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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2 – 기적을 행하는 능력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5. 21. 16:28 Writer : 김홍덕

(3:1-10)

유대인들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 성전에서 걷고 뛰게 한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놀랐지만, 베드로는 자신과 요한의 권능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일은 오히려 유대인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온 선지자들이 말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임을 전한다. 그리고 이 예수를 믿을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의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베드로의 이 설교는 기적의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한다. 베드로의 이 설교가 필요한 이유는 기적의 원천에 관한 사람의 생각과 베드로의 설교가 다르기 때문이다. , 기적의 원천이나 동력에 관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건 결국 구원의 차이다.

 

사람은 앉은뱅이가 걷게 되는 기적은 초인적인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보다 초월적인 존재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당연히 하나님도 그런 분으로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그런 초월적 존재 중에서 다른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그런 존재가 구원을 베푼다고 믿는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람의 그 기준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오히려 능력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외면하고 오히려 가난을 해결하는 건 그리스도의 직임이 아니라고 말하기에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믿음이 앉은뱅이를 걷게 했다고 설교한다. 우리가 베드로의 정체성을 부인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 말은 곧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사실 오늘날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믿음도 과거 유대인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 기적이라면 보이는 세계의 상식과 과학을 넘어서는 신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타나고 육신으로 인지하는 세계를 본질로 믿기에 그 본질에 초인적 영향을 끼치는 능력을 기적이라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능력을 주관하는 분이라고 믿는다. 가난을 해결하고,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예수,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대로 기이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 하는 예수는 그런 예수가 아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는 그런 예수가 고친 게 아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기적은 육신의 질병을 고친 게 본질이 아니라,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영혼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능력이고 기적이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믿음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기적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나사렛 예수, 세상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는 전혀 메시아가 될 수 없어 건축자가 버리는 돌 같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자기가 이런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과연 그런지는 재고해 봐야 한다.

 

선한 존재가 나올 수 없는 나사렛에서 온 예수를 믿는다는 건 놀랍게도 우리 자신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믿는 믿음의 근거다.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의미라는 걸 믿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이 생각에 늘 조심스럽다.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나, 죄가 없으신 예수님의 정체성 그대로 우리도 죄가 없다는 걸 믿는 믿음이 부족하다. 기도할 때 마다 회개하는 게 그 증거다.

 

앉은뱅이를 고친 하나님의 능력은 다음 아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뻐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사람이고 예수님과는 다르니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겸손 같은 불신은 성전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늘 회개해야 하고, 행여 하나님께 무언가 잘못하거나 하나님께서 내가 생각지도 못한 죄가 내 행동에 있다고 책망하실까 두려워한다. 교회에 가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 증거다. 가지 않으면 벌을 받는 곳이 기쁨의 장소라고 말하는 건 정신 승리일 수는 있지만 신앙고백은 될 수 없다.

 

나사렛 예수를 믿는 믿음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

 

우리에겐 정말로 나사렛 예수가 앉은뱅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앙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뻐하는 신앙으로 바꾼다. 이건 단순한 경험의 변화가 아니다. 이건 정체성의 변화이자 존재의 변화다. 즉 생명이 바뀌는 변화다. 이걸 성경이 거듭남이라고 한다. 베드로 이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멸망에 빠지지 않고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나 자신을 순종하느냐가 우리의 구원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 3: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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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나라가 임하옵시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5. 17. 22:14 Writer : 김홍덕

나라는 ''의 공동체이자 ''가 다스리는 영역이다. 민주주의를 따르는 사람들과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각 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국가의 의가 되고, 사회주의가 사회주의 국가의 의가 된다. 이는 비단 민주주의, 사회주의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어떤 나라든 나라를 다스리는 의가 그 나라의 정체성이 되고 국민을 결정한다. 그 의가 효력을 발휘하는 지경까지가 그 나라다.

 

나라는 의가 다스리고 그 효력이 미치는 지경

 

나라는 사람이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게 표면적 형식이다. 하지만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나라가 사람에게 임한다. 나라에 속하는 순간 그 나라의 의와 통치가 자신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나라가 임하옵시길 구한다는 건 바로 그렇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의 삶이 되기를 바라는 게 바로 나라가 임하옵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이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속하는 것이자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건 하나님의 의가 내게 임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가진 하늘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가지신 의가 내게 임하는 게 곧 하나님 나라가 나에게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과 같은 법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건 곧 말씀이 나의 육신이 되는 것

 

예수님께서는 이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다만 이런 예수님의 주문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다. 세상 나라들은 사람의 의지와 선택으로 여권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법을 따르므로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생명이 바뀌는 걸 거듭난다고 말하고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잉태된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사람의 가장 큰 오해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간다는 믿음과 생각이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할 기도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이 되기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으로 사는 동안 가는 곳이다. 천국은 죽어서가 아니라 살 동안 누리는 곳이며, 살 동안 누리지 못한 천국에 죽어서 가는 법은 없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말씀을 통해 살아 있는 동안 천국에 속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기회를 가진 동안 하나님의 의가 내게 임하기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 의는 다른 게 아니라 앞서 구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의다. 하나님이 가진 인생을 주신 목적, 그것이 임하기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그 의가 내게 이루어지는 게 곧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천국에 속한 것이고,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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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 – 금과 은 나 없어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5. 14. 13:21 Writer : 김홍덕

