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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 – 금과 은 나 없어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사도행전 Date : 2024. 5. 14. 13:21 Writer : 김홍덕

(3:1-10)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성전에 들어가려는데 앉은뱅이가 구걸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고쳐 걷기도 하고 뛸 수도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고, 어릴 적부터 노래로도 불렀던 기적의 사건이다. 아주 유명한 말씀인데 여기서 두 가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했을까?'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의 경계를 넘어선 앉은뱅이의 모습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나 걸으라 하고(행 3:6)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했는지다. 생계를 위해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바라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금과 은으로 대표되는 돈이다. 이런 그의 바람에 대해 금과 은이 아니라 내(베드로와 요한)가 가진 것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 되는 것이다. 금과 은의 대척점에 나사렛 예수를 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금과 은의 대척점

 

유대인들에게 나사렛은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곳으로 낙인찍힌 곳이다. 선한 것에 나올 수 없다는 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인데, 이건 지명만 한정하는 게 아니다. 신분이나 학력이나 경력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설교를 해?"와 같은 것이다.

 

베드로가 가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이다.

 

생각해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나사렛 출신이라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서, 세리와 죄인과 창녀와 먹고 마시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신성모독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런 예수를 지금 베드로는 금과 은의 대척점에 두고 그것이 내가 금과 은 대신에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앉은뱅이에게 말하고 있다.

 

이는 후에 완치된 앉은뱅이가 솔로몬 행각에 나타나자 놀란 백성들에게 한 베드로의 설교에 그대로 녹아 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예수를 너희가 금과 은을 귀하게 여기는 기준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이를 회개하라고 외쳤다.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하면 유쾌한(새로운) 날이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라 전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세상의 가치 기준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을 믿는 믿음을 권면한다.

 

다음으로는 앉은뱅이의 위치 변화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떤 변화를 전후로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는지가 핵심이다. 표면상으로는 베드로에게 임한 기적 같은 능력이지만, 실상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금과 은이 아니다. 베드로도 이 기이함에 주목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 주목하라고 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가게 된 건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금과 은으로 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선함이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 나사렛에서 온 예수의 정체성을 얻었더니 성전 앞에서 더 들어가지 못하고 앉아 있어야만 했던 앉은뱅이가 성전 안으로 들어갈 뿐 아니라 걷고 뛰며 기쁨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앉은뱅이를 기준으로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상황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이 앉은뱅이와 우리 자신을 비교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성전에 들어가서 기뻐하며, 감사헌금을 드리는 이유와 이 앉은뱅이가 기뻐하는 이유를 비교하면 어떤지를 반추해 보자. 자녀가 입학이나 취직했다고 기뻐하며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이 기뻐하는 이유가 앉은뱅이가 기뻐하게 된 이유와 같은지는 쉽게 비교가 될 것이다.

 

앉은뱅이는 걷지 못했다는 건 행함이 없는 믿음이었고, 성전으로 들어갈 힘과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다. 앉은뱅이가 금과 은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구걸할 때는 성전에 들어갈 힘이 없었다. 그러나 선한 게 날 수 없다는 나사렛에서 온 예수의 정체성을 믿었더니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귀한 게 없을 때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나사렛 예수를 믿었더니 들어가게 되었다.

 

앉은뱅이가 성전 문턱을 넘을 수 있었던 건 나사렛 예수의 이름

 

앉은뱅이의 기뻐하는 모습은 우리가 성전에 들어가는 동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또 우리가 성전에서 어떤 이유로 기뻐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금과 은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는 정체성, 그 하나를 믿는 믿음으로 기쁨이 있는 성전 문턱을 넘을 수 없었던 앉은뱅이 같은 신앙이 성전 문턱을 넘고, 그렇게 넘어선 성전은 기쁨이 되었다. 교회에 가서 세상이 귀하다는 걸 얻기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또 헌금이 없어도 나사렛 예수라는 그 정체성 하나로 기뻐하는지를 반추해 볼 시간이다.

 

우리가 성전에서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사렛은 사람의 기준이다. 선한 게 나올 수 없는 지경과 구분, 차별을 말한다. 죄인들의 소굴에서 하나님 아들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고, 신학이나 경건한 훈련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생각의 상징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다. 사람이 설정한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기준과 다른 그리스도다. 금과 은으로 그 귀함을 매길 수 없다.

