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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0) 율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4. 2. 27. 05:39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이후에도 많은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다. 이 율법들을 <모세의 율법>이라고 한다. 이 율법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 갈등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지금은 율법은 구약 곧 오래된 계명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이 오신 달력의 시각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를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고 지금은 거저 복음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율법과 복음을 그렇게 나뉘는 게 아니고, 율법이라고 거저 오래되고 이제는 복음으로 대치된 낡은 계명인 건 아니다. 율법이나 복음이나 모두 그리스도를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었다. 구원의 여정에 있었다는 의미다. 율법은 다양하지만 사람에게 주는 의미는 오히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설명한다.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가 율법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의 본질이다. 따라서 구약 아닌 신약도 그대로 살면 살고(복 받고) 어기면 죽는 (벌을 받거나 재앙을 당하는) 말씀으로 여기면 그 말씀이 곧 사람에게 율법이다.

 

기본적으로 출애굽기는 우리 구원의 여정이다. 이 여정은 <애굽-광야-가나안> 이렇게 3단계로 설명된다. 그리고 광야 생활은 율법적인 신앙의 정체를 설명한다. 단지 시대가 Anno Domini 즉 예수님 오신 이후 시대를 산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복음이 되진 않는다.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복 받고, 지키지 않으면 벌 받는다는 식의 믿음은 율법이다. 복음은 육신이 된 말씀이 삶의 본성이 되어 결과나 신념이나 노력과 무관하게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라는 이유로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이건 아주 근원적인 차이다.

 

결론적으로 어떤 말씀이든 <지켜야 한다>가 될 때 율법이 된다. 이는 신약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해도 같다. <항상 기뻐해야 한다>가 되는 순간 그 사람에겐 율법이 된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는 기준점이다. 종교적 의식으로서 세례 문답식에서 거듭났느냐는 질문에 ""라고 대답했다는 하나의 이유로 거듭났다고 스스로 칭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리스도로 거듭났으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말 안에는 분명히 "해야 한다"가 있다. 그 삶의 모든 게 율법 안에 있음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다.

 

"해야 한다", "지켜야 복 받는다"로 받는 성경은 신구약 가리지 않고 모두 율법

 

이렇듯 성경의 말씀을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여기는 신앙은 예수님 오신 이후 만년이 지난 시점이라고 해도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 복음은 지켜야 하는 말씀이 아니라 육신이 된 말씀, 곧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본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라고 한다. 생명은 본성에 이끌려 사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말씀에 이끌려 사는 게 복음이다. 본능에 이끌려 사는 생명은 본성을 어떻게 할 수 없듯,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본능과 같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교회가 성경을 율법적으로 대하고 있다. 설교도 잘 들어보면 결이 다 같다. 성경대로 살아야 인생이 순탄하다는 게 모든 설교와 교회의 가르침과 성경 공부의 DNA. 자신들이 모두 복음에 안정적으로 속해서 복음의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율법의 삶이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벗어나면 안 되었던 광야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 교회가 시키는 대로, 교리가 해석한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인생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 있다. 솔직히 이건 무당의 협박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겐 구약성경도 복음이다. 흔히 구약을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라 하고 신약을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라 한다. 모두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겐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자기 이야기다. 구약성경의 율법들 모두 자기 이야기가 된다. 모든 율법, 언뜻 "~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는 그렇게 행하기 때문에 주신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면 그렇게 하게 된다는 뜻이다.

 

율법은 지켜서 그리스도가 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구약이든 신약이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모두 지킬 수밖에 없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에게 있어 성경은 자기 육신, 곧 육신의 삶이 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건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확한 논리다. 따라서 율법을 하나씩 지켜서 의로워질 생각은 옳지 않다. 거듭나면 모든 율법과 말씀은 나의 삶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거듭난 게 아니다. 이건 타협의 여지가 없다. 말씀과 삶의 차이를 연구하는 신학 같은 이론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학문은 세상의 것이고, 복음은 세상에 없던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은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책이라는 데 수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a Christ)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존재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육신의 삶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그리스도가 된다면 모든 율법은 자기 삶의 모습을 스케치한 말씀이란 걸 알게 된다.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인 이유도 여기 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그렇게 오실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육신이 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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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9) 자기 본성에 관한 책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4. 2. 20. 06:34 Writer : 김홍덕

출애굽기 21장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폭력과 살인 등에 관한 율법과 함께 특별히 소가 사람을 헤칠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율법이 있다. 소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때 소유한 사람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이다. 한 마디로 소는 사람의 소유물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를 대신해 드리는 제물, 곧 내 자아를 대변하는 개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사람이 소유한 소유물에 관한 하나님의 계명이다.