(3:1-10)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성전에 들어가려는데 앉은뱅이가 구걸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고쳐 걷기도 하고 뛸 수도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고, 어릴 적부터 노래로도 불렀던 기적의 사건이다. 아주 유명한 말씀인데 여기서 두 가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했을까?'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의 경계를 넘어선 앉은뱅이의 모습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나 걸으라 하고(행 3:6)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했는지다. 생계를 위해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바라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금과 은으로 대표되는 돈이다. 이런 그의 바람에 대해 금과 은이 아니라 내(베드로와 요한)가 가진 것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 되는 것이다. 금과 은의 대척점에 나사렛 예수를 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금과 은의 대척점

 

유대인들에게 나사렛은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곳으로 낙인찍힌 곳이다. 선한 것에 나올 수 없다는 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인데, 이건 지명만 한정하는 게 아니다. 신분이나 학력이나 경력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설교를 해?"와 같은 것이다.

 

베드로가 가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이다.

 

생각해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나사렛 출신이라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서, 세리와 죄인과 창녀와 먹고 마시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신성모독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런 예수를 지금 베드로는 금과 은의 대척점에 두고 그것이 내가 금과 은 대신에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앉은뱅이에게 말하고 있다.

 

이는 후에 완치된 앉은뱅이가 솔로몬 행각에 나타나자 놀란 백성들에게 한 베드로의 설교에 그대로 녹아 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예수를 너희가 금과 은을 귀하게 여기는 기준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이를 회개하라고 외쳤다.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하면 유쾌한(새로운) 날이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라 전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세상의 가치 기준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을 믿는 믿음을 권면한다.

 

다음으로는 앉은뱅이의 위치 변화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떤 변화를 전후로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는지가 핵심이다. 표면상으로는 베드로에게 임한 기적 같은 능력이지만, 실상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금과 은이 아니다. 베드로도 이 기이함에 주목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 주목하라고 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가게 된 건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금과 은으로 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선함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 나사렛에서 온 예수의 정체성을 얻었더니 성전 앞에서 더 들어가지 못하고 앉아 있어야만 했던 앉은뱅이가 성전 안으로 들어갈 뿐 아니라 걷고 뛰며 기쁨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앉은뱅이를 기준으로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상황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이 앉은뱅이와 우리 자신을 비교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성전에 들어가서 기뻐하며, 감사헌금을 드리는 이유와 이 앉은뱅이가 기뻐하는 이유를 비교하면 어떤지를 반추해 보자. 자녀가 입학이나 취직했다고 기뻐하며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이 기뻐하는 이유가 앉은뱅이가 기뻐하게 된 이유와 같은지는 쉽게 비교가 될 것이다.

 

앉은뱅이는 걷지 못했다는 건 행함이 없는 믿음이었고, 성전으로 들어갈 힘과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다. 앉은뱅이가 금과 은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구걸할 때는 성전에 들어갈 힘이 없었다. 그러나 선한 게 날 수 없다는 나사렛에서 온 예수의 정체성을 믿었더니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귀한 게 없을 때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나사렛 예수를 믿었더니 들어가게 되었다.

 

앉은뱅이가 성전 문턱을 넘을 수 있었던 건 나사렛 예수의 이름

 

앉은뱅이의 기뻐하는 모습은 우리가 성전에 들어가는 동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또 우리가 성전에서 어떤 이유로 기뻐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금과 은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는 정체성, 그 하나를 믿는 믿음으로 기쁨이 있는 성전 문턱을 넘을 수 없었던 앉은뱅이 같은 신앙이 성전 문턱을 넘고, 그렇게 넘어선 성전은 기쁨이 되었다. 교회에 가서 세상이 귀하다는 걸 얻기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또 헌금이 없어도 나사렛 예수라는 그 정체성 하나로 기뻐하는지를 반추해 볼 시간이다.

 

우리가 성전에서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사렛은 사람의 기준이다. 선한 게 나올 수 없는 지경과 구분, 차별을 말한다. 죄인들의 소굴에서 하나님 아들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고, 신학이나 경건한 훈련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생각의 상징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다. 사람이 설정한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기준과 다른 그리스도다. 금과 은으로 그 귀함을 매길 수 없다.

 

금이나 은 같은 세상 가치로는 선한 게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는 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

 

우리는 그 나사렛 예수로 인해 성전에 들어가고, 성전에서 기뻐해야 한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믿어야 한다. 금과 은으로 대변되는 가치 없이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우리를 성전 미문에 주저앉게 만드는 가치관을 이기고 들어가 기뻐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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