는 게 대표적이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병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종속된 치유다.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칠 때 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치신다"라는 말 역시 당연히 그렇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고쳐지는 병을 고쳤다는 뜻이다.

 

물론 애니아는 육신으로도 중풍으로 누워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육신의 질병이 예수 그리스도가 고치신 질병의 본질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게 육신의 질병을 고치러 오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중풍병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의 한 단면이다. 이렇게 보는 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는 올바른 시각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육신의 질병도 고치시지만 본질은 보지 않고 예수님께 기도하면 질병을 고쳐주신다는 것만 강조하는 건 바른 시각이 아니다.

 

이 블로그와 몇 권의 책에서 늘 성경 속 중풍은 단지 육신의 병이 아니라 정신이 육신을 지배하는 중풍의 특성으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정신이 육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중풍병자를 고치신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지 못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걸 설명하시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성경의 모든 질병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상태를 대변한다. 이를 예수님께서 고치시므로 결국 우리 육신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 수렴하도록 하는 게 예수님과 성령의 치유다.

 

많은 사람이 왜 지금은 사도행전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데, 이걸 알면 예수님의 치유, 사도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낫게 했는지가 보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고 체험하게 된다. 이 체험이 없다는 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곧 우리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시는 사도행전의 기적을 체험하지 않고, '왜 지금은 그런 기적이 없느냐?'라는 질문을 주고받는다는 건 명백히 구원이 없는 증거다.

 

사도행전의 기적이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고 질문하는 사람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은 구원이 없는 사람이다.

 

정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는 건 육신이 아니다. 육신은 비유자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낫게 하시는 건 사람의 정체성이다. 죄가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는 의미의 단어인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결국 본질은 구원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픈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사는 육신이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은 상태는 정신이 육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중풍과 같다. 육신은 병이지만, 영혼으로 보면 사망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잊으면 안 된다.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다. 세상의 법과 기준으로 볼 때 전혀 경쟁력이 없고, 수용할 수 없는 죄인인 예수님이 인생의 정체성을 낫게 하시는 분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념 속 예수님이 아니다. 그런 예수는 육신의 병을 낫게 하는 게 목적인 무당의 한 부류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했다. 자리, 곧 정체성이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그 정체성의 자리를 물으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리를 바로 정리하는 것, 곧 인생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바로 잡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고, 우리의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시는 게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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