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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8)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믿었다. 그러나 역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므로 도망하여 루스드라와 더베라는 지방 인근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루스드라에서 본 앉은뱅이를 보니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걸 알아보고 그 앉은뱅이를 고쳐주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앉은뱅이가 일어서서 뛰어 걷는 것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자기들에게 오셨다고 소리치며 바울을 쓰스(제우스)라 칭하고 바나바를 허메(헤르메스 : 제우스의 전령이자 웅변의 신)이라 부르며 두 사람 앞에 제사를 지내려 하였다. 당연히 두 사람은 놀라고 사람들을 만류하였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 중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사람들이 있다. 좀 웃긴 표현으로 "영빨"있다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대했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해 보면 아닌 것 같은데,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가서 자신이 도모하거나 걱정하는 세상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묻고 헌금하고 오는 게 바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앉은뱅이의 육신이 회복된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 제우스라고 생각했다. 제우스는 사람이 조각한(설계하고 창조한) 신으로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신이다. 즉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보고 그 본질에 속하는 세상일과 육신과 삶을 주관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신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세상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우스라고 받든 것과 기도원에 있는 사람에게 세상과 육신의 일을 의지하는 건 같은 일이다.

 

영빨있다는 기도원에 가서 육신의 일을 의지하는 건 영빨있다는 사람을 제우스로 섬기고 제사하는 것

 

바울과 바나바는 이런 루스드라 사람들을 만류했다. 이때 바울 사도는 자신은 루스드라 사람들과 같은 존재라는 걸로 설득했다. 같은 성정을 가졌다는 게 같은 정체성을 가진 같은 존재라는 의미로 나에게 있는 은혜와 능력은 너에게도 있으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고 섬기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우선 바울 사도 역시 자기와 같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에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형제로서 서로 교제하는 사이가 되는 거지 어느 한 사람에게 경배와 제사를 드리는 관계가 아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우리 복음의 근간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분이라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다. 특히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과 창세기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말씀이 같은 의미라는 걸 알아야 복음을 바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할 형상 있는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형식이고 하나님의 내용인 셈이다. 이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고 정체성이다.

 

이런 관계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정의한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건, 형식인 우리 안에 우리의 존재 의미인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뜻이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다.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 역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재해서 주관하게 하시도록 순종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건 모든 인생에게 정한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섬기거나 경배하고 제사를 지낼 이유가 없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이건 제우스건 사람의 숭배를 받는 존재가 될 수는 없기에 극구 만류했다. 바울 사도가 루스드라 사람을 만류한 내면에 이런 이유가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이유는 앞서 우리 기독교 안에 이런 풍조가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해서고, 성령을 바로 알지 못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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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하나님의 권세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23. 08:30 Writer : 김홍덕

'권세'의 사전적 의미는 '굴복시키는 세력'이다. 다시 말해 상대를 굴복시키는 힘이나 능력이 권세다. 당연히 하나님은 전능자이자 유일한 신이므로 그가 굴복시키지 못할 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감동하는 순종을 사람에게 원하신다. 그래서 그 무한한 능력으로 사람을 직접 굴복시키시지 않고 사람이 스스로 순종할 수 있도록 세상과 사람을 경영하신다. 그게 진심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권세다.

 

하나님의 권세는 강제적이지 않고 사람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능력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십자가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권세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하나님의 권세는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하늘의 천군과 천사를 불러서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결박하러 온 군사를 물리칠 권능이 있음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그렇게 사용하시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므로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스스로 알고 고백하게 하게 하셨다.

 

십자가를 스스로 지신 예수님의 본성이 하나님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 가장 잘 보여준다.

 

이 권세가 하나님께 있으려면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사람이 고백해야 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처럼 사람의 인정과 고백이 아버지께 권세가 영원히 있게 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니다"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다. 역설적으로 사람이 그렇게 고백한다는 건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한 사람만이 권세가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있음을 고백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수적으로 사람의 선택이 필요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펼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 만물과 이치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선택은 전적으로 사람의 주권에 달렸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강제하시지 않는 뜻과 연결되어 있다. 이 부분은 저자의 다른 책 <질그릇의 선택>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로 선택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경영이 하나님의 권세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권세는 결국 우리의 권세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권세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처럼 또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한다. 십자가의 도를 듣고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한 사람은 경험적으로 어떤 것도 이 연결을 끊을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어떤 것도 이를 막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을 사람이 굴복시킬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창조되었기에 이를 금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굴복시키는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이므로 하나님처럼 강제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므로 상대를 굴복시킨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이유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나를 십자가로 이끌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를 바라봤던 백부장과 같은 고백을 끌어낸다. 사람을 굴복시키는 하나님의 권세가 이런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거듭난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는 권세가 있다.

