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4

(18:24 19:7)

성령으로 받는 세례라는 의미의 성령 세례는 세례 요한이 가장 먼저 언급한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님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도행전, 성령을 받은 사도들의 시대에 성령 세례는 물세례와 명확하게 구분되었고, 이 구분을 18장 후반에서 19장 초반까지 성령 세례에 관해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이는 사도행전이라는 성경 자체가 성령의 역사를 증언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어떤 분이며, 성령을 받은 게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진정한 구원이란 성령을 받는 것이며, 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라는 걸 설명하는 게 사도행전의 의도며, 이 의도에 비추어 보면 결국 성령을 받는다는 게 성령 세례며 이것이 구원과 교회를 이루는 성도의 기본 정체성이자 출발이다. 성령 세례는 신앙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아니라 구원의 기본이며 구분이다.

 

성령 세례는 신앙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아니라 구원의 자격

 

그렇다면 성령 세례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앞서 글에서 먼저 설명하였는데,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본능으로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신앙의 단계를 굳이 나눈다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삶 -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삶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은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사는 삶을 말한다. 바로 거듭남이다.

 

신앙의 단계를 굳이 나눈다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 –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삶 -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삶

 

여기서 특히 구분해야 하는 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이게 뭐 특별히 구분할 것인가 싶기도 할 것이고, 우리가 믿는 예수는 당연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인데 별스럽게 군다 싶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베드로 사도도 이 둘 사이에서 죽을 정도로 고민하고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신앙을 비교도 할 수 없는 우리가 태연하게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 대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변화산에 오르시긴 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이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셨고,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고 고백해서 칭찬받았다. 그러나 이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했을 때 베드로는 만류했고,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베드로를 '사탄'이라고까지 하면서 책망했다.

 

베드로의 칭찬과 사탄이라고 하신 책망 사이에 있는 유일한 것 바로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

 

이 장면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큰 차이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는 별다른 감응이 없다. 성령 세례에 관심이 없다는 의미이자 성령 세례를 모른다는 뜻이다. 그건 사도행전이 의도하는 바에 비추어 보면 명백히 구원이 없다는 증거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이때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까지 깊은 갈등의 세월을 보낸다. 성경을 보며 베드로의 이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게 무엇인지 고민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가 빌라도의 뜰에 가서 확인하고자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왜 사람들에게 심판을 받아 낮은 자리로 끌려가는지를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엠마오로 도망갈 정도로 이걸 알 수 없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그리스도로 전하는 베드로의 변화는 아주 중요한 전환

 

그랬던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니 사람들 앞에 일어서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담대하게 전했다. 이 한 사도의 변화가 성령이 누구신지, 성령강림과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된다고 한 게 무엇인지 설명한다. 이뿐 아니라 사도 바울 역시 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걸 전하므로(13) 사도들이 그를 사도로 인준했다.

 

지금은 어쩌다 그저 상용구가 되어버린 "십자가에 달린 예수"라는 이 한 표현은 극한 순교를 당하면서도 전한 사도들의 복음 중의 복음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나의 그리스도인지 아닌지가 나의 구원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하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고, 성령으로 잉태된다. 예수님께서도 이 일이 우리에게 있기에 가시는 게 우리에게 유익이라 하셨고, 성령이 오셔서 이 비밀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성령 세례와 구원을 받은 것

 

그러므로 이걸 모른다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면 당연히 성령 세계를 체험했으니 자기 안에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너무나 상식적으로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성령 강림이 무엇인지와 성령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성령이 알게 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알 수밖에 없다.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면, '십자가에 달린'이라는 표현이 이토록 중요한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건 당연히 구원받지 못한 신앙이다. (다음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이야기 해 보자.)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2024 주기도문) 아버지께 영원히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11. 8. 10:34 Writer : 김홍덕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간구하는 기도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니 아버지께 아들이 구하는 기도라는 뜻이다. 여러 내용이 있지만 결국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구하는 게 주기도문이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 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빚(debt)을 외면한 죄가 사하여져 땅인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다. 이는 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를 구하는 기도다. 기도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의가 삶을 통치하는 나라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이 나를 창조한 목적인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내 육신, 육신의 삶이 되기를 구하는 것이 주기도문이다. 이를 알기 위해 하늘이 어떤 곳인지 이야기했고,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와 죄 그리고 죄 사함을 설명했다. 이처럼 주기도문의 모든 내용은 나를 위한 것인데 주기도문의 마지막에는 그 모든 간구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으로 바뀐다. 그것도 영원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간구가 된다.

