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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간증하는 사람들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4. 5. 1. 11:58 Writer : 김홍덕

지금은 잦아들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7, 80년대 기독교는 부흥 집회가 넘쳐났었다. 소위 '영빨' 있다는 사람들이 전국 교회를 돌면서 부흥 집회를 했고, 특히 개척교회들은 빨리 성장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부흥 강사들을 초빙해 일 년에 여러 차례 부흥회를 개최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곳곳에서 간증 집회가 그 명목을 이어가고 있다. 게다가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은 그런 간증을 쉽게 공유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공유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간증 집회의 간증들은 주로 기적적인 경험을 간증한다. 천국을 보았다거나, 우연 같은 절묘한 타이밍에 일어난 일들, 심지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적지 않은 사람이 공감하거나 부러워하고 '나도 저런 경험을 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심지어 그들과 자신을 비교해서 자신은 그들에 비해 신앙이 부족하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적 경험 간증은 거의 부질없는 이야기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몇 가지 사례들을 이야기해 보면,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더니 한 나무에 10가지 과일이 열렸는데 어떤 사람은 그걸 먹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 사람은 왜 먹지 못하는지 물어보니, "땅에서 주를 위해 한 게 없어서 그렇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간증을 통해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을 독려했다. 그러나 정신을 바로 차리고 이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의도한 바가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 완전히 반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천국 이야기라고 하니까, 또 자신은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라고 전제하고 들으니까 "우와!"하고 듣는다. 하지만 성경에 반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더욱이 뉴스도 안 믿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증거나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인데도 거저 보지 않고 믿는 게 믿음이라는 사슬에 메여 그냥 믿고 주를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진다.

 

또 다른 이야기다. 천국에 갔더니 요셉이 기도하고 있더라고 했다. 모든 기도가 이루어져 가는 곳이 천국이고, 부족함이 없고 늘 기쁘기만 한 천국에서 뭘 기도한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천국이나 기도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체 막하는 말인 건 분명하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게 기도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인생을 살았기에 가는 곳이 천국이다. 그런데 왜 천국에서 기도하고 있을까? 성령이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건 하나님의 뜻이 생명이 된 그리스도인이 나오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즉 천국에 이르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도지 천국에선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 외에도 천국에 가니 금이 넘치고, 화려한 기와집이 있다는 건 이제 없으면 서운한 레퍼토리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반사적으로 생각한다. 부족함이 없는 천국에 금이 무슨 소용인가? 기와든 뭐든 천국에 도대체 지붕이 왜 필요한가? 이젠 한국 사람에게도 불편한 게 한옥인데 천국에는 왜 한옥인가? 라는 건 이제 언급하기도 귀찮은 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걸 경험했다고, 그 신비한 기적 같은 경험을 믿고 주를 위해 무엇이든 열심히 행하라고 간증하고 독려한다.

 

기적이 간증이나 좋은 믿음의 증거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셨을 것

 

이 모든 건 허구다. 아니 거짓이고, 오히려 성경에 반한다. 가장 큰 문제는 기적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기적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결정적 요소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거나,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왔어야 한다. 육신의 능력 이상의 무언가를 경험하는 게 간증이고 좋은 신앙 경험이라면 예수님과 사도들이 살렸던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으면 누구나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건 그게 우리 신앙의 표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복음은 누구나 경험하고 누구나 가능한 일이어야 한다. 특정한 환경, 특정한 기적 경험이 더 좋은 신앙의 표상이 된다면 일반적인 사람은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그건 만민을 위한 복음이 아니다. 그런 건 괄호 밖에 두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걸 추구하는 게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그걸 추앙하거나, 내가 그렇지 않다고 좌절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일부만 경험하는 기적이 신앙의 표상이 된다면 만민을 위한 복음이라 할 수 없다.

 

기적 같은 간증의 허구성을 탄핵할 사유는 넘치고도 넘친다. 신앙의 공로가 많을수록, 그러니까 행함이 많을수록 금도 많이 받고, 남들 먹지 못하는 천국 과일도 먹는다는 식의 신앙은 율법을 배반한 생각이다. 사람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 따라서 행위로 인해 더 나은 상급을 받거나,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곳은 천국이 아니다. 남들은 하는데 나는 하지 못하면서 영원히 산다고 생각해 보면 그건 지옥이지 천국이 될 수 없다. 그걸 천국이라고 간증하는데 태연하게 듣고 있고, 오히려 그걸 부러워하거나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이 땅에서 행함이 천국에서 차별적 대우를 보장한다는 건 행위로 의로워지겠다는 반성경적 미신이다.