 

이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 그리고 영원하다. 영원하다고 하신 건 하나님과 사람은 이런 관계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은 자신이 존재라는 걸 인식하는 이상,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스스로 순종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권세는 불변하기에 영원하다고 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되니 사람은 아들이고 아들이 존재하기에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존재인 이상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스스로 굴복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권세와 능력은 지속되니 영원한 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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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52)

말씀을 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와서 말씀을 전해 줄 것을 사도 바울에게 청했다. 그리고 그 다음 안식일에는 성의 거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모였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를 시기하고 나서서 바울 사도를 변박하고자 했지만, 사도 바울을 이기지 못했다.

 

이 일은 몇 가지 각도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으로 의로워진다는 믿음을 중심으로 한 역학관계다. 예루살렘이나 타지에 있는 유대인은 모두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 굽히지 않았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후에 향한 이고니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설교하고 전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충돌이었고, 끊이지 않는 저항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있다. 오히려 더 교묘하게.

 

유대인들의 저항은 일시적이지 않았다. 어쨌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는 사도 바울의 선교 일생에 끊임없는 도전과 저항이었다. 그리고 율법주의는 영지주의와 함께 지금까지도 복음을 왜곡하는 두 거짓 선지자이다. 이 둘은 외형상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점에서 뿌리가 같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는 영지주의와 함께 이단을 이끄는 쌍두마차

 

율법주의는 우리 육신이 부정하니 행위를 의롭게 해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영지주의는 육신은 구원의 대상도 아니고 어차피 안 되니 의미 없다는 주장이다. 결국 육신을 부정한 것으로 단정한 상태에서의 다른 해법일 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뿌리는 같다. 이것이 문제인 핵심적인 이유는 하나님은 다른 관점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사도 바울이, 영지주의는 베드로와 요한 등 예수님의 제자들이 끊임없이 경계하고 계몽했다. 여기서는 율법주의를 중점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영지주의나 율법주의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잘 이해했으면 한다.)

 

예로부터 사람은 언제나 의로워지려고 애쓴다. 그건 자신이 의롭지 않다는(부정하다는) 자책이 있다는 증거다. 그 죄책감은 아담에서 비롯되었다. 선악과를 먹고서 자기가 벗었다는 걸 부끄럽게 여긴 아담의 모습이 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리고 부끄러워 숨은 대상이 하나님이다.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다는 걸 안 것이다. 그래서 의로워지려고 한다. 다만 그 방법이 문제다. 사람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감추었고, 하나님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해결했다.

 

사람은 행동이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기준 역시 행동이다. 국가와 사회의 법도 아주 특수한 사안을 제외하면 행위 기준이다. 그래서 행위를 의롭게 하면 의로워진다고 생각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감춘 행위가 사람의 이런 속성을 대변한다. 하지만 행동은 내면이 드러난 것일 뿐 자아의 본체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을 상고해야 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행위나 외모를 보시지 않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 행위는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하나님의 별스러운 게 아니다. 이건 정말로 사람을 보는 지혜다. 사람의 행동은 정체성과 의식 그리고 무엇을 의로운 것으로 생각하는지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게 악하면 행위와 무관하게 악하다. 착하게 살아가는 간첩과 같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신다. 그래서 "어디에 있느냐?",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어디'라는 건 장소가 아니라 정체성이고, 누구라고 하느냐를 물으시는 건 어떤 관계인지를 물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정체성을 회복했는지가 모든 기준이다. 그 자리를 떠나면 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라고 한다. (죄의 원어 '하말티어''자리를 벗어났다'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행위를 의롭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 따라서 행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규정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 반대로 존재가 의로워지면 그의 모든 행위는 의롭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2:16)이나, 사랑이 율법의 완성(13:10)이라는 말씀은 모두 존재가 바뀌면 의롭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나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라는 걸 믿는 것'이고, 사랑이란 '하나님과 의미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을 알았다면 우리는 율법이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삶을 버리고 존재가 바뀌는 거듭남을 사모해야 한다. 다만 사람들은 AD 연대를 살고 있고, 신약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관계로 자신이 율법과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과 거리가 멀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게 문제다. 늘 강조했듯이 예수님의 말씀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순간 율법이 된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기뻐하라고 하니 기뻐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율법이 된다. 항상 기뻐하려면 존재 자체가 기쁜 존재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노력으로 <항상>이라는 말씀을 지킬 방법은 사람에게 없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정체성을 보시는지 여기서도 알아채야 한다. 율법, 노력하는 것으로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걸 바로 깨달을 때 비로소 의로워지는 길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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