 

소는 사람이 소유하긴 하나 사람 맘대로 되는 존재는 아니다. 반면에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께 나의 죄를 대신해서 드리는 제사 제물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산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산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인데, 이러한 삶을 구성하고 형성하는 건 사람이 가진 생각과 본성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생각과 본성이 사람의 생각과 달리 사람 맘대로 쉽게 통제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바로 소처럼.

 

사람을 들이받는 소에 관한 계명은 우리가 가진 본성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소유한 소가 사람을 들이받은 경우, 소는 반드시 죽이되 그 고기는 먹지 말라고 하셨으나 소의 임자는 형벌을 면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각자가 소유한 본성은 죽이라는 뜻이다. 즉 사람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본성을 버리라는 뜻이며, 그 고기를 먹지 말라는 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자기 본성으로 인한 소산을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 일로 기뻐하거나 발생할 수 있는 실질적 소득을 자기 것으로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소가 사람을 들이받는 습성이 있음을 주인이 알고 있었다면 계명은 달라진다. 이때는 소의 주인도 죽이라고 하셨다. 자기 안에 사람을 상하게 하는, 그래서 자기 본성 때문에 사람이 실족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에 관해 어떤 조치나 관리도 하지 않았다면 사람도 형벌을 받는다. 쉽게 말해 자신이 말이 거친 사람을 알고 있음에도 늘 거친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고의며 자기 책임이란 뜻이다. 아울러 사람을 실족시키는 함정을 파는 것도 똑같이 처분하라고 하셨다.

 

자기 안에 사람을 헤치는 본성이 있음에도 자기가 옳다고 살아가는 삶은 사망 가운데 있는 삶이다.

 

이 말씀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은 자기 소유인 소를 번제로 드리듯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화를 내는 본성을 예로 이야기해 보자. 소가 제사의 제물이 되기도 하고 사람을 들이받기도 하는 것처럼 화를 내는 본성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될 수도 있고, 단지 자기 의로움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화를 내기도 한다.

 

사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건 선하고 온전한 것이다. 다만 그 선함과 온전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 있을 때 그렇다. 태권브이가 훈이와 영희의 조정을 받을 때는 정의의 로봇이지만, 악당이 조정하게 되면 악당 그 자체이듯,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본성도 하나님을 위해 사용된다면 선한 것이지만, 자기 의를 주장하는 데 사용한다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죄가 된다. 소가 하나님의 번제물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도 이와 같다.

 

사람이 가진 자기 본성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화를 내기도 하고, 행동 그 자체로만 보면 사람이 조심스럽게 취급하거나 심지어 터부시하는 습성들이 많다. 화를 내는 게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화를 내면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되고 상처를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를 낸다는 자체를 금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신앙인들이 그렇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보고 몸시 화를 내셨다. 하지만 도리어 그리스도로 거듭난 본성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업신여김을 당하면 당연히 화를 내야 한다. 다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고 극도로 화를 낸 것처럼.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화를 내기도 한다는 걸 안다. 그런데 자기의를 주장하기 위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에게 화를 내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건, 자기가 소유한 소가 사람을 들이받는 습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 방치하는 것과 같다. 이때는 소의 임자도 처벌을 받듯이 자기 의를 주장하며 화를 내는 일은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행위다. 또한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성품이 다른 사람에게 함정을 파는 것 같다면 이것 역시 같은 처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세상의 의를 추구하여 위로 올라가는 것을 성공과 영광으로 삼는 자기 공로를 똑같이 이를 추구하는 이들을 유인하는데 미끼로 삼아 유인하는 일이 여기에 속한다. 신학과 종교 세계 내에 있는 경쟁에 이겨 크고 위대함을 추구하는 교회 강단에 서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곧 하나님께 영광이라 외치는 게 여기에 속한다.

