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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이 땅 위에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 관한 역사서 성격의 성경이다. 저자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로 알려져 있고, 수신자가 데오빌로인 서신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이 데오빌로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친구'로 해석하는 데 비중을 두고 싶다.(하나님을 뜻하는 데오스, Theos와 친구들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Philleo의 합성어라는 해석) 다른 견해로 원문상 사람을 특정하는 '각하'라는 호칭을 쓴다는 이유로 특정인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사도행전의 의도가 그리스도가 교회와 성도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취지를 더 중요하게 보고 싶다.

 

사도행전의 시작은 언뜻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이라고 인식되기 쉽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시작은 성령 세례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하셨느니라(행 1:5)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면서 전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예수님께서 성령에 관해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을 증거하실 것이며, 장래의 일도 알리신다고 하셨다.(14:26, 15:26, 16:13)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교회의 시작인 초대교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은 이처럼 성령 강림을 예언하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건 객관적 시간의 개념으로 봤을 때 성령 강림을 약속하는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일 뿐 실상은 성령 강림은 약속된, 완료되었지만 때가 차지 않은 사건일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성령 강림이 가진 중요한 의미는 제자들의 상태였다. 뒤이어 나오겠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낙심한 마음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는 제자들의 그 상태를 아주 유념해야 한다. 제자들이 낙심한 이유 때문이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걸 부인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믿음은 굳건했다.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일 리 없다고 확신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제자들을 낙심케 한 건 어떻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느냐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믿음은 분명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제자들의 기대와 믿음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다. 심지어 이를 말리려 한 베드로를 보고 '사탄'이라고까지 하셨다. 그렇게 단호한 예수님의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하늘의 천군을 불러 군사들을 물리칠 수 있다면서 순순히 끌려가는 예수님은 자기가 아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의심을 해소하려고 빌라도의 뜰에까지 따라갔던 것이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자기 살려고 예수님을 부인한 걸로 생각하지만, 베드로가 부인한 건 그게 아니다. 베드로가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말한 건, 저렇게 매 맞는 존재가 그리스도가 맞는지 자신은 모르겠다는 고백이었다. 이걸 오해하면 안 되는데 기독교인 대부분은 이를 오해하고 있다. 이걸 오해한다는 건 사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모른다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이것에 관해서는 블로그 내 <칠일 간의 낯선 그리스도>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여기서는 이 정도만 하기로 한다.

 

그랬던 베드로와 제자들이 갑자기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며 순교하기까지 전하게 된 계기는 바로 성령 강림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께서 손의 못 자국을 보여주었음에도 확신이 없었고, 심지어 엠마오로 도망가기까지 했었다. 그런 제자들, 그리스도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느냐며 그 정체성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라며 순교하기까지 전하게 된 변화의 사이에 성령 강림이 있었다. 즉 성령은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시는 분이라는 증거다. 그리고 성경은 그 성령으로 거듭날 때 구원이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구원은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란 걸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건 아마도 기독교인 대부분에게 상식처럼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게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제아무리 좋다고 한들 죽은 자를 살리고, 풍랑을 잠잠케 하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던 제자들보다 좋기는 어렵다. 그런 제자들이 그렇게나 갈등했던 명제, '어떻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단 말인가?'라는 갈등이 그리 쉽게 해소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교리문답에 대답하는 간편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건 사람이 가진 모든 가치와 상식을 뒤집는 것이다. 성령이 오셔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이유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게 무엇인지, 성령 강림이 무엇인지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게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걸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오늘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했는지 돌아보라. 그리고 어떤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라. 당신은 오늘 세상의 기준으로 낮아지기를 구했는지, 자신과 가족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세상 기준으로 잘 되기를 구한 건 아닌지 생각해 보고, 화려하고 비싼 건축 자재로 교회를 건축하며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시험에 합격하고, 사업이 성공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반추해 보라. 그리고 그것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일과 방향이 같은지를 생각해 보라.

 

사람은 낮아지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큰 죄인이 받는 형벌인 십자가를 지는 걸 누구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기독교 안에서 말은 십자가가 영광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께 십자가의 낮은 자리가 아니라 높은 자리에 오르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믿고 그걸 간구하고 있다. 그렇게 쉬운 게 아니란 뜻이다.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존재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 건 하나님 아들이 몸소 십자가를 져야만 사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 걸 사람 스스로는 알 수가 없다. 사람 스스로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사람이 그 생각을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는 걸 보여줘야만 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며, 그 고백을 생명으로 잉태시키는 성령이 오셔야만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스스로 그 생각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이 우리 구원이고, 우리 구원은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성령 강림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 같은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의 모임이란 걸 전하는 성경이다. 재산을 팔아 나누어준다는 말씀에 매몰되어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람이나, 성령을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문맹이나 마찬가지다. 사도행전의 행간과 주제를 모르는 것이고,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받지 못한 사람이다. 컴퓨터 사용법 책을 읽고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이 사도행전을 시작한다. 많은 사람의 오해에 매몰되어 있는 성령의 존재와 교회의 본질을 이야기하려 한다. 마침 오늘 한 교회에 예배에 참석했었는데, "누가 저 성전 문 좀 닫아주면 좋겠다"라는 하나님의 절규를 느꼈다. 세상 어디엔가는 참 교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쓸모를 다 한 것일 테니. 그건 감사한 일이지만,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고, 주식회사가 된 교회가 지배종이 되었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성령과 교회를 바로 알아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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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vs. 십자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십자가의 삶 Date : 2024. 4. 2. 05:55 Writer : 김홍덕

