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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주기도문) 악에서 구하옵소서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24. 9. 16. 14:22 Writer : 김홍덕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사람의 기도다. 지금까지 하늘은 어디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그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건 무엇인지 그리고 죄와 시험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악에서 건져 주시기를 구한다. 악에서 건져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다는 건 사람이 악에 빠져 있다는 의미다.

 

사실 지금까지 전개된 주기도문의 내용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그리스도로 살아가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진다는 건 곧 죄가 사해졌다는 의미고, 시험을 이겼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은 악하지 않다. 유일하게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사람은 그 자체로 선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당연히 선한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게 악에서 구원받았다는 의미라면, 우리는 어떤 악에서 건져짐을 받았는지, 즉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또 어떤 위험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악에 관한 고찰은 아직 악에 속한 사람에겐 또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시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잘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어떤 젊은 부자가 예수님께서 와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여"라고 불렀다. 그냥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선하다고 했으니, 문제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가 끝내 돌아가게 할 정도로 매정하게 대하셨다. 예수님은 시작부터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며 까칠하게 반문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선하시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7-18)

 

사람이 악으로 규정하는 대상은 기본적으로 행위와 현상들이다. 어떤 행동은 악하고, 어떤 행동은 선하다고 규정한다. 그래서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우리가 악하게 행동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의도라고 해석하고 믿는다. 악의 실체를 행동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도, 성경 공부도 다 높은 가속도로 이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악하게 행동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악한 행동을 한다면 삶이 재앙을 맞을 것이라 믿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악()의 실체를 행위로 본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처음 행한 악은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순서로 처음이 아니라 선악과가 죄와 악의 시작이란 뜻이다.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는 건 불순종이란 행위라서 선악과 먹은 <행위>를 악으로, 죄로 이해한다. 즉 행위로 지은 범죄로 여긴다. 그런데 선악과가 행위로 인한 범죄라면 여전히 행위로 죄를 범하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다. 여전히 행위로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선악과를 먹은 행위를 범죄로, 악한 행위로 믿고 있다.

 

선악과를 악한 행위로 본다면 사람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선악과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존재다. 아담('사람'이란 뜻)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에 있느냐 아니냐가 선악과의 핵심이다. 아담과 하와는 사람의 자리를 버리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처럼 되어야 선해질 수 있다는 생각, 이게 죄의 DNA. 실제로 죄는 '자기 자리를 벗어난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어원이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행위가 아니다. 존재가 존재 목적 안에 있는지다.

 

자기 정체성을 벗어나려 한다는 건 현재 자기 정체성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만족의 동산인 에덴동산에 있을 수 없었다. 실제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자신이 부끄럽다는 건 자기 존재가 만족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를 부끄럽게 여기고 벗어나 하나님처럼 되려는 의도, 이것이 바로 죄의 근원인 <>이다. 그러니까 악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가 자기 정체성을 벗어난 것이다.

 

악의 실체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하나님! 나의 정체성이 회복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주기도문 내용이 모두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려면 당연히 지금 내가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벗어나 있다는 인식과 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가 자리를 벗어났다는 걸 모르는데 자리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벗어났다는 걸 인식하거나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죄를 시인하고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건 모두 거짓말이다. 시인해야 하는 건 하나님 정한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8-9)

 

따라서 우리를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단순히 악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나를 제어해 주시길 기도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나 있는 게 악이고, 자신이 그 악에 속해 있다는 걸 시인하는 고백이 선행되어야 하는 기도다. 이를 위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시고, 하나님의 의가 나를 다스려 주시기를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의 한계(자리)를 넘은 능력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시험을 이겨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하라고 하신대고 구하면(주기도문대로 기도하면)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면 시험은 쉽게 이긴다. 모든 건 하늘의 뜻, 곧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면 사람은 자기 존재 정체성 안에 거한다. 바울 사도는 이를 <그리스도 안>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선하다. 결국 하늘의 뜻,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시험도 이기고 선에 거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걸 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악에서 벗어난다는 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이는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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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3:1-12)

13장부터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 중심으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복음이 이방인과 각 나라로 전파되는 과정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이 변화의 중심인물인 바울 사도의 본격적인 활동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에서 시작한다. 성령께서 안디옥교회의 선지자와 교사들에게 임하셔서 바울과 바나바를 안수하고 파송한다. 그리고 여기에 훗날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는 요한이라는 마가가 동행한다. 이것이 바울을 1차 선교 여행의 시작이다.

 

바울은 가장 먼저 살라미라는 곳에 이르게 되고 거기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자 그 지역의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이 이 말씀을 듣고자 했는데 이를 방해하는 자가 있었다. 그 지역의 박수, 곧 마술사 혹은 무당인 거짓 선지자 유대인 바예수라는 자였다.

