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난 주간이다. 기독교인들에겐 1년 중 가장 경건히 보내려고 노력하는 일주일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행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부터 부활하실 때까지 1주일이 고난주간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 기간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걸 말씀하신 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유명한 고백을 한 직후다. (마 16장)
고난주간을 기념하는 이유는 십자가에 우리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 고난주간을 가장 의미 있게 기념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을 믿고 은혜로 여기는 만큼 대개는 십자가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의미를 잘 새기면서 기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변수가 하나 있다.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 사건은 결론을 알고 보는 영화처럼 ‘사후 확정 편향’ 혹은 ‘정경화된 인식’ 영역에 속한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건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오순절 성령이 오실 때까지 믿지도 인정하지도 이해도 못하는 사건인데, 오늘 우리는 <십자가 = 구원>으로 너무 쉽게 정의한다. 이 상황은 십자가 은혜의 본질 이해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비스센터에서 화가 난 사람은 “여기 책임자(높은 사람) 누구야?”라고 소리 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겪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능력 있고 높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가능한 자신도 그런 위치에 오르려고 한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문제를 잘 겪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겪는 사소한 일들도 이런데 하물며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어떨까? 정말로 <십자가 = 구원>이라는 걸 교리문답 하나로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자신을 세상을 구원하러 온 빛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면서 그걸 충분히 증명할만한 능력을 보이시던 예수님께서 자기가 말한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걸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이렇게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사회를 개혁하겠다고 정치적으로 외치고 역량을 보여주던 사람이 자기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감옥에 가야 한다고 말하면 그를 계속 지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탄이라고 책망했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예수님을 만류하는 베드로를 우습게 본다. 마치 자기는 이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알기 때문에, 또 베드로가 책망 받는 것을 보고 깨달었기 때문에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 이 완전한 자기 모순을 신앙이라 착각하고 있다.
오늘 누군가가 어떤 서비스센터에 가서 가장 기술이 좋은 사람이나 센터장과 면담하면서 “오늘 들어온 신입 사원에게 가야 문제가 해결되겠군요”라고 말한다면 누가 그걸 정상으로 보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주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겠다는 건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상식과 가치에 역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그 십자가가 자기를 구원했다는 교리만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데, 정말로 자기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낮은 자리로 가야 한다고 믿는지는 의심스럽다.
우리는 정말로 낮아질 때 세상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고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세상은 구원은 차치하고서라도 자기 문 해결을 위해서는 능력과 권세가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 사람이 낮아지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이 세상의 구원이라는 걸 이렇게 쉽게 믿는다는 건 깊이 의심하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 사안이다. 높은 곳에 오르는 걸 세상을 이긴 것이라는 게 유전자에 새겨진 인간에게 낮고 천한 십자가가 구원이라는 걸 믿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스스로를 깊이 반추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낮고 천한 자리에 이를 때 구원(과 문제 해결)이 있다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일이다. 우리 믿음을 견줄 수도 없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믿지 못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도마처럼 의심하고 베드로처럼 엠마오로 도망갔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렇게 쉽게 십자가를 믿는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건 책망이나 현실 자각을 계몽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 믿음을 돌아보자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걸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은혜였다는 걸 믿는 건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며, 구원의 전부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을 표현할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원래는 쉬운 일이었는데, 목적에 스스로 순종하는 걸 결정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을 인생을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훔치고 자리를 멀리 떠났기에 어려워진 일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나의 본성이 되는 게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아져야 세상에서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고 있는지를 반추하고 하나님께 세상에서 높아짐으로 세상을 이겨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게 사순절에 십자가를 묵상하는 올바른 묵상이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의심이 든다면 양심을 가지고 자기를 고백하고, 낮아지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것이 고난 주간을 보는 올바른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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