사람은 자기 일상이 늘 상식적이길 원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의 상식이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누구나 상식을 추구하는 건 그 경계선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핵심적인 본질은 대부분 공감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먼저 온 사람이 먼저 행정 서비스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상식에 관한 사람의 기대가 기술을 적용해서 '번호표'를 발행하는 기계를 만들었고, 그 작은 종이 하나가 사람의 이기심을 잠재운다. 모두가 동의하는 상식의 힘이다.

 

하지만 반대로 상식은 사람 사이에 갈등을 일으킨다. 한 사람의 행동이 비상식적일 때, 그로 인해 불쾌하거나 나의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생각할 때 항의가 발생하고, 항의에 불복하는 사람과 다툼이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도로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다. 도로에서는 도로교통법을 잘 준수하고 가는 사람들이 이기적인 운전자로 인해 불쾌하고 심지어 위험한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때로는 이기적인 사람이 자기 이익을 위한 난폭운전 시도가 도로 상황이나 미숙한 운전자 혹은 잠깐의 실수 등에 의해 저지당할 때 적반하장으로 이기적인 사람의 도발로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같은 상식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때론 서로의 삶의 영역에 맘대로 드나들 수 있는 친밀한 관계에서도 상식은 관계 유지의 기준이 된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 약속에 늦은 상태에서 서둘러 준비하는 것과 같은 일들은 아주 친밀한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요구되는 것으로 간주하여 지켜지지 않으면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때로는 서로 생각하는 상식이 달라서 갈등이 되기도 한다. 이런 갈등은 가족과 같이 삶을 공유하는 관계에서 때로 심각한 갈등이 되기도 한다. 설탕과 소금 중 무엇에 삶은 감자를 찍어 먹는 게 상식이냐를 두고 부부가 다투다 이혼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건 상식적일까? 그렇지 않다. 십자가를 진다는 건 사람이 일반으로 생각하는 상식에 반한다.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수고에 관해서는 공정한 분배, 등가 교환이 상식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도 같은 결이다. 두 사람 사이에 수고해야할 노동이나 일이 생긴다면 공동으로 부담하고, 무거운 것을 드는 일이라면 힘센 사람이 더 부담하는 게 상식이고 공정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공정하게 일을 나누는 게 아니다. <본능>적으로 내가 더 수고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보통 무게의 장바구니라면 집에 도착해서 남편이 차를 지하에 주차하러 가고 아내가 먼저 내려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게 상식적이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에게 그냥 가라고 하고 멀리 주차한 다음에 장바구니를 다시 들고 가려 한다면, 또는 굳이 지하 주차장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아내가 같이 내려가서 괜히 계단을 오르는 수고를 감당하면서까지 혼자서도 들 수 있는 장바구니를 같이 든다면 이건 공정한 상식은 아니다. 그러나 이게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건 공정과 상식 앞에서 이타적인 본능을 보이는 삶의 태도다.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는 노력의 범주가 아니다. 그와 같은 행동이 본능에서 비롯되는 걸 말한다.

 

이런 작은 사례에서도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장바구니를 그것도 도착해서 주차장에서 집까지 들고 가는 작은 일에도 십자가를 지는 삶은 공정하고 상식적이지 않지만 오히려 삶을 행복하게 하고 즐겁게 한다. 사람의 관계에서 한 사람이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하는 불공정이 평안과 기쁨 그리고 감동을 준다. 이게 십자가의 삶이다. 그리고 또 언급하지만, 이 같은 삶의 모습은 좋은 관계를 위한 수단일 때는 십자가를 진다고 하지 않는다. 그건 선행(선한 행동)이다. 하나님 앞에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말할 때 그 행동의 범주에 속한다. 십자가를 지는 건 그런 행위가 아니라 본능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굳이 공정이나 상식이 필요하지 않다. 공정과 상식은 이기적인 사람 마음에 질서를 부여하지만, 내가 상대의 이기적인 욕구를 그대로 수용하여 더 수고하는데 굳이 질서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로 이미 서로가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하신 세상에 없는 평안이 바로 이런 것이고, 세상에 없는 기쁨이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만이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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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란 방 안에 있는 코끼리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4. 3. 20. 06:42 Writer : 김홍덕