 

금이나 은 같은 세상 가치로는 선한 게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는 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

 

우리는 그 나사렛 예수로 인해 성전에 들어가고, 성전에서 기뻐해야 한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믿어야 한다. 금과 은으로 대변되는 가치 없이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우리를 성전 미문에 주저앉게 만드는 가치관을 이기고 들어가 기뻐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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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거룩한 이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5. 13. 14:47 Writer : 김홍덕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정체성을 밝히셨다. 하나님께서 직접 밝히신 하나님의 정체성을 사람들은 그저 산뜻한 표현 정도 생각하지만, 스스로 존재한다는 건 모든 신, 모든 존재와 구별되는 절대적 차이다. 그나마 세상의 존재 중 사람만이 유일하게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만, 사람도 자기 존재를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왜 존재했는지, 이렇게 힘든 삶의 목적과 의미와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

 

이는 사람이 의지하는 신도 마찬가지다. 어떤 신도 존재적 관점에서 정의되거나, 자기 정체성을 밝히고 이를 매개로 신이 된 사례는 없다. 세상에 존재하거나 사람이 상상하는 어떤 신()도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알려 주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믿고 의지하는 신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은혜와 능력을 행하는 존재거나, 이미 존재하게 된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관해서만 언급한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하나님의 정체성은 세상 모든 것과 구분된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어떻게 행동해야) 복을 주는지를 모호하게 이야기하는 세상의 신과 달리 하나님은 사람을 왜 창조했는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이와 함께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하나님이 존재의 신임도 밝히셨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행위를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 어떤 존재로서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아들이 되기를 원하시지, 종처럼 행위의 성과로 평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여기에 있다. 거룩은 구분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은 세상의 모든 존재와 구분되고, 사람의 존재 이전에 사람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을 정하고, 사람에게 그걸 알려 주는 하나님은 육신의 복락을 미끼로 신앙을 요구하는 다른 신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거룩한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처럼 존재의 신으로 알고 부를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게 된다. 아니 이것 외에 하나님을 거룩히 부르는 법은 없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고 부르는 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려면 사람이 다른 신과 명확히 구분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과 내 정체성을 아시는 분으로 믿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모든 존재, 모든 신과 구분하는 사람이다. 즉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믿는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뜻이 자기 육신이 된 사람, 곧 그리스도고, 하나님 아들이다. 이건 곧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이다.

 

하나님 아들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거룩함을 안다.

 

이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안다는 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완전히 달라진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인식은 곧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것인지와 무엇을 드릴 것인지를 정하는 기준이 된다. 하나님을 모든 신과 구분하여 존재의 신으로 믿는다는 건 하나님께 내 존재 정체성을 구하고,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아들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행위를 드리는 종이 될 것인지를 정하게 된다.

 

하나님을 거룩히 여긴다는 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지를 결정한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그렇듯 호칭은 관계를 설명한다. 내가 상대를 어떤 존재로 여기는지를 의미하고, 어떤 존재로 여기는지에 따라 대하는 자세와 주고받는 게 달라진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구분하고 거룩하게 여긴다는 건 세상의 모든 존재, 모든 신과 여호와 하나님은 구별되는 거룩한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부르는 게 참이 된다. 반대로 행여 하나님 앞에 그릇된 <행동>을 해서 육신의 복락을 얻고 유지하는데 해가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체로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부르는 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부른다는 건, 세상 모든 존재, 모든 신과 달리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는다는 뜻

 

따라서 스스로 가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며 나는 스스로 알 수 없는 내 삶의 목적과 이유를 가지신 분임을 믿고 하나님께 존재의 목적을 간구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부르며 간구하는 진실한 기도다.

 

하나님은 모든 성경을 통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성과를 평가하여 의롭다 칭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했다. 아울러 육신의 문제, 먹고, 마시고, 입고, 성공하는 일들은 알아서 하시는 영역이지 사람이 호소한다고 해결하시는 분이 아님도 분명히 하셨다. 그러니까 이런 걸 하나님께 구하는 걸 기도라고 하는 건 기도를 잘못 아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간절하게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과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에 기대어 육신과 세상일을 기도하라고 한다. 그러나 알 것이 있다.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른 목적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다. 물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란 기대로 부르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이 아니기에 육신을 위해 부르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

 

사람들은 많은 문제를 겪으며 살지만, 가장 기저에 깔린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는 <왜 사느냐?>,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인생은 무엇인가?>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의지할 문제는 바로 <나는 누구인가?>이다. 이는 사람이 하늘을 생각하는 기본 개념과도 닿아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의 신 여호와를 의지하는 이유다. 우리가 부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곧 내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정하신 하나님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로 구해야 하는 건 하나님만 알고 있는 <>라는 존재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이유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내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고,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 역시 내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이 받기를 기도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려면 누군가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기도하는 당사자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바로 기도하는 자신이다. 하나님은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구하는 사람에 의해 거룩해진다는 뜻이다.

 

거룩하다는 건 신성시 한다는 의미보다 어원으로 볼 때 <구분>이란 뜻이다. 거룩은 히브리어에서 '잘라내다', ’분리하다’, ‘구분하다라는 의미의 '코데쉬’(kodesh)'란 단어가 그 어원이다. 이는 단순하게 더러운 것과 구분한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무엇이 더러운 것이고, 무엇이 깨끗한 것이냐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꿈속에서 부정하다고 여겨 '먹어라'는 말씀에도 거절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만 봐도 그렇다. 무엇이 깨끗한 것이고, 무엇이 부정하고 더러운 것인가가 거룩함의 핵심이다.