 

바예수는 총독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 듣는 걸 방해했다. 이에 성령이 충만한 바울이 이 거짓 선지자를 책망하니 거짓 선지자가 얼마 동안 소경이 되고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었다. 성경의 문맥으로 보면 총독이 바예수를 보고 믿었다는 것에서 바예수 주변에 기상이변처럼 안개나 어두움이 생겨났다기보다, 바예수가 혼돈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바예수의 모습과 상태는 성경이 말하는 어두움에 빠진 사람의 모습이다. 더 상세히 말한다면 바예수는 어두움에 새로 진입한 게 아니라 사도 바울로 인해 그가 어두운 존재인 게 드러났다고 하는 게 바른 관점이다. 이어 묘사된 바예수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즉 아직 구원이 없는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거짓 선지자 바예수의 어두움은 자아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부인하고 억제하는 모든 사람의 상태

 

또 다른 관점에서 바예수의 행동은 타인에게 행한 행동이 아니라 자아 안에서의 갈등으로도 볼 수 있다. 사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이렇게 볼 때 자기 이야기가 된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한 성경이 자기 이야기가 된다는 건 자신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이야기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 사람 자아 안에서 복음에 대해 저항하고 방해하는 생각 역시 바예수의 모습이다. 어쩌면 이 관점이 더 중요하다.

 

한편 거짓 선지자 바예수는 어둡게 되어 보지 못하게 되자 자신을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했다고 했다. 두루 구했다는 건 인도할 사람을 쉽게 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바예수가 총독 서기오 바울이 복음 듣는 걸 방해한 행위가 우리 각 사람 자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행위의 예표인 걸 생각하면 사람이 자기 길을 인도하는 이를 두루 찾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인생의 길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

 

실제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길을 찾는다. 그리고 그 길을 인도하는 사람과 책과 명언과 이치를 찾는다. 문제는 이게 평생의 일임에도 잘 찾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런 상황을 지혜 있는 사람은 이상하게 여긴다. 자신의 길이 바른지 돌아보게 된다. 이런 출발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결국 인생에서 자기를 인도할 사람과 가치를 찾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다. 인생을 창조한 하나님만이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유일한 대안을 버리고 다른 길을 찾는 건 노력은 가상하나 다 헛짓에 불과하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바예수라는 거짓 선지자가 자기 길을 인도하는 사람을 찾지 못하는 걸 보고 하나님을 믿었다. 이런 순종과 과감한 선택이 있어야 구원을 얻고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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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5)

야고보의 죽음과 동시에 헤롯은 유월절에 베드로를 죽이려고 베드로에게 쇠사슬을 채우고 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베드로를 구원(옥에서 꺼냈다.)했다. 하나님의 사자가 밤에 옥에 갇힌 베드로에게 와서 띠를 띠고 신을 신고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고 했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자를 따라 두 차례 파수꾼을 지나 무사히 옥에서 나왔다.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성도들이 모인 곳에 찾아갔으나 사람들이 쉽게 믿지 않을 정도의 일이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에 비해 약해 보이는 기적 같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인 건 마찬가지다.

 

세상의 가치는 복음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한다. 특히 자기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기적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하나님 혹은 신에게 기적적인 요구를 많이 한다. 그러나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다. 목적과 부합되지 않는 일을 우리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한다. 기적도 마찬가지다. 기적을 일으키는 주체이신 하나님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필요할 때 기적을 일으키신다.

 

기적적으로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헤롯의 핍박으로 옥에 갇혔었다. 헤롯이 핍박한 이유는 낮아지는 걸 의로 여기는 복음인 십자가를 진 죄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사람들이 믿는 건 높은 것을 추구하는 의를 가진 세상 임금인 헤롯이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의에 반한다. 비단 헤롯뿐 아니라 누구라도 세상에서 높아지는 걸 의로 삼고 살아가는 건 하나님의 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옥에서 꺼내셨다. 하나님의 당연한 일이 사람에게 기적이 된 것일 뿐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베드로는 그런 핍박에 갇혀 있을 수 없기에 하나님이 기적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에게 창조한 목적을 알리시기 위해 일하신다. 그게 때로 사람에게 기적이 된다.

 

기적은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만 일어난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벗어난 기적은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또한 괜히 사람을 굴복시키기 위해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모든 경영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는 걸 지향한다. 이 경영과 목적을 위해 필요하면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모든 사람을 죽이실 수도 있다. 어차피 하나님이 창조주고 소유주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피조물인 사람이 인권을 운운한다는 건 우스운 이야기다. 어쨌든 기적은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한 목적에 순종하는 존재가 되는데 필요한 경우에 일어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성령의 역사로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건 반드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저 병을 낫게 하거나, 갑자기 부자가 되게 하시는 성령은 없다. 사도행전의 모든 기적과 역사가 이와 같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분명해진다. 바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높은 자리를 추구하던 사람이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걸 믿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이 일으키시는 기적이다. 이게 신앙 안에서 당연한 말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늘 언급하듯이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고 그 성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위하겠다는 신앙 세계 안에는 이런 믿음이나 생각 혹은 가치나 기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에 대해 바로 이해해야 한다. 이 이해는 단지 기적이라는 하나의 명제를 이해하는 게 아니다. 십자가의 도, 낮아지는 도와 세상 가치 기준으로 낮고 천한 자리가 바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뼈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머리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이건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생명이 바뀌고 본성이 바뀌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정말로 이렇게 정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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