 

우리가 간증하고 경험해야 하는 기적은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는 기적의 총화는 '거듭남'이다. 거듭난다는 건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다시 난다는 것이다. 게다가 육신은 동일한데 그 본성이 전혀 다르게 되는 건 기적 중의 기적이다. 사람이 나이 40이 되면 변하는 것보다 죽는 게 빠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진정한 기적은 사람이 거듭나는 것!

 

그런데 자기 본성이 바뀌는 것, 그것도 남들 다 추구하는 높고 영광스러운 게 아니라 낮아지고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사는 게 기쁜 존재가 되는 건 하나님 아들이 이 땅에서 죄인이 되는 것처럼 사람이 형성한 가치와 철학 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게 기적이다. 이걸 간증해야지, 보통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이걸 믿고 열심히 <행동>해야 차별 있는 상급을 받는다는 걸 간증하는 건 다 거짓 선지자다. 만민을 위한 복음이라는 복음의 정체성에 반하고, 행함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에 반하며,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의에 반한다. 그건 한 마디로 사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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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시작하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4. 30. 11:50 Writer : 김홍덕

2014, 블로그(anyword.tistory.com, 성경은 내 이야기다)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하던 즈음에 <큰 교회는 모르는 주기도문> 초판을 발간했었다. 당시 '큰 교회는 모르는'이란 수식어 속 '큰 교회'는 세상에서 크고 위대해지는 걸 하나님의 은혜로 추구하는 교회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책은 그릇으로 치면 초벌 상태로 블로그에 썼던 주기도문 해설을 편집해서 오탈자도 수두룩한 상태로 출간했었다.

 

그런데 그 책은 의외로 몇몇 분들과 이후에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많은 오탈자에서 보듯 다소 정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를 보완하여 가끔 이 주기도문을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간 성경을 묵상한 많은 내용 중 주기도문에 녹아 있는 부분들을 추가해서 2024년 봄에 다시 개정판으로 정리했다.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그저 아는 듯이 생각한다. 기독교인 대부분이 외우고 있기도 하고, 또 수많은 설교들을 통해서 내용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예배를 마치는 암송으로, 천주교에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주기도문을 외우거나 기록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그런 용도로 주신 기도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일상적인 기도인 육신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와는 완전히 다른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께 육신의 필요를 구하는 걸로 아는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기도다.

 

주기도문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다. 하나님께는 있고 사람에게는 없는 단 한 가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구하는 기도다. 주기도문은 사람이 해야 하는 단 하나의 기도인 것이다.

 

사람에게 없는 이 한 가지는 사람이 하나님께 구할 전부고, 이 하나가 있으면 인생의 모든 게 충족된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하나를 구하라고 하셨다. 이 하나의 기도만 그르쳐 주신 이유다. 이 책은 주기도문이 의도한 그 하나를 함께 살펴보는 책이다.(전자책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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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42)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은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니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주님이자 그리스도라는 말에 자신들의 어두움을 깨닫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답을 구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7)

 

이에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 말은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얼마가 되었든 그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했다. 이에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회개는 베드로의 설교 때문이다.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말에 회개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돌이켰다는 뜻이다.

 

세례라는 말은 물에서 건져낸다는 의미다. 물은 또한 율법이니, 율법으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이 바로 세례다. 세례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이다. 또한 겉모습과 외모가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선한 생각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나사렛에서 와서, 가난이라는 사람의 외모와 행위를 의롭게 하는 게 그리스도라는 믿음 아니 신념을 버리는 게 세례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받는 건 행위와 외모가 의로워야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

 

이러한 세례를 받으면 또한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다. 따라서 성령의 강림과 충만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에서 돌아서는 연장선 상에 있다. 행위가 초라하고 가난을 해결하는 게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걸 돌이켰더니 갑자기 신비한 기적을 행하게 되는 성령을 받는다는 식의 생각은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은 게 아니다.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에서 돌아섰더니, 초자연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성령이 오신다? 이렇게 무턱대고 세상에서 잘 되려는 자기 정욕을 좇는 신앙을 추구하는 건 그저 미신일 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에게 유익하다. 주는 사람 역시 이를 위해 준다. 주는 사람은 가졌고 받는 사람에게 합당할 때 선물이다. 머리가 없는 사람에게 헤어드라이어를 주는 것처럼 주는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고 별 쓸모가 없는 걸 주는 건 선물이 아니라 조롱이다.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건 받는 사람이 성령의 정체성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성령을 받으려면 그 믿음과 성령이 그와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이란 걸 믿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성령을 받으려면 그 믿음과 성령이 그와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이란 걸 믿어야 한다.

 

만약 성령을 기적을 행하는 신비한 영으로 믿고 그 신비한 능력이 육신의 문제, 가난과 질병과 사회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없다. 우선 성령은 그런 일을 행하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가난과 질병은 외모와 행위의 영역이다. 그 속에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세례다. 성령은 그 고백이 있는 믿음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신다. 이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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