 

이는 하나님의 정체성과 다시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건 당연히 깨끗한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시지 않는 건 당연히 부정하다. 그리고 이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그에 합당하면 깨끗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정하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으면 깨끗하고, 돈이나 밥을 주는 신으로 믿고 늘 그런 기도만 하고 있다면 부정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구한다는 건,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과 달리 내 존재 정체성에 관한 주권을 가진 분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이름은 그 존재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렇게 믿을 때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분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건 결국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바로 아는 사람이 되기를 구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구한다는 건,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게 되기를 구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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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47)

베드로의 설교에 양심이 찔린 사람들은 어찌할지를 물었고,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0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초대교회가 사람 사회 속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설명한다.

 

3,000명의 회개, 그리고 교회의 시작

 

우리가 알고 있고 길에서 볼 수 있는 교회는 일반적으로 먼저 목사 라이선스를 가진 사람이 건물을 임대하고 사람을 모으는 걸로 시작한다. 이런 시작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사도행전 교회의 시작과는 명백히 다르다. 시작이 다르다는 건 미세한 차이가 아니다. 천로역정에서 담 넘어 순례를 시작한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결국 그는 순례를 다 마치지 못했다.

 

잠깐 부연하자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내재한 생명의 본성이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도하고, 봉사하고, 착한 말씨로 살아가면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생각한다. 행동이 자기 정체성을 하나님 아들로 바꾼다고 믿고 있다. 명백히 방향이 반대다.

 

교회의 시작도 마찬가지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내재한 그리스도의 본성이 삶으로 나타나는 게 하나님 말씀의 방향성인 만큼 교회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모이는 게 먼저다. 그리고 건물이 필요해지면 그때 그 용도만을 위해 마련하면 족하다. 이런 교회가 이 시대 기독교의 로망인 초대교회의 본질이다. 건물이 있어야 교회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만남 자체가 곧 교회다.

 

또 하나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초대교회에 관한 말씀이 있다. 바로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라는 말씀이다. 어쩌면 낭설처럼 이 말씀이 공산주의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말씀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교회가 어떤 사람이 어떻게 모인 곳인지를 먼저 생각하고서 이 말씀을 봐야 한다. 그저 교회는, 또는 하나님을 믿으려면 자기 물건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방향도 그게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니 그렇다는 것이지, 이렇게 살아야 교회다워지는 게 아니다.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마치 공산주의 사회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 곧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표현하시겠다는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즉 자기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자기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삶이 된 사람은 모든 게 하나님의 말씀에 수렴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항상', '범사'와 같은 빈도 부사를 충족시키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렇게 사는 생명체가 되는 것뿐이다. 현재 기독교인들이 하듯이 노력으로는 어렵다.

 

모든 걸 통용한다는 건 모인 사람 모두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

 

모든 물건을 통용한다는 건 내 것, 네 것 없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그저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데 자기의 모든 걸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자기가 가진 물건을 모두 하나의 목적에 사용하는 것, 이것이 모든 걸 통용하는 것이다. 마치 자동차 공장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모두가 가진 걸 가지고 자동차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과 같다. 자기 삶의 모든 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데 쓰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의 삶을 통틀어 모두가 모든 걸 주를 위해 통용하는 것이다.

 

소유와 재산을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눈다는 말씀 역시 같은 맥락이다. 부자가 가진 재산으로 가난한 자의 필요를 돕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의 필요다. 누군가 그런 삶으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필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의 어려움을 돕는 필요다. 무작정 재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역을 위해서, 또 그런 사람의 형편을 돕기 위한 필요다. 노숙자에게 밥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것을 한정하는 게 아니다.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는 필요는 사람이 거듭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을 돕는 데 필요한 필요를 말한다.

 

그렇다면 떡을 떼고 교제에 힘쓴다는 말씀도 여기에 귀속된다. 떡은 거듭난 영혼의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의 믿음을 보증하고 위로하는 말씀과 간증이고, 교제는 그것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을 나눔으로 서로가 자기 삶이 하나님께 영광됨을 보증받고, 위로받으며, 그 삶에 더욱 힘쓰게 되는 것이다. 이건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만족스럽지 못한 교회 생활에 '좋은 말씀과 교회가 없을까?' 방황하는 사람이 쉽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모든 건 결국 교회가 무엇으로 시작하고, 무엇을 함께하는 공동체인가에서 결정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육신의 삶의 축복을 공유하고자 하는 교회라면 먼저 건물을 구하고 사람을 모아 노숙자에게 밥 지어주는 걸 재산을 나누어 주는 걸로 알고 그렇게 교회를 운영할 것이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의 만남이 교회의 시작이란 걸 알면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으로 사는 삶의 모습이 모든 걸 통용하고, 주를 위한 필요를 위해 자기 가진 걸 내어놓고, 거듭난 삶의 열매를 나누고 교제하는 교회인 걸 알 것이다. 이 차이가 교회에 대한 만족을 나누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차이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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