 

사람이 가진 본성은 소가 제사 제물이 되듯 바울 사도의 말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우리가 가진 모든 본성, 화를 내는 것, 식욕이나 성욕이나 모두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 사용되면 선하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벗어난 삶을 산다면 그 사람에게 속한 모든 본성은 세상이 보기에 아무리 선해도 죄다. 괜히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 되기도 한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 4:4)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본성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과 다른 삶을 살면서 표출하면 안 된다. 그런 표출은 거의 사람을 헤친다. 그래서 소가 사람을 들이받으면 죽이라고 하신 것이다. 더욱이 사람이 화를 내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 또 자기가 가진 어떤 본성이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면서 이를 고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의를 주장하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라며 정당화 하면 그 사람도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다. 물론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만족이 없는 에덴에서 쫓겨난 불행한 삶이라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긴 하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가진 본성이 소가 제사의 제물이 되듯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의 삶이 되어야 함을 묵상해야 한다. 나의 삶이 그러한가 반추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그러게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그 소망은 노력이나 신념이나 행위를 단속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생명으로 다시 나야 한다. 거듭남이 구원이라 말씀하신 이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자기 생명, 삶의 본성이 되는 거듭남이 해답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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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8) 눈에는 눈, 이에는 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출애굽기 Date : 2024. 2. 16. 07:51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 십계명의 설명이자 확장에 속하는 말씀 중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한 말씀을 한 줄로 요약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될 것이다. 상대에게 미친 손해는 미친 손해 그대로 갚으라는 것이다. 너무나 유명해서 성경을 배척하는 공산 사회주의 국가의 공식 논평에도 사용된다. 하지만 지금은 이 계명을 액면 그대로 지킬 수 없다. 그랬다간 사회적으로 범죄자가 된다.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사람들, 같은 구약에 있는 십일조나 안식일에 관한 계명을 액면 그대로 지키려는 사람에겐 참 난감한 일일 테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에 대해 언급하셨다. 하지만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해석을 내놓으셨다. 누군가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어 주라고 하셨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8-39)

 

같은 말씀인데 하나님과 예수님은 다른 해석을 내놓은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선포한 계명을 아들이 뒤엎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성경 말씀이 지향하는 일관된 방향의 의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에서 보듯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다 이루어져야 하는데 방향이 다른 말씀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한편으로 보면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들을 더 엄격하게 해석하셨다. 형제를 보고 욕하면 이미 살인한 것이고,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신 게 대표적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씀에 관한 견해 역시 그렇다. 눈을 눈으로 갚는 것보다, 오른편 뺨을 맞고 왼편 뺨을 내주는 게 훨씬 어렵다. 액면대로만 보면 그리스도가 된다는 건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처럼 보일 수 있다.

 

보복에 관한 계명이 아니라 악하지 말라는 계명이다.

 

하지만 성경의 모든 말씀은 행간을 봐야 한다. 성경이 명하신 계명들, 그 계명을 지키는 행위는 본질이 아니다. 행위는 내용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동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있는 걸 표현한 실체다. 사람이 눈을 상하게 하거나 오른뺨을 때리는 건 그 사람 마음에 있는 분노와 악의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신 이유다. 또한 모세의 계명도 악함에 대한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게 목적이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강제로 더 많은 금액을 징수하겠다는 세법은 강제 몰수가 목적이 아니라 성실하고 겅정한 세금으로 나라 살림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게 목적인 것과 같다.

 

결국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사람이 그 마음에 있는 악을 표현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직면하게 될 것이란 취지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함이 그 속에 없으니, 눈이나 이로 보복당할 일을 행하지 않는다. 여기서 핵심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악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다짐하는 건 그 속에 악함이 아직 있기 때문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16)

 

결국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씀을 지킨다는 건, 눈을 상하게 한 자에게 되갚아 주는 것으로 계명을 지키는 게 아니다. 남의 눈과 이를 상하게 하지 않는 게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 악함이 없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다. 존재가 바뀌지 않는다면, 노력으로 악한 행동을 참고 참는 사람은 언젠가는 폭발하게 되고, 그 후에 심각하게 후회하고 자책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면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에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를 겪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표현할 악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존재를 그리스도라 하고, 그리스도는 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으로 이르게 된다고 일관되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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