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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28)

권력자를 동원해 바울과 바나바를 추방한 비시디아 안디옥과 루스드라 이전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은 회심 전 바울 같은 열정으로 사도 바울을 좇아와 돌로 쳐서 죽이려 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내쳤지만 바울 사도는 죽지 않고 오히려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제자로 삼은 많은 제자에게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받는 환난을 생각해 본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지금도 교회에 다니는 게 여의치 않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기독교 집안이 아닌 환경에서 교회에 다니려고 할 때 받는 저항은 다분히 환난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신앙이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한 신앙이라면 그 환난의 가치는 상당히 절하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런 걸 약속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를 폄하할 수만은 없는데, 이는 그런 신앙의 여정은 복음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해서 온전한 복음으로 장성할 때 비로소 자신이 겪은 환난이 값진 상급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신앙을 전부로 알고 머문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구원조차 없는 헛수고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돌에 맞은 건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서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모독하면 돌로 쳐서 죽이라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돌판에 새기셨기 때문에 돌로 심판한다는 건 곧 율법으로 심판하는 것이다. 스데반을 죽일 때도 돌로 쳐서 죽인 것 역시 이유에서다. 그런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는 건 그들의 눈에 사도 바울은 율법을 아주 심각하게 어긴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가 돌에 맞은 이유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과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전했기 때문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한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찾아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바울은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지킨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과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은 세상의 가난도 해결하지 못하고 이방인의 손에 힘없이 죽임을 당한 예수가 전능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용납할 수 없고, 자기들이 목숨을 다해 지키는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 역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신성모독이자 유대인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낮고 천한 신분으로 십자가를 진 예수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 사람이 그걸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라고 하실 이유가 없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다. 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도리어 그 이유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을 핍박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현상은 현재형이다.

 

세상의 어떤 나라도 그 나라의 의를 성문화한 헌법에 반하는 사람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깨어질 때 깨어진 향유옥합에서 향기가 넘쳐나듯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드러났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고 그 본성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그러나 세상은 낮아지므로 이기고 영광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역시나 세상의 기준으로 이기기 위한 일보 후퇴의 개념이지 패배 자체를 이김으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사람들의 가치관은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인들 역시 그랬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이란 천한 동네에서 날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이게 옛날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은 오히려 더 교묘한데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사람의 이런 가치관이 모두가 높아지려고 힘쓰는데 낮아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영광이라고 말하는 걸 용납할 리 없다. 게다가 가족이나 친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렇게 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낮아지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는 게 세상의 논리지만 그 논리가 복음을 핍박하게 되고 거듭난 사람을 환난에 빠지게 한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이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건 이처럼 세상 가치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세상과 반대기 때문에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받는 고난이 모두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은 아니다. 앞서 한 번 설명했듯이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이기고 높아지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받는 고난은 그저 경쟁에서 비롯된 질투와 저항일 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고난은 아니다. 이걸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건 구원이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는 낮아지므로 이기고 영광을 얻는 의가 본성이 된 사람들의 나라다. 다만 이 본성과 의가 세상 가치에 역행하기 때문에 늘 고난받는다. 그러므로 세상과 반대로 십자가에 달린 죄인 예수, 낮아진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고, 이김이며, 영광으로 추구하므로 받는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증거다. 바울 사도가 거하라고 한 <이 믿음>이 또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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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8)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믿었다. 그러나 역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므로 도망하여 루스드라와 더베라는 지방 인근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루스드라에서 본 앉은뱅이를 보니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걸 알아보고 그 앉은뱅이를 고쳐주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앉은뱅이가 일어서서 뛰어 걷는 것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자기들에게 오셨다고 소리치며 바울을 쓰스(제우스)라 칭하고 바나바를 허메(헤르메스 : 제우스의 전령이자 웅변의 신)이라 부르며 두 사람 앞에 제사를 지내려 하였다. 당연히 두 사람은 놀라고 사람들을 만류하였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 중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사람들이 있다. 좀 웃긴 표현으로 "영빨"있다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대했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해 보면 아닌 것 같은데, 깊이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가서 자신이 도모하거나 걱정하는 세상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묻고 헌금하고 오는 게 바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앉은뱅이의 육신이 회복된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 제우스라고 생각했다. 제우스는 사람이 조각한(설계하고 창조한) 신으로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신이다. 즉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보고 그 본질에 속하는 세상일과 육신과 삶을 주관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신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세상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우스라고 받든 것과 기도원에 있는 사람에게 세상과 육신의 일을 의지하는 건 같은 일이다.

