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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42)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믿는 사람이 불어나며 사람들이 교회를 칭찬하자 대제사장 및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앞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풀어주면서 다시는 너희의 교를 전하지 말라고 나름의 경고를 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사도들로 인해 병든 사람이 치유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이 늘어나자,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 사도들을 잡아 투옥했다.

 

그런데 사도들을 투옥한 일은 일반적인 상황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자가 능력으로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빼내어 성전에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였다. 이런 신비한 일을 보면서도 제사장과 무리들은 다시 사도를 잡아 가두려 했지만, 백성들이 사도와 교회를 따르는 연고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게다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그들을 진노하게 만들기 충분했고, 결국 어떻게 사도들을 죽일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고 사도 바울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흥분한 제사장 무리에게 간단한 논리로 사도들 핍박하는 걸 저지한다. 그 간단한 논리는 사실 너무 단순하다. 복음이 하나님의 일인데 핍박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고, 복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면 스스로 소멸할 거라는 논리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믿음이 얼마나 상식적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눈앞에 보이는 일을 바라보는 당연히 가말리엘 같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경영이라고 믿는 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한 뿌리다. 이걸 부인하거나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건 모순을 넘어 거짓된 신앙이다. 내 앞에 펼쳐지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건 정의가 아니라 불신이다. 잘못된 게 있다면 그건 세상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정의 개념이다. 성경은 이걸 선악과라 한다. 하나님께서 실수도 없이 경영하시는 세상이 모순이라고 투쟁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는 악이고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배 드릴 때 대표 기도하는 사람이 간혹 하나님께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아 달라고 간구하는 걸 들을 수 있다. 사실 '간혹'이 아니라 아주 자주 듣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런 기도 전후에 고백하는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서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고, 또 하나님을 실수도 하지 않는다며 찬양도 늘 부른다는 것이다. 실수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나님께 바로 잡아달라 기도하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논리임에도 어느새 그게 거룩함이 되어 있다. 말 그대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형태 그 자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 범위를 넓혀 성경(의 일부)을 기반으로 한 종교들의 믿음은 이처럼 모순적인 게 많다. 당장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았으므로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믿으면서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는 건 완전한 모순임에도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매일 회개해야 하는 사람, 그것도 불안해서 앞으로 지을 죄까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죄가 없어야 가는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성경의 근간을 부정하면서 성경대로 살려고 한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베드로와 사도들의 기적을 보고 그들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제사장 무리들을 비난하고 타산지석을 삼으려 한다. 이걸 도무지 어떻게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이성을 가진 사람의 고유한 영역이다. 사람이 가진 역량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사람이 문자를 알기 때문에 성경이 기록되었고, 말을 할 수 있어 복음이 전파된다. 같은 맥락에서 상식과 이성과 논리가 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이건 믿음이 아닌 논리나 상식으로 하나님을 믿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성이 없고 논리가 없다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이성과 논리로 하나님이 인정되지 않는데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걸 믿는다면 세상이 온전하다고 믿어야 한다는 논리 없이 하나님의 경영을 믿을 수는 없다.

 

가말리엘의 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믿자는 설득이 아니다. 사도들의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거라면 핍박하면 안 될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면 스스로 망할 거라는 게 얼마나 상식적이고, 논리적인가? 전능하시고 실수도 없으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할 게 아니라고 판단하는 상식을 회복하자는 게 믿음이 아닌 상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자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오늘 평범해 보이는 가말리엘의 사고 방식으로 우리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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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 있다는 것과 하늘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걸 이야기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거룩한 이름으로 여기는 게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나의 삶이 되는 것임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임도 이야기했다. 이어서 우리는 이 모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듯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말씀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관계는 하늘이 정하고 변하는 대로 땅이 순종하는 관계다. 하늘이 봄이 되면 땅에 꽃이 피고, 하늘에 비가 내리면 사람은 우산을 쓴다. 사람이 우산을 쓰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관계가 아니다. 누가 그렇게 주장하면 비웃음을 살 것이다.

 

누군가 우산을 쓰면 비가 온다고 말하면 웃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늘에 호소하면 하늘이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호소하면 하늘이 바뀔 것이라고 믿고 억지를 부린다. 그건 분명 사람이 우산을 쓰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는 것과 같은 논리 구조인데도 아무도 그것을 가지고 웃지 않고, 오히려 그걸 신앙이라 말하고 더 간절히 그렇게 믿을수록 믿음이 좋다고 말한다.

 

땅은 사람이다. 흙으로 빚어진 사람은 땅이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고 사람의 존재 목적이며 창조 이유와 목적이다. 따라서 언제나 하늘의 뜻이 땅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호소가 하늘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도 이 구조 안에 속한 약속이지, 사람이 자기 존재 목적이 아닌 육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흙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이다.

 

사람은 하늘이 사람의 정체성을 정하는 주체로 인식하고 있기에 하늘은 하나님이다. 사람의 정체성,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는 하나님이 정한다. 따라서 하늘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이루어져 있다. 남은 건 그 뜻이 땅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신 건, 하나님이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기를 구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은 이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가지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땅인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과 같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

 

예수님은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러 오신 분이다. 사람에게 하늘의 뜻인 창조한 목적을 알리러 이 땅에 오셨다. 사람이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한 뜻에 순종하여 그 뜻대로 사는 존재가 되는 본을 보이러 오셨다. 그게 사람에게 구원이다. 존재인 사람은 존재 목적을 회복하는 게 바로 구원이다. 사람들은 육신으로 살며 겪는 각양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로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리러 오셨다. 존재가 목적을 회복하면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된다.