<방 안의 코끼리>라는 말이 있다. 누가 봐도 심각한 문제인데, 모두가 어쩔 줄 몰라서 문제가 없는 듯 그냥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나 일을 의미한다. 이건 사회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 같은 경우에는 적용하기 힘들다. 불평등은 어찌 보면 방 안에 코끼리가 있는 것보다 심각한 상황일 수 있지만, 사회 구성원 전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 안의 코끼리>는 그 같은 문제 해결 노력조차 외면하거나 묻어 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들은 대부분 방 안의 코끼리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관련된 모든 종교를 다 언급할 필요는 굳이 없으므로 비교적 많은 사람이 자기 종교로 신상 명세에 기록하는 기독교에 대표성을 부여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 안에는 정말로 방 안에 코끼리가 있는 것 이상의 많은 문제가 있다. 문제가 분명한 모순이나 오류가 있는데 이를 문제로 다루지 않거나, 문제로 다루는 경우 신앙이 없는 거라고 도리어 지적을 받게 되는 쟁점들이다. 그중 몇 개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들은 이 블로그에서 아주 자주 문제로 제시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1. 구원을 받았다는 건 죄 사함을 받은 거라면서 정작 기도할 때는 항상 회개하라고 한다.
  2. 안식일, 돼지고기, 십일조는 모두 구약 성경의 율법인데, 현대에 와서는 안식일은 주일로 <변경>했고,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건 <폐기>한 반면 십일조는 그대로 엄격하게 <준수>하고 있는데, 누구도 이 세 가지를 다르게 해석하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낮고 천한 것이고,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으로 세상에서 높아지기를 늘 기도한다.
  4.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이미 하나님이 계셨기에 우주와 지구와 사람의 시작 이전의 시간이 있었다. 그렇다면 <태초>를 거저 지구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5.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는 동안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걸 볼 사람이 있다"라고 하셨다. 이 성경을 부인할 게 아니라면 예수님은 이미 오셨는데, 왜 재림을 기다리는가?
  6.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이를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같은 존재로 같은 유전적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었다는 뜻인데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까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게 맞는 것인가?
  7. 선악과를 먹음으로 사람(육신)이 죽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모두 죽으니 그 누구도 선악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있을까?

 

우선 생각나는 것들만 정리해도 이 정도다. 하지만 이건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1번과 7번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방 안에 있는 코끼리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을 탄핵하는 문제고,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희망을 모두 불태우는 문제다. 한 마디로 예수 믿는 이유를 탄핵해 버리는 쟁점이다. 그런데 이 문제들에 대해 교회와 신학을 전공한 이들은 뚜렷한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건 신학의 필요성과 가치를 유지하는 동력일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런 문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신학이 있다는 건 곧 이 문제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적어도 기독교가 성경을 믿고, 성경은 다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또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면 이 문제들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분명하다. 아직 회개한다는 건 지속해서 범죄하고 죄인의 상태가 유지되거나 혹은 죄인과 의인인 상태가 반복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면 회개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구원은 죄 사함이라는 말씀에 상충하고, 또 구원받은 하나님 아들이 죄가 있는 상황이 되니 이 또한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교회와 목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기도할 때는 회개하라고 하고, 심지어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용서해 달라고 버젓이 기도하고 있다. 죄는 시인하므로 사함 받는다고 하셨는데 자기도 모르는 죄를 어떻게 시인한다는 말인지

 

우리가 정말로 양심과 상식이 있다면 자기 신앙에 이런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구원받은 게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바로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라는 걸 알아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관점과 사람으로서의 상식에 버젓이 어긋나는데 아무렇지 않게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게 양심적이진 않지 않는가?

 

기독교라는 방 안에는 이처럼 버젓이 코끼리가 있다. 상식이 있다면 모순적임을 알 수 있는데 그냥 그냥 지나간다.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겠지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미리 말씀해 두셨다. 좁은 길로 가라고.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진리를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가는 다수결로 결정할 수는 없다. 이건 인생과 영혼의 본질적 문제이자, 하나님을 믿는 이유에 관한 근원적 문제다. 이런 문제와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아무렇지 않고 주일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교회에 가고 있다는 건 인생과 시간 낭비일 뿐 단 "1"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다. 구원? 그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단 하나만으로도 구원이 없다는 증거가 되는 이 많은 모순을 안고?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런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걸 해결하지 않고 '구원받았으니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며 육신의 삶에 필요한 평안과 풍요를 구하는 건 천로역정에서 담 넘어 들어온 순례자일 뿐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필요를 얻으려는 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하기도 어렵다. 앞에서 사례로 든 문제들부터 자기 안에서 해결이 되고,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이 시작된다. 그래서 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이 사안들이 문제임을 이야기하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 나 자신과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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