 

영빨있다는 기도원에 가서 육신의 일을 의지하는 건 영빨있다는 사람을 제우스로 섬기고 제사하는 것

 

바울과 바나바는 이런 루스드라 사람들을 만류했다. 이때 바울 사도는 자신은 루스드라 사람들과 같은 존재라는 걸로 설득했다. 같은 성정을 가졌다는 게 같은 정체성을 가진 같은 존재라는 의미로 나에게 있는 은혜와 능력은 너에게도 있으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고 섬기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우선 바울 사도 역시 자기와 같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에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형제로서 서로 교제하는 사이가 되는 거지 어느 한 사람에게 경배와 제사를 드리는 관계가 아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우리 복음의 근간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분이라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다. 특히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걸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과 창세기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말씀이 같은 의미라는 걸 알아야 복음을 바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할 형상 있는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형식이고 하나님의 내용인 셈이다. 이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고 정체성이다.

 

이런 관계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정의한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건, 형식인 우리 안에 우리의 존재 의미인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뜻이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다.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 역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재해서 주관하게 하시도록 순종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건 모든 인생에게 정한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섬기거나 경배하고 제사를 지낼 이유가 없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이건 제우스건 사람의 숭배를 받는 존재가 될 수는 없기에 극구 만류했다. 바울 사도가 루스드라 사람을 만류한 내면에 이런 이유가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이유는 앞서 우리 기독교 안에 이런 풍조가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해서고, 성령을 바로 알지 못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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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하나님의 권세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23. 08:30 Writer : 김홍덕

'권세'의 사전적 의미는 '굴복시키는 세력'이다. 다시 말해 상대를 굴복시키는 힘이나 능력이 권세다. 당연히 하나님은 전능자이자 유일한 신이므로 그가 굴복시키지 못할 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감동하는 순종을 사람에게 원하신다. 그래서 그 무한한 능력으로 사람을 직접 굴복시키시지 않고 사람이 스스로 순종할 수 있도록 세상과 사람을 경영하신다. 그게 진심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권세다.

 

하나님의 권세는 강제적이지 않고 사람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능력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십자가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권세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하나님의 권세는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하늘의 천군과 천사를 불러서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결박하러 온 군사를 물리칠 권능이 있음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그렇게 사용하시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므로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스스로 알고 고백하게 하게 하셨다.

 

십자가를 스스로 지신 예수님의 본성이 하나님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 가장 잘 보여준다.

 

이 권세가 하나님께 있으려면 권세가 하나님께 있음을 사람이 고백해야 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처럼 사람의 인정과 고백이 아버지께 권세가 영원히 있게 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니다"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다. 역설적으로 사람이 그렇게 고백한다는 건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한 사람만이 권세가 아버지 하나님께 영원히 있음을 고백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수적으로 사람의 선택이 필요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펼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 만물과 이치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선택은 전적으로 사람의 주권에 달렸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강제하시지 않는 뜻과 연결되어 있다. 이 부분은 저자의 다른 책 <질그릇의 선택>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로 선택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경영이 하나님의 권세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권세는 결국 우리의 권세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권세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처럼 또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한다. 십자가의 도를 듣고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한 사람은 경험적으로 어떤 것도 이 연결을 끊을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어떤 것도 이를 막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을 사람이 굴복시킬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창조되었기에 이를 금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굴복시키는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이므로 하나님처럼 강제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므로 상대를 굴복시킨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이유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나를 십자가로 이끌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를 바라봤던 백부장과 같은 고백을 끌어낸다. 사람을 굴복시키는 하나님의 권세가 이런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거듭난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는 권세가 있다.

 

이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 그리고 영원하다. 영원하다고 하신 건 하나님과 사람은 이런 관계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은 자신이 존재라는 걸 인식하는 이상,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스스로 순종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권세는 불변하기에 영원하다고 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되니 사람은 아들이고 아들이 존재하기에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존재인 이상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스스로 굴복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권세와 능력은 지속되니 영원한 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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