 

이는 주기도문의 모든 간구는 사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회복이다. 하나님께 간구한 사람의 기도가 사람에게 이루어진다는 건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뜻하신 의가 이루어지니 그 위엄과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고, 사람은 자기 존재의 목적이 이루어지니 주기도문은 어느 한쪽만 유익이 되는 간구가 아니라 동시에 서로를 유익하게 하는 기도다.

 

우리에게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동시 이행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건 놀랍게도 영속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영원하다는 뜻이다. 아버지와 아들이란 관계는 한 번 맺어지면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관계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기도문 내 하나님의 호칭은 '아버지'. 사람들은 영원을 단지 시간의 개념 중심으로만 생각하지만, 실상은 상태다. 물론 당연히 시간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영원은 시간과 함께 지속되는 상태의 영속성이다. 하나님의 뜻이 삶으로 표현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상태가 시간과 함께 이어지는 영속성이 곧 영원이다.

 

영원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나는 아들이 되는 관계의 불변성이자 상태의 연속성이다.

 

주기도문의 간구가 나에게 이루어지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된다. 따라서 하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영원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 것이 된다.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를 구하는 간구도 함께 이루어진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사도행전) 54 – 물세례 성령 세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11. 7. 10:49 Writer : 김홍덕

(18:24 19:7)

바나바와 다투고 갈라선 후 실라와 함께 시작(15)한 바울 사도의 2차 선교 여행은 18장에서 마친다. 이 끝무렵에 아볼로를 만난다. 그런데 성경에 능한 아볼로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이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하나님의 도를 더 설명하므로 아볼로가 성령 세례를 알게 된다. 성령이 임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 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볼로만이 아니었다. 바울이 잠깐 들른 에베소에서 온 제자들도 아볼로처럼 같이 성령 세례를 알지 못했다. 이에 바울 사도가 예수의 세례를 전했더니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하고 예언도 했다. 이때 바울 사도는 이들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다. (후일에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책망할 때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많이 베풀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기며 몇몇만 세례를 행했다고 했는데, 그들이다)

 

우리는 세례가 물세례와 성령 세례 혹은 불세례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명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이 차이를 분명히 모른다는 건 단지 이해의 부족이 아니다. 그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증거다. 자기가 물세례와 성령 세례 모두를 받았다면 너무나 당연히 그 둘의 차이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세례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영역이다.

 

성경에 나오는 세례에 관한 언급을 바탕으로 정의하면 물세례는 세례 요한의 세례로 정의된다. 또 하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면 몸을 씻은 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에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 베드로가 몸을 씻겨 달라는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몸을 씻은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말씀에 나온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물세례와 성령 세례의 구분점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몸을 씻은 자는 물세례를 받은 것이고, 발을 씻은 자는 성령 세례를 받은 것

 

세족의식과 세례의 구분은 연관성이 부족해 보인다. 그런데 베드로의 변화를 살피면 몸을 씻은 자와 발을 씻은 자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과 받은 사람의 차이라는 걸 확연히 알 수 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령 세례, 불세례 혹은 예수의 세례가 어떤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과 베드로의 변화를 통해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실 당시 온 몸을 씻었다는 베드로의 상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에 후일에 성령이 임하신 후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믿고 전했다는 걸 고려하면 몸을 씻은 자와 발을 씻은 자의 차이를 알 수 있는데 그 결정적 차이가 성령이다. 즉 성령 세례가 어떤 것인지 세족의식 때 예수님의 말씀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두고 모두 도망갔다는 점에서 같아 보이지만,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포함한 11명의 제자는 전혀 다르다. 마지막 유월절 만찬 그러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예수님께서 몸을 씻은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시면서도 가룟 유다를 염두에 두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하셨다. 가룟 유다는 발만 씻으면 되는 상태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 차이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믿음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게 예수님을 믿는 전부가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다. 모든 복음서 마지막 부분에서 제자들의 심리가 깊이 있게 기록되었는데, 그들 변화의 구분과 핵심은 성령이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건 믿었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건 이해하지 못했다. 여러 차례 설명한 대로 성령은 이걸 알게 하시는 분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탄생을 두고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말하는데 또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건 예수님은 우리의 표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잉태와 정체성은 곧 우리의 거듭남과 정체성이다. 이걸 모르면 성령 세례를 모르는 것이다.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성령이 오시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이건 기독교 신앙에서 너무 중요한 포인트인데, 이게 거의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