 

사실 사람이 겪는 모든 문제의 출발은 사람이 자기 자리를 떠나서 발생한다. 자기 자리를 떠난 상태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를 벗어나나 상태에서의 삶은 모든 게 문제이고 죄다. 망치로 두부를 자르려는 시도처럼 자기 존재 목적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에 저항과 문제를 겪는다. 그게 사람이 말하는 인생의 고난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자리를 벗어난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사람의 자리를 보이시러 오셨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 회복하면 모든 게 평안해진다는 걸 알리러 오신 분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람의 자리, 사람의 모습은 바로 십자가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베푸신 사람의 구원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는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신 방법은 몸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되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이시는 방법이었다. 바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래서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니 밑에 있는 사람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말하고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미운 오리 새끼가 하늘 나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인 걸 알고 날아오르게 되는 것처럼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리시니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한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표상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처럼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오셨고 모든 사람에게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게 바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이것을 구하라고 하셨다. 하늘의 뜻이 땅, 곧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심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그 기도의 실체이고, 사람은 그 기도를 통해 존재의 목적을 회복하는 구원을 얻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실체

 

여기서 우리는 왜 하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하늘에는 있지만 땅인 나에게는 나의 존재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평생을 살며 자기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 자기 존재의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핸드폰을 사는 사람이 핸드폰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듯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우리의 존재 목적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진 우리를 향한 뜻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구원이고, 주기도문의 목적이고, 우리가 기도해야 할 유일한 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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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16)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서 심문을 받았고,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했으며, 성도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데 필요를 충당했다. 이 사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의 필요를 자기 기준으로 계산하다 심판을 받아 죽는 일도 있었다. 교회와 사도들과 성도들의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를 계속 보여 주었다.

 

특히 사도들의 능력은 병 고치는 것으로 많이 나타났다. 하지만 능력에 관해 더 본질적인 사람의 견해는 교회와 성도들을 칭찬했다는 것이다. 능력으로 병이 낫는 것도 분명 놀라운 일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 건 성도들의 삶이었다. 사람은 칭찬할 만한 일을 동경하고 자기도 동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의 능력이 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삶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사람이 스스로 믿음을 가지기를 소망하도록 하는 능력이 복음을 온전하게 전한다. 성경이 말하는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 속의 '강권'은 사람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 이상의 강권은 없다.

 

교회의 능력은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싶도록 만드는 것

 

사도들의 능력으로 여러 가지 질병들이 나았다고 했다. 그중에서 특별히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이 나았다는 말씀을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귀신 들린 걸 흔히 정신병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데, 성경은 그런 의미로 귀신 들린 자의 회복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귀신이 들렸다는 건 자기 머리, 자기 생각, 자기 의를 정체가 불명한 존재에게 빼앗긴 상태다. 사람이 자기 본질과 존재 목적을 망각한 상태를 총망라한 표현이다.

 

귀신 들렸다는 건 자기 정신과 존재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

 

사람들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존재를 귀신이라고 한다. 귀신은 정체불명의 존재다. 성경이 공중 권세 잡은 자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공중은 좌표나 공간의 거처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존재들을 총칭하는 말이 귀신인 셈이다. 이런 귀신에게 머리를 빼앗겼다는 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귀신 들린 상태를 고쳤다는 건 자기 존재 정체성을 회복했다는 말이며, 이는 교회가 간구한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귀신 들렸다는 건 자기 존재 목적을 벗어난 가치관과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상태다. 기계를 고칠 때 용도와 목적에 맞지 않는 부품이 있으면 설사 그 부품에 정확한 규격이나 명칭이 있고 심지어 아주 비싼 것이어도 정체불명의 부품이 있어 고장 났다고 한다. 귀신 들린 게 무엇인지 설명하는 상황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걸 추구해도 모두 귀신 들린 삶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사랑은 의미 있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헌신과 애정인 만큼 하나님께서 창조한 목적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의미 있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없이 목숨을 내어 주어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게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아닌 걸 추구하는 모든 삶은 귀신 들린 괴로운 삶

 

결론적으로 귀신은 더럽고 괴로움을 준다. 목적에 맞지 않는 부품은 거저 더러운 쓰레기와 같은 폐기물일 뿐이듯, 사람이 자기 존재 목적을 벗어나서 목적 기준으로 정체가 불명한 것을 추구하며 살면 재벌 회장으로 살거나, 국가 원수 혹은 거룩한 신부나 목사로 살아도 목적을 기준으로 소용없는 삶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을 '()'라고 뇌까린다. 그러니까 더럽고 괴롭게 하는 귀신 들린 삶에서 고침을 받는다는 건 인생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바꾸는 건 곧 거듭남이다. 존재에게 있어 목적이 바뀌는 건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이 되는 것과 같다. 자기 존재 목적이 아닌 정체불명의 귀신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던 인생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건 거듭남이다.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병 낫는 것에 비하면 생명이 바뀌는 건 비교도 안 되는 더 큰 기적이다. 성경의 진정한 기적은 사람의 거듭남인 이유다.

 

귀신 들린 데서 고침을 받는다는 건 곧 <거듭남>

 

또한 인생의 목적이 회복된 삶은 괴롭지 않다. 삶의 불편이 해소된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감기가 들면 거듭난 사람이라도 괴로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삶을 바라보고 용납하는 마음과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이다.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치유는 이것이다. 이렇게 귀한 걸 두고 고쳐도 어차피 죽는 육신에 임하는 기적에 매몰될 게 아니다. 무엇을 귀하게 볼 것인지를 아는 안목이 바로 밝음이다. 빛이 있으라고 하신 그 빛이 바로 이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이치를 넘는 기적이 아니라 거듭남이듯이,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의 기적 역시 과학과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행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임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모인 곳이 진정한 교회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을 위해 헌금이 모이는 곳이다. 이렇게 깔끔하게 연결된 성경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빛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적을 바라는 게 진정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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