 

신학을 <공부>한 목사에게 들은 설교 속에는 성령이 없다.

 

이는 신학교 나온 목사들에게 설교를 들은 이유가 가장 큰데, 이유는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학문으로 공부하고 스스도로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런 사람의 말을 듣고 성령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건 너무나 상식적인 논리다.

 

 

다시 물세례와 성령 세례로 돌아와서 우리는 이제 성령 세례를 더 명확히 이야기 해 보자. 불세례 곧 성령 세례의 본질은 성령강림이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이 임하는 게 어떤 것인지 엄청나게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아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사람들은 그렇게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즉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성령이 임한 변화를 겪은 사람이라면 성경이 이를 얼마나 많이 그리고 상세히 말씀하고 있는지 알 것이고, 그렇다면 이를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은 성령을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한 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

 

성령 세례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진다는 걸 믿고 이해하고 자신도 그런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데 순종하게 변화되는 것이다. 그것도 신념이나 노력이 아니라 본성에 의해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게 성령 세례다. 그렇다면 구분도 명확하다.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예수님처럼 되려고 할 뿐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걸 오히려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본성에 의한 순종이 아니라 자기 노력 곧 행위로 이루려는 순종이다. 그건 순종도 아니고 거듭남도 아니며 그리스도도 그리스도인도 아니다.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일련의 기적을 성경은 거듭나는 것이라고 분명히 그리고 여러 번 말씀하신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게 그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 그리고 그 거듭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오히려 세상에서 낮아져서 자기 육신을 수고하는 자리에 내어주는 본성으로 사는 존재로 생명이 바뀌는 게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게 성령 세례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게 바로 성령 세례

 

아볼로나 에베소 지방의 사람들이 몰랐던 성령 세례도 이것이다. 그들이 몰랐다는 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건 믿지만,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 세상 가치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게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라는 건 믿지 못하는 상태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건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을 산다는 의미다. 다시 한번 이건 노력의 영역이 아니라 그런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다시 나서 그 생명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 세계의 이야기라는 걸 분명히 해 둔다.

 

성령 세례는 생명을 바꾸는 것, 노력으로 이를 수 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건 위험이나 손해를 앞장서서 감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모두가 동격 혹은 같은 상황에서 나서는 일이지만 더 의로울 뿐 아니라 하나님 아들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 그것도 그런 상황이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것이 그 사람 인생의 목적이고 의미며 감사와 기쁨인 생활 그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며, 성령 세례를 받은 삶이다.

 

이 삶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처럼 세상에 없는 진리다. 세상에 없다는 건 세상의 가치를 의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의 세계에 없다는 뜻이다. 거듭난 사람들에게 이건 일상이고 상식이며 어린 생명도 다 이해하는 세계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자신이 그 세계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그냥 교리가 그러니까, 교회에서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로 알고 살아간다. 큰 낭패에 빠지는 건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새겨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오늘 나는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돌아보는 게 중요하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면 이 구분은 반드시 명확해야 한다. 이건 기억의 문제조차 아니다. 생명의 본성에 관한 문제다. 사람은 자기가 사람이란 걸 인식하듯 성령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로 거듭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이 그렇다는 걸 안다. 더욱이 이건 생명으로 난 것이기에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다.

 

지금 나는 과연 그런 사람인가?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